바이로챠나/사 찰

불영사

왈선생 2011. 8. 8. 23:23

 

울진에서 안동쪽으로 들어가는 국도가 36번 국도다. 봉화에 가는 길은 온통 계곡을 따라 길이 흐른다. 사실은 물이 흐르고 길은 그 위에 생겼는데, 물의 흐름을 따라 길이 만들어졌으니, 길따라 물이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길과 물의 높이 차이가 제법 심하여 물은 아득히 길 아래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니 그 깊음 맛이 보통이 아니다. 불영계곡에 여름과 가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리는지....

 

불영사는 불영계곡에서 약간 벗어난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울진에서 36번도로를 따라 봉화로 가는 계곡이 불영계곡이다. 사적기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9마리 용을 쫓아내고 절을 지었더니, 부처모양의 바위가 못에 비쳤더란다. 그래서 부처의 그림자가 비취는 절, 불영사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못을 앞에 두고 전각들이 빙 둘러 자리잡고 있다. 아예 흰부처님을 한분 잘 만들어 놓아 못에 비취게 배려해놓았다. 확실하게 현재와서 불영사가 되었다.

 

 

 불영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응진전이다. 절 입구에서 보면 작지만 쉽게 보인다. 앞에서 보면 대웅전을 정면에 두고 요사채가 좌우에 있다. 왼쪽으로 명부전과 응진전이 전개되어 있는데, 응진전은 일단 고색창연한 자태로 그 모습이 눈에 띈다. 1984년 해체하여 보수할 때, 종도리 아래 장혀 안에서 1716년에 쓴 상량문이 나왔고, 이 상량문에서 1578년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보수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1400년대 처음 지은 건물임을 알 수 있다. 15세기 조선 초기의 모습을 이후 보수하면서 얼마나 원형을 유지했는지 모르지만 상당히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건물이다.  상량문에서는 영산전이었다고 하는데, 어느 시기에 응진전으로 바뀌었다. 모두 석가모니 부처가 제자들과 함께 기거하는 전각이니 큰 차이는 없지만,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된 것인지는 알길이 없다.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에 다포식 건물이다. 자연석으로 기단과 주춧돌을 삼았고, 기둥도 약간 배흘림하고 있다. 정면 중앙칸에는 문을, 양옆칸은 문살문을 어중중한 높이에 달았고, 보랏색칠을 하여 좀 특이하다. 전각건물이라면 서까래와 부연을 장치한 겹처마 지붕이 보통인데, 건물이 작아서 그런지 이 건물은 부연이 없는 홑처마 지붕이다. 조선시기에 들어와 문살문을 전면에 배치하기 시작하였으니, 아직 그런 유행을 타지 못한 고려적 양식이 아닐까 싶다.

 측면에는 박공을 달았으나, 그 내부를 보니, 역시 다포식 공포가 짜여져 있다. 맞배집 측면은 도리가 밖으로 조금 나와 있는게 보통인데, 색다른 모습이다. 공포의 외형인 쇠서는 위로 올라가지 않아 역시 조선초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자연히 장중한 분위기를 만드는 요소라 하겠다.

 

 

 응진전 내부는 석가여래를 중앙에 두고 오른쪽에는 과거불의 보살상인 제화가라보살상이, 왼쪽에는 미래불인 자씨미륵보살상을 두고, 그 양옆에는 나한상이 즐비하게 나열하고 있다. 즉 현생불인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과거,현재,미래 및 그 과정에서 나타난 수많은 보살에 가까운 존재들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석가여래가 있는 이 세상은 바로 진리를 깨달은 열반의 세상이고 그래서 그 내부를 목조건물의 각 부재를 이용하여 장식하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려 표현하였다. 내출목 포작 위에 걸친 대들보는 건물 전체에 비하여 커서, 듬직하고 장중한 분위기를 만든다. 내2출목의 공포 역시 듬짐듬직하다. 자그마한 나한상을 빼고는 모두가 엄숙할 정도로 묵직묵직하다. 그림도 어쩐지 그런 분위기를 조장하는 듯 하다. 15세기 조선전기 사회가 불교에 요구하였던 분위기가 아닐까 어림잡아 본다.

 

 

 대웅전은 조그마한 언덕같은 산을 배경으로 요사채와 누각건물에 둘러싸여 있어 포근하다. 마당에는 3층석탑이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데,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초기의 양식을 지니고 있다. 자세히 보면 마당도 앞쪽으로 경사가 져 있어 보이지 않은 경사로 해결이 안될때 한칸 돌로 쌓아 경계를 두었다. 정면 3칸 측면3칸의 다포 팔작지붕의 다포식 건물이다. 지붕과 기둥 사이에 큼직한 공포를 짯고, 그 위에 날렵한 선을 가진 지붕이 한껏 멋을 내고 있다.

 

 

 장대석을 이용한 격조높은 기단 아래 양쪽에 몸체는 기단 아래에 머리만 빼꼼히 내놓은 거북이가 있다. 무거운 것은 잘 짊어질 것 같은 짐승이니 옛날부터 대좌에 많이 표현해왔는데, 건물에 표현한 것은 흔치 않다.  

 대웅전은 1725년에 건립된 것으로 본다. 내부에 걸린 탱화가 1725년(옹정삼년을사)에 그려졌다고 했으니 말이다. 

 

 

 불영사 대웅전은 내부 모습이 더 멋있다. 내부 중앙에 기둥을 세우고 그 안쪽에 부처님과 협시보살을 모셨다. 뒤에는 영조때 그렸다는 우아하고 맛깔스런 분위기를 지닌 탱화가 걸려있다. 대웅전도, 탱화도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다. 닫집은 해넣지 않았으나 4내출목 공포와 기둥과 대들보의 장식 및 천정의 장식이 200년 가까이 되었음에도 모두가 깔끔하고 선연하며 아름답다. 

 보통의 18세기 건물이 지니는 모습과는 좀 다르다. 내출목의 공포 살미끝이 전혀 위로 치솟하 안으로 연꽃이 핀 듯한 모습이 일반적인데, 이 대웅전의 살미 쇠서는 작아 보이지도 않는다. 대신 별로 크지 않은 공포들이 조화롭게 올망졸망 자리잡고 그 위에 대들보가 놓였으며 천정이 그 위에 설치되고, 대들보에서 평주로 가는 곳에 퇴량을 받쳤는데, 이들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적당한 크기와 분위기와 그림들을 지니고 있어 세련된 멋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대웅전의 탱화 역시 아름답기 그지없다. 석가여래가 가장 중앙에 크게 모셔져 있고, 석가여래의 온갖 권속들이 그 높낮이에 따라 전체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분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비롯한 보살들의 아름다운 몸매가, 사천왕을 비롯한 귀화한 귀신들의 모습이 적당하게 어울리고 있다. 

 

 

 일단 그 색갈의 포근한 분위기가 끝내준다. 천상과 천하의 최고의 신들이 왕창 아름답게 각각의 색채를 띠면서 모여있는 아름다운 모습이자 그림이다.

 불영사 탱화 하나만 해도 불영사는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절간이 되리라.

 

  

 

대웅전 천정에 그린 용의 그림은 마치 고구려 고분 벽화 그림을 보는 듯 하다. 그러나 백호의 그림은 민화의 전신인 듯하다. 용은 석가여래가 태어났을 때, 9마리가 입에서 물을 뿜어 석가여래를 목욕시켜주는 존재였다. 아마도 힌두교의 9마리 나가(뱀)이 중국을 거치면서 용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용그림은 상당히 신비스럽게 그렸다.

 

 

천정 구석 구석에 등장하는 비천상도 대단하다. 얼굴 생김이 좀 이상하지만 자태나 옷자락은 조선시대 그림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고풍스럽다. 고려나 그 이전의 그림의 느낌이 든다.

 

 

그러나 호랑이인지 용인지를 타고 있는 신선도에 이르면 아! 조선의 그림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상한 머리모양과 자태가 영 신비감보다는 무당의 느낌이다. 타고 있는 짐승 모양과 모습도 무당집에 걸려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지녔다. 

 

 

대웅전 바로 옆에는 이 절을 창건했다는 의상대사를 모신 전각 의상전이 있다. 부석사 조사당과 같은 건물이라 하겠다. 언제 지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막돌 기단 위에 정면 3칸의 자그마한 집이다. 겹처마 맞배지붕의 주심포건물이다.

 

 

의상전 안에는 의상대사 조상이 중앙에 있고 좌우 벽에는 원효와 의상 그리고 이 절과 관련있는 대사들의 그림이 걸려있다. 원효와 의상은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지만, 추구하는 방법은 조금 달랐다. 6두품 출신의 원효는 선종 전신의 정토료를 통하여 중생의 해탈에 관심을 기울인 반면에, 진골 출신의 의상은 더 심오한 불교 철학을 정리하고, 국가의 지원을 받아 전국에 사찰을 건립하는 업적을 남겼다. 불영사에서 이런 그림을 언제 그려 걸어두었는지 알아 볼 일이다.

 

 

명부전도 막돌 기단 위에 중앙에 간단한 돌계단을 가지고 서 있다. 응진전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 대웅전 뒤쪽에 자그마하게 자리잡고 있는 명부전의 모습은 부석사 대웅전 뒤에 자리잡은 선묘각을 닮았다. 그러고 보니 불영사의 의상전과 산신각이 부석사의 구조와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산신각 안에는 바로 호랑이 타고 있는 산신이 무슨 불교와 관련있는지 모셔져 있다. 샤마니즘의 종교적 경향이 불교와 결합하면서 절간에 남겨진 것이라 하겠다.

 

 

돌아나오는 길에 뒤돌아 보니 불영사 전각이 못에 비쳐 우아하게 보인다. 어찌 보면 저 멀리 산위의 부처처럼 생긴 바위가 못에 비칠만도 하겠다. 싶다. 대웅전 쪽에서 이 못을 보면 실제로 하얀 부처가 있다. 못 가에 백불좌상을 조상해 놓았기 때문이다. 부처처럼 생긴 바위의 그림자를 보고자 했지 만들어 잘 비추라고 흰색까지 칠한 부처가 아닌데 말이다.

 

 

돌아나오는 길에 양성당 혜능의 승탑을 구경한다. 들어가는 길에 있으나 나오면서 보려고 아껴두었던 것이다. 사각의 지대석 위에 연꽃모양의 대석을 가진 석종형 승탑이다. 조선시대 승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탑신 아래에는 역시 연꽃으로 장식했다. 연꽃이 받들고 있는 세상은 바로 부처님의 세계이다. 위에는 역시 복련으로 장식하고 그 위에 연꽃 봉오리 모양의 상륜부를 두었다. 

혜능은 1696에 이곳에서 입적한 불영사 주지였단다. 옆에 있는 탑비에 글은 영의정을 몇번씩이나 지낸 최석정(1715년에 몰)이 지은 글이란다. 숭유억불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불교를 탄압한다고 했으나, 내세관념이 부족한 유교의 공허점을 불교가 채울 수 밖에 없었다. 영의정까지 지낸 사림 재지사족들이 자신의 향리의 불사에 경제적인 지원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불영사는 조선전기의 응진전을 비롯하여 18세기 대웅전과 대웅전 탱화로서 조선시기 불교의 위상을 보여주는 좋은 절간이라 하겠다. 조선전기 웅장하고 듬직한 느낌의 응진전이 살아있었기에, 대웅전은 18세기 세련되고 화려하며 날렵한 상인이 주체가 된 다른 절간과는 다르게 기교를 부리지 않은 가운데 우아하고 듬직하면서도 안정된 화려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지역은 내소사나 미황사와는 달리 산중 깊은 곳이어서 상인보다는 재지사족들이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들의 지원 아래 지어졌기 때문에 재지사족이 주도한 17세기 절간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닐가 여겨진다.  

 

 

 불영사를 지나 조금 봉화쪽으로 가다보면 사랑바위가 나타난다. 사랑하지 못하고 죽은 원혼이 바위가 되었나, 두 남녀가 부둥켜 안고 입술을 포갠 듯 서 있다. 사랑하고 있는 자세 맞다. 이렇게 불영사 계곡은 끝까지 사랑하며 살아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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