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용주사 대웅보전, 앞 계단이 넓직하게 조성되어 있다. 융릉의 구조와 비슷하단다. |
|
|
| 모든 절간에는 특유의 냄새가 있다. 경기도 화성시의 용주사에는 왕실의 냄새가 가득 차 있다. 그것도 조선 후기 왕권 확립에 총력을 기울였던 정조 임금과 그 당시 왕실의 냄새가 가득 배어 있다. 용주사는 전체적으로 양반집이나 궁궐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 대웅보전 좌우의 집들인 만수리실과 나유타료는 기거하고 생활하기에 적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
|
▲ 용주사 입구 삼문, 보통 절간과 달리 세칸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문은 아마도 임금 전용일 것 같다. 궁궐문의 구조와 비슷하다. |
|
|
| 용주사 입구는 삼문으로 되어 있다. 석주가 제법 높다. 삼문을 지나 천보루 역시 높은 석주를 가지고 있다. 모두 어간과 좌우문으로 이뤄져 있다. 어간의 중앙문은 임금이 드나드는 문일 게다. 궁에 있는 문들의 구조와 상통한다. 그래서 그런지 중앙 어간문은 항상 닫혀 있다. 임금이 와야 열리나 보다.
천보루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가면 대웅보전이 나온다. 누 아래에서 계단을 올라가노라면 대웅보전 용마루가 모두 보인다. 용마루 솟음이 보이게 누대 아래 쪽 부분을 살짝 올려놓았다. 정성이 살짝 엿보인다. 대웅보전 마당이 건물 크기와 적당히 어울린다. 너무 넓으면 휑해 보이고 너무 좁으면 답답해진다. 대웅보전에서 보니 스님 두 분이 마당을 가로지르고 있다.
|
|
▲ 용주사 천보루와 대웅전 용마루, 용마루가 잘라지지 않게 조처했다. 용마루는 임금을 상징하는데, 그것을 다치지 않으려는 배려다. |
|
|
| 대웅보전의 계단과 소맷돌도 특이하다. 사도세자 무덤인 융릉의 정자각 소매돌과 너무나 닮았다고 한다. 동일인이 만든 것으로 보인단다. 계단은 정면 중앙에 크게 조성되었다. 이 시기 대부분의 법당 계단이 좌우에 크지 않게 조성된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아마도 법당에 오를 국왕을 배려한 것이라 보인다. 이후 19세기의 왕실의 지원 아래 지은 절간들이 이런 구조를 계승했다.
왕실 지원아래 지어져, 화려하지만 소홀함 없는 건축기법
|
|
▲ 용주사 대웅보전 내부 모습, 석가여래가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후불탱화가 원근법을 활용하여 그린 진경풍의 그림으로 유명하다. |
|
|
| 대웅보전 내부는 화려하기도 하고 엄격하기도 하다. 조선 후기 절간들의 화려한 경향을 이어받기도 했지만, 결코 허술할 수 없는 왕실의 엄격한 법도가 반영되었다. 석가여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 삼존불은 나무로 깎아 만들었다. 조각 솜씨 같은 시기의 여타 불상에 비해 완전성이 돋보인다. 닫집도 화려하나 흐트러짐이 없다. 평범한 얼굴의 두 비천상이 하늘을 날고 있다. 역시 화려하지만 조금의 소홀함도 없다.
부처님 뒤에 건 탱화는 보통 절에서 만날 수 있는 불화와 느낌이 너무 다르다. 생동감이 넘친다.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란다. 원근법을 포함한 서양화풍을 강하게 띠고 있다. 김홍도가 청나라를 사신으로 따라간 적이 있는데, 이때 청나라에 온 선교사들의 서양그림을 본 적이 있단다. 그 때 본 서양그림의 흉내를 내 본 그림일까? 부처님과 그 권속들이 활기와 생기가 넘친다.
|
|
▲ 용주사 대웅보전 비천상, 조선 후기 비천상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이상적인 모습에서 점차 인간화되어 가고 있다. |
|
|
| 탱화의 부처님과 그 권속들은 이상 세계에 사는 비범한 존재들의 모습이 아니다. 그냥 항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진경산수화가 유행하다가 최고의 경지를 구가하던 시기의 그림이어서 그렇단다. 전통적 기법으로 그린 바로 옆의 삼장 탱화와 비교해 보면 그 활기가 바로 보인다.
|
|
▲ 용주사 대웅보전 천정, 내출목 장식이 비교적 깔끔하다. 치나치게 화려한 다른 절간과 차이가 난다. 대들보 용머리 조각 등도 왕실의 엄격성이 느껴진다. |
|
|
| 대웅보전의 공포는 외3출목 내4출목으로 크지 않은 건물이면서도 많은 공포를 걸어 웅장하고 화려함을 더했다. 내출목과 들보들은 당시 사찰들과는 달리 어지러울 정도의 장식을 꾹 참고 필요한 적당한 장식으로 꾸몄다. 천정은 우물천정으로 격자 안에 둥근 원무늬와 꽃무늬를 역시 깔끔하게 처리하였다. 어디 하나 왕실의 권위를 허물어뜨릴 허튼 구석이 없다.
|
|
|
▲ 정조의 능행 그림. 정조 임금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황성행차를 여러번 시행했다. 노론 세력들에게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
|
|
조선 전기의 사찰들은 작은 규모이지만 격조 높은 고려 귀족들의 순수청자 같은 맛을 유지했다. 16세기, 17세기 조선의 사찰들은 향촌의 주인인 사림들의 지원을 받아 매우 거대하고 장엄해졌다. 17세기 18세기에 장사를 통해 경제적 부를 획득한 상공인이 경영한 조선 사찰들은 매우 화려해지고 효율적인 건물 구조를 띠었다. 그래서인지 용주사는 18세기 후반의 일반적인 화려한 경향과 왕실의 엄격성이 첨가되어 독특한 절간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1790년 용주사가 축조되었다. 정조 임금은 마음이 온통 국왕권을 확보하여 개혁을 추진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영조를 추대하여 집권 정당의 명맥을 끈끈이 유지하고 있던 노론 그 중에서도 벽파가 항상 걸림돌이었다. 아버지 사도세자도 소론과 남인들과 힘을 합해 이들과 대항하려다 비운에 죽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정변이 아닌 정상적인 정치력으로 노론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코자 했다. 남인 출신 채제공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소론과 서얼 세력, 북학파를 끌어들여 정책기관에 포진시켰다. 이어서 서울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을 화성 화산 명당에 이장하고 현륭원이라 했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원혼을 달랠 절을 옛날 갈양사 터에 세우고 용주사라 했다.
|
|
▲ 창덕궁 부용정과 규장각,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정책을 위한 정책기관이자 왕립 도서관이었다. |
|
|
| ‘효도’를 외피로 사도세자 죽인 노론세력 약화시켜
노론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을 왕으로 받드는 것 자체가 노론에게는 정치적 부담이 되었다. 정조 임금은 아버지를 뵙는다는 명분으로 빈번히 수원 행차를 시행했다. 1795년에는 아예 수원에 화성을 쌓고 장용영이라는 군대까지 양성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화성 행궁에서 거대한 잔치를 벌였다. 군사훈련도 실시했다. 정책 기관으로는 창덕궁 안에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을 세웠다. 노론들의 기가 꺾이고 있었다.
현륭원 이장과 용주사 건설 등은 정조 임금의 용의주도한 왕권 확립 과정의 산물이었다. 아버지의 원혼을 달랜다고 용주사를 세웠다. 유교국인 조선의 임금이 효도를 하겠다는데 그 누가 딴지를 걸 수 있단 말인가. 정조는 왕권 강화에 ‘효도’를 효과적인 외피로 사용했다.
그러나 백년 넘게 조선 정계를 장악한 노론 역시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1800년 정조는 사소한 부스럼 끝에 마흔 아홉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독살설도 나돌고 있다. 노론 벽파는 실권을 회복하였다. 이후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가 판치면서 조선 후기 정치는 부패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말았다. 정조의 왕권 회복 정책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고, 사찰로서는 용주사만 남게 되었다.
용주사를 짓고 주변 사찰들의 좋은 불교 유물들을 옮겨 왔다. 지장전에는 17,8세기의 뛰어난 시왕들상이 나열해 있다. 국보로 지정한 용주사 동종은 고려 때 작품인데, 역시 주변 다른 절에서 옮겨놓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용주사에는 조선 후기의 불교 미술을 만날 수 있다.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동자상들은 소박한 조선 조각의 멋을 잔뜩 담고 있다. 박물관에 진열하고 있는 사천왕상은 순박하기 짝이 없다.
|
|
▲ 사진 왼쪽 용주사 박물관 사천왕상, 불교의 진리 세계를 수호하는 신이삳. 조선후기 사천왕상은 표정과 자세가 이렇게 재미있다. 사진 오른쪽 용주사 박불관 동자상, 조선 후기 조각의 소박하고 편안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
|
|
| 용주사와 수원 화성에서는 조선 후기 계몽군주적 성격의 군주 정조 임금을 만날 수 있다. 아버지의 능원을 수원에 옮기고 효도를 빌미 삼아 국왕 친위대를 강화하고 실사구시 경세치용의 현실적 정책을 펴고자 했던 정조의 개혁정신이 보인다. 수구세력 노론 벽파의 정치세력권에서 벗어나 맘껏 이상세계를 펼치고자 했던 혼신의 정신이 보인다. 정약용과 단원 김홍도, 박제가를 비롯한 북학파와 함께 이룩하고자 한 세상의 한 모습이 보인다. 여의주를 얻은 용이 되고자 한 조선 후기 임금의 정성이 엿보인다. 그래서 이름도 용주사라고 했나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