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로챠나/사 찰

낙산사

왈선생 2011. 8. 8. 23:17

 

낙산사는 이름부터 관세음보살 도량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름만 불러줘도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는 보살님이 바로 관세음보살이다. 관음보살님이 사는 동네가 바로 보타 낙가산이라 했다. 동해안 바닷가에 우뚝 솟은 조그만 산이 있어 절간을 이뤘으니 그 산 이름을 낙(가)산이라 부르고 절 이름도 낙산사라 했던 것이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낙산사의 대웅전이 불탔다고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어! 낙산사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이 있었단 말인가?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은 관음전, 원통전(더 높여서 원통보전) 혹은 보타전으로 불린다.

낙산사에는 원통보전이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대웅전이라니, 최근에 잘 보이지 않은 곳에 대웅전을 새로 지었나 보다. 일단은 안심하였다. 그러나 안심은 잠간, 원통보전을 사람들이 그냥 대웅전이라 불렀던 것이다.

낙산사는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7세기에 창건한 절이다. 파랑새로 변장한 관음보살님의 인도에 따라 바닷가 굴에 들어가 정진한 결과 바다의 용왕으로부터 수정염주와 불상 및 붉은 연꽃을 얻어 대나무가 자라는 곳에 절간을 세웠다. 이 절이 낙산사의 시작이었다.

진골 출신 의상대사와는 달리 6두품 출신 원효는 이곳의 관음으로부터 배척당했다. 관음은 빨래하는 여인네로 변신하여 원효를 골탕 먹였다. 생리대 세탁한 물을 목이 마른 원효에게 건네기도 했다. 신발 한 짝으로 관음은 자신을 드러내어 원효의 어리석음을 탓하기도 했다. ‘친권력 여당’ 의상과 집권세력을 비판하는 ‘야당’ 원효의 실상이 이야기로 남은 곳이 또한 낙산사이기도 하다.

▲ 낙산사 7층 석탑, 고려때 세운 3층석탑을 조선 세조임금때 7층으로 다시 세운 것이다. 고려때 강원도 지방 특유의 석탑이다.

낙산사는 통일신라 때도 불에 탔다. 고려 때는 어떠했는지 알 길이 별로 없다. 조선 세조는 동해안을 자주 왕래했다. 고질적인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서라고 한다.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에 들렀고, 이 낙산사에도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다. 낙산사의 사세가 커진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러나 15세기의 낙산사는 지금 없다. 17세기와 18세기 후반에도 불에 탔고, 한국전쟁 때도 일부가 불에 탔다고 한다. 원통보전과 주변 건물들은 대부분 18세기 후반 새로 지은 것이다.

원통보전 앞에 있는 석탑이 3층에서 7층으로 증축된 것은 세조 때였다고 한다. 강릉 지방의 독특한 모습을 지닌 고려 양식의 석탑이다. 강릉의 신복사지 삼층석탑과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14세기 후반에 세조의 아들 예종은 아버지를 위하여 낙산사에 범종을 만들었다. 원통보전 앞에서 해수관음상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보호각이 불타면서 녹아내려버렸다고 한다. 6일 아침 신문에서는 원형을 보전하고 있다고 했는데, 조금 지난 소식들에서는 완전히 녹아내려버렸다고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 불교 범종을 대표하는 것인데, 안타깝고도 안타깝다. 아울러 나라의 보물 하나 제대로 화마로부터 구해내지 못한 우리의 무심함과 무대비의 자세가 물을 엎질러놓고서야 분노로 바뀐다. 화가 막 치밀어 오른다.

 

 

 

 

 

 



 

▲ 낙산사 동종, 왜 동종이라고 이름붙였는지 궁금하다. 낙산사 범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버지 세조를 위하여 아들 예종이 만들어 시주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 전기 범종의 귀한 모습이었으나 이번 화재로 녹아버렸다고 한다.
ⓒ 신병철

낙산사 멋의 핵심은 절 입구 무지개문으로부터 원통보전에 이르는 공간의 배치이다. 관세음보살님이 계시는 원통보전을 가장 높은 곳에 두고, 이 깨달음의 세계, 이타행의 세계, 내가 관음보살이고 나와 함께 인연을 나누는 사람들 모두가 바로 관음보살님임을 깨닫게 되는 진리의 세계에 이르는 과정을 원통보전에 이르는 길로 표현한 공간 매김에 있다.

무지개문 홍예문은 세조 때 이곳 26개의 고을로부터 장대석(긴네모꼴 돌) 하나씩을 기증받아 지었다고 한다. 장대석이 2중으로 문을 아치를 만들고 담과 그 사이를 막돌로 채워 넣었다. 머리 크기만 한 자연스런 돌의 모습이 치장한 것들의 거부감을 없애고 꾸미지 않은 듯한 꾸밈의 멋을 만들어내고 있다.

적당한 크기의 앙증맞은 무지개 문이다. 그냥 들어갈 때부터 흐뭇해지는 것은 순전히 이 문 덕분이다. 위에 문루를 만들었으나, 이번에 불타고 말았다. 돌문이 불에 탈 이유는 없으니, 문루만 해 넣으면 금세 다시 살아나리라 생각한다.

 

 

 

 

 

 

 

 

 

 

 



 

▲ 낙산사 홍예문. 몇 년 전 눈이 왔을 때의 모습이다. 무지개 모양의 문과 자연스런 돌과 주변의 소나무 숲이 위에 만든 문루와 매우 잘 어울린다. 문루와 소나무는 더 이상 볼 수 없다. 소나무를 다시 보려면 50년은 기다려야 한다.

걸어 들어가다 왼쪽으로 급격히 돌려서 올라가야 원통보전에 이를 수 있다. 몇 계단을 올라가면 사천왕문을 만난다. 관세음보살님을 지키는 수호신들이 계신다. 엉뚱한 생각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은 이곳 이상을 올라갈 수가 없다. 오로지 이타행의 심정만이 이곳을 통과할 수 있다.

그것을 누가 정하느냐고? 그거야 올라가는 사람이 스스로 정한다. 화마들이 이곳에서라도 제지당했더라면 원통보전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사천왕님들이 게으름을 피웠나 보다. 원래는 이 사천왕도 화마와 같은 존재였다니… 언젠가 이곳을 태운 화마도 진리를 지키는 수호신이 될 것인가.

▲ 낙산사 사천왕문, 홍예문에서 조금 걷다가 왼쪽으로 급격히 꺾어 위로 올라가면 나타나는 문이다. 관세음보살님을 만나려면 여기서 동서남북을 지키는 천왕님의 검문을 받아야 한다.

사천왕문 안에서 원통보전 쪽을 바라보면 진리의 길인 듯 원통보전에 이르는 길이 쭉 보인다. 길이 또 조금 왼쪽으로 굽었다. 올곧은 길보다는 지세를 더 중시했다. 길은 땅의 생김을 따라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자연을 대하는 원칙이었다.

또 문이 하나 나타난다. 편액에 낙산사라고 썼다. 금강문인가 불이문인가. 문 이름은 없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원통보전 경내인가 보다. 이 문 안에서 원통보전 안을 바라보면 사진 액자처럼 내부가 드러난다. 석탑의 일부가 나타나고 경내는 아직 잘 보이지 않는다. 관음보살의 세상은 그렇게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좌우의 굵직굵직한 나무들이 자연스레 진리와 자비의 길을 만들고 있다. 오른쪽에 바로 낙산사 범종이 나타난다.

▲ 조계문에서 바라본 원통보전 전경, 문이 마치 사진액자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액자 안의 전경이 예사롭지 않다. 문이 내부 공간을 이상적인 진리의 세상처럼 보이게 한다.

이제 원통보전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석탑이 완연히 보인다. 보전의 처마가 일부 보인다. 문의 처마와 원통보전의 처마가 서로 잇닿아 있는 듯하다. 마당 가운데 7층 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일부가 깨져 조금은 균형이 사라지고 있지만, 깨진 것쯤이야 우리의 상상력을 발동한다면 완벽한 균형을 잡아낼 수 있다.

문의 처마와 원통보전의 처마가 잇닿아 있으니 마당은 실외가 아니라 실내처럼 보인다. 오른쪽의 대나무 숲과 우물만 없으면 말이다. 원통보전 둘레를 다시 담장으로 곱게 둘렀다. 황토로 바른 담장 중간 중간에 꽃이 피었다. 화강암 원통모양 돌을 담장 곳곳에 박아 넣어 꾸몄다. 조그마한 장식이 이렇게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 낙산사 원통보전 입구, 계단을 올라 문을 들어설 때까지 문의 처마와 원통보전의 처마가 서로 잇대어져 있는 것 같다. 내부 마당은 마치 실내처럼 느끼게 된다.

조금은 높은 기단 위에 날렵하게 앉아 있는 원통보전과 담장은 그대로 어울리고 있다. 18세기 말에 지은 원통보전의 건물은 다포집에 겹처마이며 화려한 단청 등으로 최고의 치장을 다했다.

최근에 올린 것으로 판단되는 파란 기와와 그에 맞춰 다시 칠한 듯한 녹색이 많이 들어간 단청이 멋있게 어울린다. 녹색의 지붕과 황색의 담장 색이 보색 대비로 멋을 잔뜩 부리고 있다.

원통보전은 관세음보살님을 들어가 뵙지 않더라도 이곳이 자비의 세상임을 저절로 느낄 수 있다. 부처님의 몸 대신으로 한없이 서 있는 석탑을 보더라도 이곳에서 우리는 관음이 만드는 평등과 자유의 세상을 느낄 수 있다.

▲ 낙산사 해수관음입상, 최근에 세운 거대한 관세음보살상이다. 매우 부드럽고 자비로운 모습이긴 하지만, 크기와 돈의 힘으로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는 듯하다.

옆으로 터진 길로 해수관음상이 있는 곳으로 간다. 온통 소나무 숲이다. 이 송림을 이제 얼마나 더 있어야 만날 수 있을까? 50년은 넘게 자라야 된다니 내 생애 다시 낙산사의 소나무 숲에는 갈 수 없게 되었다. 슬프다.

해수관음상은 엄청 크다. 자본주의와 기계의 발달은 최고를 추구한다. 어떤 불상보다도 예쁘고 인자하고 거대하다. 그런데도 왠지 정감은 없다. 거대하게 아름답게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는 듯하다. 해수관음상보다 원통보전의 석탑과 꽃담장에서 더 관세음보살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돈이 아닌 정성 때문일 것이다.

의상대로 내려가 본다. 최근에 지은 거대하고 굵직굵직한 집들과 석조형물들을 만난다. 역시 쉽게 정감이 가지 않는다. 원통보전에서 관세음보살을 만났다면 더 이상은 없다. 보타전이니 원통전이니 하는 편액이 붙어 있다. 대웅전은 없다.

의상대에서 의상대사를 인식하기 위해 조선시대에도 이런 누대가 있었는지 잘 모른다. 지금의 의상대는 한용운이 지었다고 전한다. 의상대는 관동팔경 중 하나다. 의상대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다. 동해바다를 구경하기에 참으로 좋은 곳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사람들은 의상대에서 바다구경은 하지 않고 의상대만 구경하고 간다. 천학정이 동해바다의 잠잠한 바다구경의 명소라면 의상대는 동해의 거칠고 힘차고 포효하는 듯한 모습을 느낄 수 있는 명소다. 의상대는 이번 화재에도 살아남았다. 화마가 아무리 강해도 동해를 태울 수 없으니 의상대는 사라질 수 없다.

 

 

 

 

 

 

 

 



 

▲ 의상대, 일제시기 한용운님이 다시 세웠다. 힘찬 동해바다를 구경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란다. 사람들은 의상대만 구경하고 바다는 그냥 보지도 않고 두고 간다.

홍련암은 의상이 바로 관음굴에서 수도하여 수정염주와 붉은 연꽃을 용왕으로부터 받은 곳이다. 파도가 암자 마루 아래로 들락거린다. 마루바닥에 구멍을 뚫어놓고 구경한다.

의상이 관음보살님을 만나고 수도하고 온 세상 사람들 모두를 관세음보살의 이타행을 결심하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이 구멍을 통해서 느낀다. 바닷가 바위 위에 올라앉은 홍련암으로 가는 길의 동해 바다는 무섭다. 굉음을 지르며 달려든다. 의상대사와 관세음보살이 있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홍련암은 다행히 불타지 않았단다.

▲ 낙산사 홍련암, 의상대사가 용왕으로부터 수정염주를 하사받은 곳이란다. 바다의 파도가 마룻바닥 밑으로 들락거린다.

이제 어디 가서 관세음보살을 만난단 말인가? 툭 트인 바다와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내가 관음보살이 되어야지, 관세음보살은 특별히 어떤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며 동료들이며 내가 만나 인연을 나누는 사람 모두가 나의 소원을 들어줄 사람이며 존재임을 이제 어디서 느낄 수 있단 말인가? 낙산사가 있어 관세음보살의 존재를 상기하였고, 관음보살과 같은 삶을 살아야지 하는 다짐을 할 수 있었는데….

그러나 관세음보살님이 원통보전 안에만 있다면 그게 어디 관음보살인가? 우리 주위에 관음보살님은 얼마든지 있다. 동네 꼬마를 살리기 위해 얼음판에 뛰어들어 아이를 살려내고 죽은 우리 이웃이 관음보살이 아닐까? 아무도 몰래 노숙자에게 살짝 빵을 갖다 주는 빵집 종업원이 바로 또한 관음보살일 것이다. 사라진 낙산사 원통보전 대신 이참에 우리 사회 전체를 원통보전으로 만들어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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