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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사

왈선생 2011. 8. 8. 23:07

문화에 단절은 없다. 조선이 아무리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만을 장려했다고 해서 불교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조선 전기에도 절간들이 건축되었다. 문화는 결코 되풀이되지 않는다. 조건이 달라지면 형태가 바뀐다. 조선 전기에 문화 조건이 너무나 많이 변하였다. 절간 건축도 이런 조건 속에서 새로운 경향이 많이 등장했다.

▲ 개심사 올라가는 길, 소나무 숲길이 절간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저 숲길을 지나면 우리가 바라는 뭔가 있을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충남 서산시 운산면의 개심사는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지금은 여행 붐을 타고 제법 유명한 절이 되었다. 지난 5일 찾아간 개심사는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았다. 올라가는 솔숲길이 멋있다. 소나무 숲과 그 아래 돌계단 길을 따라 올라가면 땀이 비적거릴 쯤 되면 안양루가 나타난다. 오른쪽에 난 계단으로 해탈문을 지나면 대웅보전이 눈앞에 다가선다.

대웅전은 제법 높은 길게 다듬은 돌로 만든 기단 위에 얌전히 올라 앉아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절간 건물로서는 큰 편이 아니다. 작지만 기품이 제법 풍겨 나온다. 1484년 조선 성종 때, 조선 건국한 지 90년 쯤 지났을 때 지었다. 그렇다면 은은히 풍겨 나오는 저 품위는 조선 사대부의 분위기란 말인가.

▲ 개심사 대웅전, 조선 전기의 조그만 절간이다. 맞배지붕이지만 다포식이다. 넓지 않은 마당을 심검당 요사 누각으로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가 정겹다.
개심사는 누가 지었을까? 절간 짓는 데 누가 돈을 댔을까? 잘 모른다. 그런데 개심사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 풍수상 절간 내부에 추사 김정희의 조상 묘가 있다. 이 묘주의 부인이 개심사 큰 공양주였다고 한다. 15세기 후반에 양반 지주가 아무리 돈이 있다 한들 내놓고 절간 짓는 데 돈을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 당국이 절 안에 이들의 무덤을 허락한 정도라면 은밀히 절간에 상당한 돈을 댔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겠다.

건축물에서 공포는 지붕의 무게를 기둥에 전달하고 지붕의 높이를 높인다.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으면 주심포식이라 하고, 기둥 사이에도 짜 맞추면 다포식이라 한다. 개심사 대웅전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두 개씩 넣었다. 다포식이다. 주심포식 건물의 지붕은 대개 맞배지붕이다. 그래서 측면에 공포를 짜 넣지 않는다. 반면에 다포식 건물은 팔작지붕인 경우가 많고, 측면에도 공포를 짜 넣는다.

고려 때는 주심포식 맞배지붕이 일반적이었다. 예산 수덕사 대웅전이 그 대표다. 조선 때는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 크게 유행하였다. 더 크고 높게 그리고 화려하게 지으려면 다포식 팔작지붕이어야 한다. 개심사는 다포식이면서 맞배지붕을 갖추고 있다. 고려와 조선의 절충식인 것이다.

▲ 수덕사 대웅전 귀공포, 개심사 대웅전 귀공포, 개심사 대웅전 내부공포, 수덕사는 내출목이 없다. 개심사는 외2출목 내3출목으로 내부 공포는 장식용으로 활용하고 있다.
기둥 안팎으로 짠 공포를 내외출목이라 한다. 개심사 대웅전은 외2출목 내3출목이다. 내출목을 걸기 위해서는 대부분 내출목을 외출목수보다 더 많게 해야 한다. 주심포 건물에는 외출목만 있고 내출목은 없다.

주심포의 내부는 복잡하지 않아 천정을 해 넣지 않아도 된다. 서까래, 들보, 도리와 같은 건축 부재들로 천정을 구성하면 훨씬 격조 높고 높이도 높은 천정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천정을 연등천정이라 한다. 그러나 다포식 건물은 내출목이 있기 때문에 내부가 매우 복잡해졌다. 같은 모양이 반복되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다. 가려 버려야 했다. 네모반듯한 반자로 천정을 막았다.

그런데 개심사 대웅전은 내출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자로 천정을 가리지 않았다. 불상 위 일부만 반자를 해 넣었다. 대부분 연등천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오히려 내출목 공포들을 내부 분위기를 화려하게 만드는 데 이용했다. 네모지고 굵직한 대들보와 그와 직각되게 달리는 도리들과 그 위에 빗금의 서까래로 극락세계를 표현했다. 꼭대기 들보(종보)에서 꼭대기 도리(마루도리)를 받치는 대공을 화려하게 파련으로 장식했다. 고려와 조선의 건축 특징이 개심사 대웅전에 혼재되어 있다.

▲ 개심사 대웅전 내부 천정 들보 파련대공, 네모대들보, 내부공포, 도리, 서까래들이 적절히 어울리고 있다. 파련대공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고려와 조선의 절충식이다.
개심사 대웅전에서 고려와 조선의 건축이 만나고 있다. 당시로서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고려식에서 조선식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인 셈이다. 고려 절간들이 엄격하고 간결한 정제미로 격조 높은 극락 진리 세계를 표현하였다면, 조선 절간들은 더 직접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야 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매우 거대하고 화려한 장식으로 극락을 구성했다. 예산 수덕사 대웅전이 고려의 대표라면 해남 미황사 대웅전을 조선의 예로 삼을 수 있겠다. 이들의 중간에 바로 개심사 대웅전과 강진 무위사가 존재하고 있다.

▲ 수덕사 대웅전 천정과 미황사 대웅전 천정, 주심포 연등천정과 다포 우물반자전정의 모습을 비교해 볼 수 있다. 고려때보다 조선때가 훨씬 장식성이 강함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에도 절간을 세웠다. 숭유억불을 내세웠지만, 왕실이 앞장 설 경우에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태조 이성계는 왕위를 태종에게 넘겨주고 포천 회암사에서 주로 생활했다고 한다. 회암사를 이때 크게 중창하였다. 조선 태조가 생활하는 절간이었으니 회암사는 절간이자 궁궐이었다. 16세기 보우스님이 회암사를 크게 다시 일으켰으나, 사림의 반대로 보우는 죽임을 당하고 절간은 폐허가 되고 말았다. 조선 초기의 절간 모습은 회암사터에서 상상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었다.

태종은 숭유억불의 기치를 확실히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그의 아들 세종은 정치적으로는 불교를 축소시켜 나갔지만, 불교 사상에 상당히 심취해 있었다. 그의 형 효령대군은 불교에 독실하여 세종의 허락 아래 불사를 많이 일으켰다. 서울 시내 한가운데 원각사를 짓기도 했다. 강진 무위사를 지은 것도 바로 효령대군이었다. 세조임금은 임금 자신이 불사에 앞장섰다. 상원사와 낙산사를 크게 다시 짓고 병 치료를 핑계로 이런 절간에 왕래하기도 했다.

▲ 무위사 극락전 전경, 막돌기단 위에 넓은 정면의 주심포 맞배지붕을 가진 깔끔하기 짝이 없는 조선시대 절간이다.
강진 무위사 극락전은 개심사 대웅전보다 50년 정도 앞선 1430년에 건축되었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수덕사 대웅전 건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짜 넣은 주심포식이다. 고려 때 특징인 기둥머리의 굽받침도 없앴다. 간결하고 깔끔한 조선식 주심포 건물인 셈이다. 공포의 끝을 깔끔하게 처리하여 위로 치켜 올렸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간결한 짜임새다. 중간칸(어간)이 갓칸(협간)보다 좁은 것이 특이하다. 넓은 마당을 가졌기 때문에 거의 평지 건물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넓은 기단을 막돌로 친근감 있게 축조했다.

▲ 무위사 극락전 내부 천정, 내부 역시 고려를 계승한 주심포의 맛깔스런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여래가 오른쪽에 관세음보살과 왼쪽에 지장보살과 함께 앉아 있다. 본존불은 결가부좌하여 설법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고, 좌우의 보살들은 바깥쪽 발을 내리고 앉아 있다. 부처와 보살의 인상이 매우 푸근하다.

세종 때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무위사 극락전 짓는 데 효령대군의 영향이 컸다. 그렇다면 본존의 모습은 당시 임금인 세종임금의 모습인가. 극락전 내부에는 불화가 가득 차 있었다. 지금은 옆 보존건물에 옮겨놓았다. 15세기 후반에 그린 것들로 고려 불화를 계승한 조선 전기 불화를 대표한다.

무위사에서 얼마 멀지 않은 영암에 있는 도갑사도 조선 전기에 세운 절간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건물로 남은 것은 해탈문밖에 없다. 해탈문은 세조 때인 1457년에 수미와 신미 대사의 발원으로 중건되어 1473년에 완공되었다. 기본적으로는 주심포 건물이지만, 조선식의 다포양식이 부분적으로 가미되었다. 역시 과도기의 절충식이라 할 수 있겠다.

▲ 도갑사 해탈문, 조선 전기에 세운 도갑사 대웅전은 소실되고 해탈문만 남았다. 솟을합장, 우미량, 주심포 등 고려적 요소와 포대공, 내부 장식 등에 조선적 요소를 가미하였다.
마루대공과 함께 솟을 합장이 마루도리를 받치고 있다. 대들보에서 종보를 받치는 대공은 포대공인데 첨차 하나를 길게 내뻗어 우미량을 구성하여 대들보로 연결하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 양식이 해탈문에 살아남아 있다고 하겠다. 깔끔하면서 멋있다.

조선 전기 절간 건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안동 봉정사 대웅전이다. 봉정사는 건축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는 절간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봉정사 극락전은 고려시대 절간건축 형식을 잘 보여준다.

대웅전은 고려말에 시작한 다포식 건물이 조선에서 발전해 나간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극락전 좌우에 있는 화엄강당과 고금당은 조선 중기 이후의 익공식 건물의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왼쪽 위에 있는 영산전은 옹기종기 모여 앉은 건물들이 만드는 우아한 분위기에 압도당해버리기에 적당하다. 우화루의 멋들어진 문은 또 어떻고.

▲ 봉정사 고금당, 익공양식 건물이다. 조선 전기에도 익공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봉정사는 건물의 박물관이다.
봉정사 대웅전은 다포식 팔작지붕이다. 고려 말 조선 전기에 지은 건물이라 추정하지만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이 없다. 대웅전 불화 밑에 고려 때의 불화가 발견되어 고려 때 건물로 추정하기도 한다. 대웅전은 특이하게 앞마루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후대에 첨가한 것으로 추정한다.

▲ 봉정사 대웅전 전경과 내부, 팔작지붕에 다포식 건물이다. 내외2출목으로 내출목이 외출목보다 더 많은 것이 일반적인데, 여기서는 같은 개수다. 내부는 다포의 화려한 양식이 아직 일반화되지 않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대웅전은 다포식 공포이지만 내외출목수가 2개로 같다. 바깥으로 길게 뻗은 처마를 지탱하기 위해서 외출목을 걸치는데, 외출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출목이 내출목보다는 많아야 한다. 내외출목수가 같은 것은 아직 다포식 양식이 완전히 개발되기 전에 내출목이 없는 주심포 양식이 일부 반영된 것으로 본다. 내출목이 있으니 내부가 복잡해졌고, 그래서 반자를 전체적으로 해 넣었다. 우물반자 천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봉정사 대웅전은 누가 지었을까? 잘 모른다. 아마도 안동 지방의 유지가 몰래 돈을 대지 않았을까? 숭유억불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불교에 독실한 자들은 정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정부의 정책을 어겨가면서 절간들을 지었다. 서울 부근에서는 왕실의 원찰로 절간들이 축조되었다.

그래서 조선전기 절간 건물들은 고려양식을 계승하면서 조선 전기 건축술이 가미되었다. 조선의 다포식 건축물이 형식을 완성하기 전까지 건축상 조선 전기는 고려와 조선 건축의 과도기였다. 무위사 극락전은 고려전축의 재현에 가까웠고, 개심사 대웅전은 다포식이면서 주심포의 연등천정을 유지한 가장 확실한 절충식이었으며, 봉정사 대웅전은 다포식이면서 아직 주심포의 테를 완전히 벗지 못한 조선식 아류였다.

규모가 크지 않은 조선 전기 건축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조선을 일으킨 사대부의 냄새가 배어난다. 귀족 경향을 극복하고 조선을 세운 현실성이 절간에도 어쩔 수 없이 묻어난다. 일단 화려하고 웅장하지 않아 사람을 압도하지 않는다. 그냥 포근하고 다정다감하다. 압도당하지 않고 강제당하지 않는 절간을 찾고 싶은 사람은 조선전기 절간을 고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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