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로챠나/사 찰

法寶寺刹 海印寺

왈선생 2011. 8. 3.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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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의 본사로 75개의 말사와 14개의 부속암자를 관리하고 있다. 통도사·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 삼보(三寶 : 佛寶·法寶·僧寶) 사찰 중 하나이며 고려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어 법보사찰이라고도 한다.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 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가야산해인사고적〉에 의하면, 신림(神林)의 제자인 순응(順應)이 766년(혜공왕 2) 중국에 건너가서 법을 전수받고 귀국한 뒤 802년(애장왕 3) 가야산에 해인사를 창건하다가 갑자기 죽자 이정(利貞)이 그의 뒤를 이어 절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676년(문무왕 16) 의상(義湘)이 부석사를 창건하고 곧 해인사·화엄사·범어사 등 화엄10찰(華嚴十刹)을 세웠다고 되어있어 창건연대가 분명하지 않다. 절의 이름은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되었고, 그 개조(開祖)였던 순응 역시 의상의 손제자였다는 사실 등에서 화엄사상(華嚴思想)을 근본으로 하여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나라를 세운 희랑(希郞) 법사가 태조가 헌납한 전지 500결을 가지고 절을 중건하고, 이곳에서 화엄사상을 크게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1398년(태조 7) 강화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고려대장경을 해인사로 옮겨옴으로써 호국사찰의 중심지가 되었다. 1483년(성종 14)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貞憙王后)가 해인사를 중건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488년 덕종의 비인 인수왕비와 예종의 계비인 인혜왕비가 학조(學祖)에게 명해 대장경판전(大藏經板殿)을 중건했으며 또 3년간에 걸쳐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법당·요사 등 160여 칸을 새로 건립했다. 1695년(숙종 21) 화재로 만월당(滿月堂)·원음루(圓音樓) 등 여러 요사채가 소실되었고, 그 이듬해 다시 불이 나서 무설전(無說殿) 등 나머지 요사채가 불타버리자 뇌음(雷音)이 중건했다. 그뒤에도 끊임없는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건되는 과정을 겪었지만, 대장경판전(국보 제52호)만은 피해를 입지 않고 오랫동안 보존되어왔다. 이밖에도 대각국사 의천, 사명대사 등과 같은 고승이나 최치원·이거인(李居仁)·김정희·정인홍(鄭仁弘) 등 역대 명인들이 한때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적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6호)을 비롯하여 명부전·응진전·삼성각·조사전·퇴설당(堆雪堂)·음향각·관음전·궁현당(窮玄堂)·구광루(九光樓)·경학원(經學院) 등이 있으나 대부분 근래에 세워진 것이다. 중요문화재로는 고려대장경판(국보 제32호)·석불입상(보물 제264호)·원당암다층석탑(보물 제518호)·고려각판(국보 제206호, 보물 제734호)·반야사원경왕사비(보물 제128호) 등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해인사동종을 비롯해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수많은 유물들이 해인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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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 (고려대장경) 고려가 원나라의 침략에 맞서 종교적인 염원으로 그 침략을 극복하고자 만든 불교 목판경이다.
현종 때에 초조(初雕) 대장경이 만들어젔으나 몰골의 침공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몽골의 침공으로 불타 없어졌다 >천종 때에 대각국사 의천이 속장경을 간행하였으나 이 또한 몽골의 침공으로 불타 없어졌다. 1236년 몽골의 침략을 부쳐님의힘으로 막기위해 강화에서 만들어셔1398년 합천 해인사로 옮겨졌는데 필체가 아름답고 8만장이넘는데도 오자가 없다

1398년 (태조 7)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고려팔만대장경판을 지청사로 옮겼다 이듬해 이 곳으로 옮겨와 호국신앙의 요림이 되었다 ,

모두 8만1258매에 달하는 <대장경>은 경(經), 율(律), 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해인사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 서기 1237∼1248년에 걸쳐 나무에 새긴 경전으로,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현종 때 의천이 만든 초조대장경이 몽고의 침략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다 해서 <재조대장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대장경>은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 서기 1398년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장경판의 크기는 가로 70cm내외, 세로 24cm내외이고 두께는 2.6cm에서 4cm이다. 무게는 3kg~4kg.

 팔만대장경은 고려왕조에서 두 번째로 찍어낸 불교 일체경(一體經)이라는 의미에서 고려 당시에 이미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 불렀다. 그럼에도 속칭인 팔만대장경이 더욱 익숙하게 된 까닭은 이렇게 찍은 경판이 8만장이라는 데서 비롯된다.

정확한 수량은 8만1천258장. 총무게는 280t으로, 4t 트럭 70대분에 육박한다. 글자 총수를 합치면 조선왕조실록 분량 전체를 모은 5천200여만 자에 이른다

 

팔만대장경판 (국보  제32호)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목판각류/ 판목류
수량/면적 81,258매
지정(등록)일 1962.12.20
소 재 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10 해인사
시 대 고려시대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내외, 세로 24㎝내외이고 두께는 2.6㎝ 내지 4㎝이다. 무게는 3㎏ 내지 4㎏이다.

구성을 보면 모두 1,496종 6,568권으로 되어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또한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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