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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 (고려대장경) 고려가 원나라의 침략에 맞서 종교적인 염원으로 그 침략을 극복하고자 만든 불교 목판경이다.
현종 때에 초조(初雕) 대장경이 만들어젔으나 몰골의 침공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몽골의 침공으로 불타 없어졌다 >천종 때에 대각국사 의천이 속장경을 간행하였으나 이 또한 몽골의 침공으로 불타 없어졌다. 1236년 몽골의 침략을 부쳐님의힘으로 막기위해 강화에서 만들어셔1398년 합천 해인사로 옮겨졌는데 필체가 아름답고 8만장이넘는데도 오자가 없다
1398년 (태조 7)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고려팔만대장경판을 지청사로 옮겼다 이듬해 이 곳으로 옮겨와 호국신앙의 요림이 되었다 ,
모두 8만1258매에 달하는 <대장경>은 경(經), 율(律), 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해인사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 서기 1237∼1248년에 걸쳐 나무에 새긴 경전으로,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현종 때 의천이 만든 초조대장경이 몽고의 침략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다 해서 <재조대장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대장경>은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 서기 1398년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장경판의 크기는 가로 70cm내외, 세로 24cm내외이고 두께는 2.6cm에서 4cm이다. 무게는 3kg~4kg.
팔만대장경은 고려왕조에서 두 번째로 찍어낸 불교 일체경(一體經)이라는 의미에서 고려 당시에 이미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 불렀다. 그럼에도 속칭인 팔만대장경이 더욱 익숙하게 된 까닭은 이렇게 찍은 경판이 8만장이라는 데서 비롯된다.
정확한 수량은 8만1천258장. 총무게는 280t으로, 4t 트럭 70대분에 육박한다. 글자 총수를 합치면 조선왕조실록 분량 전체를 모은 5천200여만 자에 이른다
팔만대장경판 | (국보 제3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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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 기록유산 / 서각류/ 목판각류/ 판목류 |
수량/면적 | 81,258매 |
지정(등록)일 | 1962.12.20 |
소 재 지 |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10 해인사 |
시 대 | 고려시대 |
소 | |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내외, 세로 24㎝내외이고 두께는 2.6㎝ 내지 4㎝이다. 무게는 3㎏ 내지 4㎏이다. 구성을 보면 모두 1,496종 6,568권으로 되어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또한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이 대장경판(大藏經板)은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새긴 목판(木板)이다.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 또는 일체경(一切經)을 말하며 불교경전(佛敎經典)의 총서(叢書)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이라 하며 또한 판수(板數)가 8만여 판에 이르고 8만 4천 번뇌(煩惱)에 대치하는 8만 4천 법문(法文)을 수록했다 하여 8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현종(顯宗)(1009∼1031, 재위) 때 새긴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몽고(蒙古)의 침입에 불타버려 다시 새겼다 하여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 대장경판은 고종 19년(1232)에 초조대장경이 몽고군의 침입으로 불타버리자 몽고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고자 국가적(國家的)인 차원에서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이때 개태사(開泰寺)의 승통(僧統)인 수기(守其)가 북송관판(北宋官版)과 거란본(契丹本) 및 우리의 초조대장경을 널리 대교(對校)하여 오류(誤謬)를 바로잡은 대장경 역사상 가장 완벽한 대장경판이다.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대장각판(大藏刻版) 군신기고문(君臣祈告文)』에 보면 현종 2년(1011)에 거란병(契丹兵)의 침입 때 대장경(초조대장경)을 새겨 거란병이 물러갔음을 상고하고, 지금 몽고의 침입으로 이 대장경판이 불타버려 다시 새기니 몽고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게 하여 달라는 염원에서 부처님에게 고(告)하고 있다. 대장경판은 고종 24년(1237)부터 35년(1248)까지 12년 동안 판각(板刻)하였는데, 준비기간을 합치면 모두 16년이란 기간이 걸려 완성된 것이다. 이 대장경판은 판심(版心)이 없는 권자본형식(卷子本形式)의 판식으로 한 면(面)에 23행(行) 14자(字)씩 총 1,401종(種) 6,708권을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에서 새긴 것인데, 이중 분사대장도감에서 새긴 판은 79종 520권이 판가(板架)에 수록되어 있다. 해인사 대장경은 이 고려대장도감각판(高麗大藏都監刻板) 외에 9종의 분사대장도감의 판각판과 조선조(朝鮮朝)에 판각(板刻)된 사간판(寺刊板)이 포함되어 있다. 해인사 대장경판은 현존(現存) 최고(最古)의 대장경판일 뿐 아니라 가장 완벽하고 정확한 대장경판으로 우리 민족이 남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文化遺産) 가운데 하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