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로챠나/사 찰

佛寶寺刹 通度寺

왈선생 2011. 8. 3. 15:05

한국의 사찰은 각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성격과 특징 및 가람배치를 통하여 이 땅에 불법을 전파하고 있다. 특히 삼보사찰의 경우 이러한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즉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봉안한 불보(佛寶)사찰로, 해인사는 부처님의 말씀(法)인 팔만대장경을 간직하고 있는 법보(法寶)사찰로,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래 열여섯 명의 국사를 배출한 승보(僧寶)사찰로 이름나 있다. 이것은 불교의 요체인 불, 법, 승 삼보가 각 사찰에 따라서 어느 한 부분의 특별히 강조되어 표현된 것이다.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金欄袈裟-금실로 수놓은 가사)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삼보 가운데 가장 으뜸인 불보사찰의 위치를 갖게 되었다. 통도사를 한국불교의 으뜸인 불지종찰(佛之宗刹)이요, 국지대찰(國之大刹)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이 있는 제1적멸보궁이기에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는 사찰로 유명하다. 통도사 대웅전은 실제로 부처님이 살아 숨 쉬고 계시는 공간이기 때문에 다른 사찰의 대웅전과는 다른 종교적 상징성을 갖게 된다. 따라서 정자형(丁字形) 법당 사면에는 각각 다른 이름의 편액(扁額)이 걸려 있는데, 동쪽은 대웅전(大雄殿), 서쪽은 대방광전(大方廣殿), 남쪽은 금강계단(金剛戒壇), 북쪽은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쓰여 있다.

 

 

불보사찰로서의 통도사

해동의 이름난 명승지, 영축산 통도사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5년(646)에 고승 자장율사스님에 의하여 창건된 국내 제일 대가람(大伽藍)이다. 영축산이란 본래 부처님 재세시(在世時) 마가다국 왕사성의 동쪽에 있던 그리드라(Gdhra : 鷲, 독수리)라는 산(봉우리)이다. 본래 이 산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법화경(法華經)』을 설한 곳으로 유명하며 수행자와 독수리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영축산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러한 인도 영축산과 닮은 이곳에 통도사를 창건하게 된 것은, 대국통에 오른 자장율사스님의 원력이 있었기에 가능하게 된 것이다.

영축산 통도사에 있는 전각들과 탑, 석등, 이것들과 어우러져 있는 자연, 그 속에서 불법을 꽃피운 위대한 고승들, 어느 하나 불연(佛緣)과 떼놓을 수 없다.
 
통도사의 어원
 

그래서 이 산의 모양이 불법을 직접 설하신 인도 영축산과 통한다(此山之形 通於印度靈鷲山形) 해서 통도사라 이름했다고 일컬어진다.

또한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아야 한다(爲僧者通而度之)” 는 의미에서 통도사라 했다고 한다. 이는 사찰의 근본정신을 잘 말해주는 것으로 통도사는 계율(戒律)의 중심지로서 모든 승려들은 이곳에서 계(戒)를 받아서 산문(山門)에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모든 진리를 회통하며 중생을 제도한다(萬通法度衆生)”의 의미를 통도(通度)라는 이상(理想)으로 표현한 탁월한 발상이었다. 보살은 자기만의 깨달음을 구하는 데 있지 않다. 깨달음을 향하여 진리의 세계로 나가는 동시에 고통 받는 중생들과 함께하는 대비(大悲)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통도사 창건 이야기

신라 때 자장율사스님께서는 당나라에 건너가 수도를 하고 부처의 숭고한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고자 부처님의 가사와 사리를 받들고 신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사리를 모실 절을 세우기로 하고 문수보살께 절을 세우기에 적당한 곳을 물었다. 그랬더니 어느 날 밤 꿈에 훌륭하게 차려입은 동자가 나타나서 부처님 모실 곳을 일러주었다.

"동국에 부처님을 모시도록 하라.”

자장율사스님께서는 동국이 신라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나, 신라의 어느 곳이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나무로 오리를 만들어 동쪽으로 날려 보냈더니 얼마 후 오리는 한 송이 칡꽃을 물고 돌아왔다. 자장율사스님께서는 칡꽃이 피어있는 곳에 절을 세우라는 것이 부처님의 뜻임을 깨닫고 흰 눈이 쌓여 있는 한 겨울에 칡꽃을 찾아 나섰다. 며칠을 찾아다니던 어느 날 양산읍에서 좀 더 들어가는 영축산에 이르러 보니 큰못이 있었는데 그 못 주변이 신기하게도 두 송이의 칡꽃이 피어있었다. 자장율사스님께서 인근의 경치를 살펴보니 송림이 울창하고 산봉우리들이 열을 지어 둘러쳐져 있었으며 검푸른 못물은 마치 고요히 잠들어 있는 듯했다. 율사는 세상에서 이렇게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은 다시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곳에 절을 세우니 그 절이 유명한 통도사이다.

 

통도사의 역사

  신라 제 27대 선덕여왕 15년(646) 자장율사스님에 의하여 창건된 통도사는 우라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삼보란 불교 성립의 삼대요소인 불(佛: 교주) · 법(法: 교법) · 승(僧: 승단)을 뜻하며, 삼보사찰이란 바로 이들 삼보를 상징하는 사찰을 말한다.

 
즉, 팔만대장경판을 모신 법보사찰 해인사, 보조국사(普照國師)이래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 송광사와 함께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와 금란가사(金?袈裟 - 금실로 수를 놓은 가사)가 봉안되어 있는 통도사는 삼보의 으뜸인 불보사찰의 위치를 지니게 되었다.

통도사를 한국 불교의 으뜸(佛之宗家)이자 가장 큰절(國之大刹)이라고 칭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금강계단에 모심으로 인하여 대웅전에는 부처님을 형상화한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다.

통도사에 봉안된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는 자장율사스님께서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모셔온 것이다. 이때 당나라 황제가 하사한 막대한 양의 비단과 채색옷감, 대장경 400권, 불교용 깃발(幡幢), 꽃으로 장식된 가리개(花蓋) 등을 함께 가져와 통도사를 창건하였다. 따라서 통도사는 불사리와 가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통도사가 위치해 있는 영축산(靈鷲山)은 원래 석가모니 당시 인도 마가다국(Magadha) 왕사성(Rajarha)의 동쪽에 있던 산 이름이다. 이 산에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법하여 많은 중생을 구제하였고, 이러한 광경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하여, 불교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으로 추앙받고 있다. 따라서 자장율사스님께서 이곳에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절 이름을 통도사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산의 모습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此山之形 通於印度靈鷲山形)”는 의미에서 기인한 것이다. 또한 사명(寺名)의 다른 의미로서 통도사가 신라시대의 계율근본도량(戒律根本道場)으로서,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아야 한다(爲僧者通而度之)”라는 설과, “모든 진리를 회통하며 중생을 제도한다(萬通法度衆生)”의 의미를 통도(通度)라는 이상(理想)으로 나타내어 대승불교의 이념을 표현하였다는 설이 있다.

통도사는 창건 이후 신라 · 고려시대를 거치며 왕실과 대중의 비호속에 한국 불교의 구심처로 자리 잡았으며, 조선시대의 억불과 임진왜란에도 굴하지 않고 중창을 통하여 면면히 법등(法燈)을 이어왔다. 조선시대에는 전국 16개 대표사찰가운데 경상남도의 대본산(大本山)이 되었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15교구 본사(本寺)로 국내 최대의 사찰을 형성하여 구하(九河) · 경봉(鏡峰)대선사와 같은 고승이 계셨으며, 이후로는 대한불교 조계종 9대 종정이신 월하대종사(月下大宗師)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자장율사스님의 계율정신을 계승하는 영축총림(靈鷲叢林) 통도사는 한국불교의 정신적 기반이 되고 있다.

통도사의 사격(寺格)은 신라시대에는 계율 근본도량이 되어 수사찰(首寺刹)의 위치에 있었으며, 또 고려를 지나 조선초기에는 나라에서 각 사찰을 기도장소로 지정할 때 수위사찰(首位寺刹)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당시 정부에서 관리서(管理署)를 두어 전국 16개 수사찰(首寺刹)을 정할 당시 경상남도의 수사찰(首寺刹)이 되었고, 또 전국에 본산을 정할 때에도 선교양종(禪敎兩宗) 대 본산(本山)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불보사찰(佛寶寺刹)의 위상을 갖추게 된 것은 자장율사스님의 불사리 봉안에 따른 것이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로 경남불교를 이끌고 있으며 자장율사스님의 창사(創寺)정신을 계승하는 ‘영축총림’으로서 한국불교의 정신적 기반이 되고 있다.
 

 

 

금강계단과 구룡지

통도사 창건의 기본정신은 부처님 사리(舍利)를 봉안한 금강계단(金剛戒壇)에 있다. 이 계단은 통도사의 정신적인 근거가 되기도 하며, 창건이후 가장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그래서 통도사 역사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자료들은 어느 것이나 통도사의 변화에 대해 기술하기보다는 바로 금강계단의 변천과 그 역사를 강조하기 때문에 통도사 창건은 금강계단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다고 하겠다.

『삼국유사』제3권 탑상(塔像) 제4 전후소장사리조(前後所將舍利條)에 의하면 “선덕왕때인 정관(貞觀) 12년 계묘년(癸卯, 643)에 자장율사스님께서 당에서 모시고 온 불두골(佛頭骨), 불치(佛齒), 불사리(佛舍利) 100립과 부처님이 입으시던 비라금점가사(緋羅金點袈裟) 한 벌이 있었는데 그 사리를 3분하여 일부분은 황룡사탑(皇龍寺塔)에 두고 일부분은 태화사탑(太和寺塔)에, 일부분은 가사(袈裟)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두었으며”라고 하였다.
 

 

  계단은 2층으로 상층(上層) 가운데에는 솥을 엎어 놓은 것과 같은 석개(石蓋)를 안치하였다. 이는 곧 통도사의 불사리 금강계단과 함께 부처님의 친착가사(親着袈裟) 봉안 사실을 전해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본래 금강계단이 축조되기 이전 통도사는 못이었다. 창건주 자장율사스님께서는 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통도사를 창건하셨다.

자장율사스님께서 당나라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除寺)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문수보살은 승려로 화하여 가사 한 벌과 진신사리 1백 알, 불두골(佛頭骨)과 손가락뼈(指節), 염주, 경전 등을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것들은 내 스승 석가여래께서 친히 입으셨던 가사이고 또 이 사리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이며, 이 뼈는 부처님의 머리와 손가락 뼈이다. 그대는 말세(末世)에 계율을 지키는 사문(沙門)이므로 내가 이것을 그대에게 주노라. 그대의 나라 남쪽 축서산(鷲栖山 : 영축산의 옛이름) 기슭에 독룡(毒龍)이 거처하는 신지(神池)가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독해(毒害)를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그대가 그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삼재(三災 : 물, 바람, 불의 재앙)을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천룡(天龍)이 그곳을 옹호하게 되리라.”

자장율사스님께서는 귀국하여 선덕여왕과 함께 취서산을 찾아서 독룡들이 산다는 못에 이르러 용들을 위해 설법을 하셨다. 그런 뒤 자장율사스님께서는 못을 메우고 그 위에 계단을 설치 하셨다.

이상의 기록을 통하여 통도사가 창건되기 이전의 그 땅은 매우 큰 연못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경내 상노전 구룡지와 하노전 못의 수면을 보면,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속전(俗傳)에 의하면 자장율사스님에게 항복한 독룡은 모두 아홉 마리였는데, 그 가운데서 다섯 마리는 오룡동(五龍洞)으로, 세 마리는 삼동곡(三洞谷)으로 갔으나 오직 한 마리만은 굳이 그곳에 남아 터를 지키겠다고 굳게 맹세하였으므로 자장율사스님은 그 용이 청을 들어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그 용을 머물도록 했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의 구룡지인데 불과 네댓 평의 넓이에 지나지 않으며 깊이 또한 한 길도 채 안 되는 조그마한 타원형의 연못이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전혀 수량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바이로챠나 > 사 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도사  (0) 2011.08.08
개심사  (0) 2011.08.08
法寶寺刹 海印寺  (0) 2011.08.03
僧寶寺刹 松廣寺  (0) 2011.08.03
포탈라궁 (2)  (0) 2011.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