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僧寶寺刹 松廣寺

왈선생 2011. 8. 3. 13:56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의 본사로서 이전에는 대길상사(大吉祥寺)·수선사(修禪寺)라고 했다. 한국 선종의 대수도도량으로서 유서깊은 승보사찰(僧寶寺刹)이며, 통도사·해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사찰로 꼽히는 절이다.

 

송광사 창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송광사사적비 松廣寺事蹟碑〉·〈보조국사비명 普照國師碑銘〉·〈승평속지 昇平續誌〉에 의하면 신라말 체징(體澄)이 길상사(吉祥寺)라는 소규모 절을 지은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려 인종 이후 거의 폐허화되었는데, 1200년 보조국사가 수행결사(修行結社)인 정혜사(定慧社)를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길상사로 옮긴 다음부터 대규모 수도도량으로 발전했다.

 

고려 희종은 정혜사의 이전과 때를 같이하여 송광산 길상사를 조계산 수선사(修禪寺)로 개명(改名)하라는 제방(題榜)을 내렸고, 이후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180여 년 간 진각(眞覺)·각엄(覺儼)·태고(太古)·나옹(懶翁)·환암(幻庵)·찬영(燦英)·각운(覺雲)·무학(無學) 등 15명의 국사를 배출하는 소위 수선사시대를 열게 되었다. 1395년(태조 4)에 고봉화상(高峰和尙)이 전당을 중건했고, 그의 뒤를 이은 중인(中印)이 1420년(세종 2)에 당우를 증축하는 한편 절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정종의 윤지(綸旨)로 설립된 수륙사(水陸寺)를 폐지하고 선종사찰로 복귀했다. 그후 수선사가 언제 송광사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폐사 직전에 놓인 송광사는 응선(應善)과 부휴(浮休) 등의 노력에 힘입어 명맥을 유지했다.

 

1842년의 화재와 6·25전쟁 등으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거나 파괴되고 다시 중건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현재 한국 선종을 이끄는 중심사찰의 역할을 하고 있다. 6·25전쟁 전의 가람배치는 의상(義湘)의 법계도(法界圖)와 같았다고 하며,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국사전(國師殿:국보 제56호)·하사당(下舍堂:보물 제263호)·

                   약사전(藥師殿:보물 제302호)·

                   영산전(靈山殿:보물 제303호)·

                   청량각(淸凉閣)·척주각(滌珠閣)·우화각(羽化閣)·천왕문·해탈문·대장전(大藏殿) 등 50여 동이 있어 대가람의 면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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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 제56호 국사전은 나라를 빛낸 큰 스님

16분의 영정을 모시고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로, 옛날에는 참선을 하던 곳이었다

.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처음 지었고,

그 뒤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소박하고 아담한 형태와 그 기법에서도 주심포 중기

형식의 표준이라고 할 만한 중요한 건축물이다.

1962년12월20일에 국보 제56호로 지정되었

 

보물 제302호 약사전은 모든 질병을 고쳐 주는 부처인

 약사여래를 모신 불전으로서, 규모가 송광사에서 가장

 작은 법당이다. 앞면·옆면이 모두 1칸으로 간결하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현재 있는 우리나라 법당 중 가장 작은 이 약사전은 조각

 수법으로 보아 조선 중기인 17세기 무렵의 건물로 추정한다.

 영산전에는 석가모니불상을 모시고 석가의 생애를

8단계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가 있으며, 이외에도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담은 영산대회 그림도 볼 수 있다

 

 

 

 

 

송광사에 있는 중요문화재로는 목조삼존불감(국보 제42호)·

                                          고려고종제서(高麗高宗制書:국보 제43호)·

                                          고려문서(高麗文書:보물 제572호)·

                                          경패(經牌:보물 제175호)·금동요령(金銅搖鈴:보물 제176호) 등이 있으며

                                          1093년 간행된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大乘阿毘達磨雜集論疏:보물 제205호),

                                          1095년에 간행된 묘법연화경찬술(妙法蓮華經讚述:보물 제206호)과

                                          금강반야경소개현초(보물 제207호),

                                          대반열반경소(보물 제90호),

                                          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삼현원찬과문(보물 제204호),

                                          영산전목불좌상 등이 있다.


 

 

 목조삼존불감(국보 제42호)

불감(佛龕)은 송광사(松廣寺)에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흔히 보조국사원불(普照國師願佛)로 알려져 있다.

불감은 닫으면 한 개의 포탄형(砲彈形)인데 열면 세 부분으로 펼쳐지는 것으로 이런 형식의 불감은 조선(朝鮮) 후기(後期)까지 목조불감(木造佛龕)에 잘 계승되고 있다.

중앙의 불감에는 투각(透刻)된 연꽃
대좌(臺座) 위에 본존불(本尊佛)이 앉아 있는데 머리 위에는 장막(帳幕) 모양의 천개(天蓋)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본존불은 뾰족한 육계(肉계), 근엄한 얼굴,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얇은 불의(佛衣), 건강한 체구(體軀) 등 당당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나타내었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 옷자락을 잡고 있는데, 이 옷자락은 인도(印度)의 고식(古式) 옷주름에 기원을 둔 두 가닥의 옷주름 표현으로 손모양과 함께 인도양식(印度樣式)이 많이 나타나 있다.

본존불(本尊佛) 주위에 5구(五軀)의 협시상(脇侍像)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고
광배(光背)가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좁은 공간 안에 여러 상(像)과 대좌(臺座), 천개(天蓋)들이 높은 돋을새김과 투각기법(透刻技法)으로 새겨져 있는데 원근법적(遠近法的)인 공간감(空間感)과 입체감(立體感)을 놀라울 정도로 잘 나타내었다.

왼쪽 불감에는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普賢菩薩), 오른쪽 불감에는 사자를 탄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있는데 본존의 불감과 같은 수법이다.

이 문수·보현보살의 표현으로 보아 본존불의 석가불(釋迦佛)이 분명하므로 석가삼존불(釋迦三尊佛)을 봉안(奉安)한 불감으로 크게 주목된다.

불상을 모시기 위해 나무나 돌, 쇠 등을 깎아 일반적인 건축물보다 작은 규모로 만든 것을 불감(佛龕)이라 한다. 불감은 그 안에 모신 불상의 양식뿐만 아니라, 당시의 건축 양식을 함께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목조삼존불감은 보조국사 지눌이 당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불감은 모두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운데의 방을 중심으로 양쪽에 작은 방이 문짝처럼 달려 있다. 문을 닫으면 윗부분이 둥근 팔각기둥 모양이 되는데, 전체 높이는 13㎝이고, 문을 열었을 때 너비 17㎝가 되는 작은 크기이다.

가운데 큰 방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앉아 있는 본존불이 조각되어 있고, 양쪽의 작은 방에는 각각 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본존불은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으며, 옷주름은 2줄로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었고, 무릎 위에 올리고 있는 왼손에는 물건을 들고 있다. 오른쪽 방에는 실천을 통해 자비를 나타낸다는 보현보살을 배치하였는데, 코끼리가 새겨진 대좌 위에 앉아 있다. 보살의 왼쪽에는 동자상이, 오른쪽에는 사자상이 서 있다. 왼쪽 방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연꽃가지를 들고 서 있다. 문수보살은 사자가 새겨져 있는 대좌 위에 서 있으며, 보살의 좌우에는 동자상이 1구씩 서 있다.

이 목조삼존불감은 매우 작으면서도 세부묘사가 정확하고 정교하여 우수한 조각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세부의 장식과 얼굴 표현 등에서는 인도의 영향을 받은 듯 이국적인 면이 보이며, 불감의 양식이나 구조에서는 중국 당나라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국내에 남아 있는 불감류 가운데 매우 희귀한 예라고 할 수 있다
·

 본존불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2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3.9cm, 감의 지름 69cm이며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송광사에 소장되어 있다. 불감은 줄여서 감이라고도 하며, 원래 석굴사원의 암벽()에 움푹 팬 곳을 만들고 그 안에 불상·보살상을 새기거나 따로 모셔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곳을 뜻하였으나, 나중에는 단목()과 같은 나무 또는 금속으로 감형()을 만들고 불·보살을 새겨 휴대하기도 하였다.
이 불감 역시 나무로 만든 것으로 중국 당나라 시대(8∼9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보조국사 지눌이 중국 금나라 황후의 병을 치료해 선물로 받아 몸에 지니고 다녔던 원불로 전해지고 있다. 하나의 나무를 삼등분하여 포탄형으로 만든 것이어서 어디서든지 펼치면 이동식 법당이 되는 귀한 물건이다.
가장 큰 가운데 방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대좌() 위에 앉아 있는 본존불이 조각되어 있는데, 머리 위에는 장막() 모양의 천개()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주위에 5구의 협시상()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고 광배()가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었고, 무릎 위에 올리고 있는 왼손은 옷자락을 잡고 있다. 얼굴은 근엄하며 머리에는 육계가 솟아 있으고 체구는 당당하다. 오른쪽 방에는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이, 왼쪽 방에는 사자를 탄 문수보살()이 있다.

이 목조삼존불감은 비록 크기는 작으나 세부묘사가 정교하여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세부의 장식과 얼굴 표현 등에서는 인도의 영향을 받은 듯하며, 불감의 양식이나 구조에서는 중국 당나라의 요소가 엿보인다.

그 동안 본존불이 조각돼 있는 중앙 윗부분의 나무가 떨어져 나가 다른 나무로 덧대어 있었고, 경첩의 연결쇠도 끊기어 있었으나, 2001년 고미술 복원전문가인 재일한국인 고준영(다카하시 도시오) 교수에 의해 복원되었다.

 

 

 高麗高宗制書:국보 제43호

이 제서(制書)는 능형화문(菱形花文)을 나타낸 홍(紅)·황(黃)·백(白) 등의 색능(色綾) 7장을 이어서 만든 두루마리에 묵서(墨書)한 것인데, 그 내용은 고려(高麗) 고종(高宗)이 조계산(曹溪山) 제2세(第二世)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惠諶)에게 대선사(大禪師)의 호(號)을 하사할 것을 제가(制可)하고, 최홍윤(崔洪胤) 이하 당시의 직사봉행(職事奉行)의 질(秩)을 열기(列記)하고 있으며, '정우 4년 5월 일(貞祐 四年 五月 日)'과 같이 그 시행년월(施行年月)을 명시하고 있다.
이 문서는 고려 고종 3년(1216)에 조계산 제2세 진각국사 혜감에게 대선사의 호를 하사한 제서이다. 이것은 능형화문을 나타낸 홍, 황, 백색 등의 무늬가 있는 비단 7장을 이어서 만든 두루마리에 묵서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3.6m, 세로 33㎝이다.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글자도 자세히 보이지 않아서 전체문장을 알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이것은 고려시대 승려에게 하사한 제서 중 몇 점 되지 않아 귀중하다.

 高麗高宗制書:국보 제43호

1962년 12년 20월 국보 제43호로 지정되었다. 필사본으로 수량은 1축()이며, 크기는 가로 3.6m, 세로 33㎝이다.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에서 소장하고 있다.

고종이 조계산() 제2세 진각국사 혜심에게 대선사()의 호를 내릴 것을 제가()한 문서로, 마름모꼴 꽃무늬를 나타낸 홍 ·황 ·백 등의 색비단 7장을 이어서 두루마리에 묵서()한 것이다.

최홍윤() 이하 당시의 직사봉행()의 질()을 열기()하였고, '정우사년정월일( )'이라고 그 간행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고종 3년은 1216년에 해당한다. 보존 상태가 나빠 비단은 해어지고 글자들은 닳아 전문()을 판독할 수 없으나, 고려시대의 고문서()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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