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보루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가면 대웅보전이 나온다. 누 아래에서 계단을 올라가노라면 대웅보전 용마루가 모두 보인다. 용마루 솟음이 보이게 누대 아래 쪽 부분을 살짝 올려놓았다. 정성이 살짝 엿보인다. 대웅보전 마당이 건물 크기와 적당히 어울린다. 너무 넓으면 휑해 보이고 너무 좁으면 답답해진다. 대웅보전에서 보니 스님 두 분이 마당을 가로지르고 있다.
왕실 지원아래 지어져, 화려하지만 소홀함 없는 건축기법
부처님 뒤에 건 탱화는 보통 절에서 만날 수 있는 불화와 느낌이 너무 다르다. 생동감이 넘친다.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란다. 원근법을 포함한 서양화풍을 강하게 띠고 있다. 김홍도가 청나라를 사신으로 따라간 적이 있는데, 이때 청나라에 온 선교사들의 서양그림을 본 적이 있단다. 그 때 본 서양그림의 흉내를 내 본 그림일까? 부처님과 그 권속들이 활기와 생기가 넘친다.
조선 전기의 사찰들은 작은 규모이지만 격조 높은 고려 귀족들의 순수청자 같은 맛을 유지했다. 16세기, 17세기 조선의 사찰들은 향촌의 주인인 사림들의 지원을 받아 매우 거대하고 장엄해졌다. 17세기 18세기에 장사를 통해 경제적 부를 획득한 상공인이 경영한 조선 사찰들은 매우 화려해지고 효율적인 건물 구조를 띠었다. 그래서인지 용주사는 18세기 후반의 일반적인 화려한 경향과 왕실의 엄격성이 첨가되어 독특한 절간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노론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을 왕으로 받드는 것 자체가 노론에게는 정치적 부담이 되었다. 정조 임금은 아버지를 뵙는다는 명분으로 빈번히 수원 행차를 시행했다. 1795년에는 아예 수원에 화성을 쌓고 장용영이라는 군대까지 양성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화성 행궁에서 거대한 잔치를 벌였다. 군사훈련도 실시했다. 정책 기관으로는 창덕궁 안에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을 세웠다. 노론들의 기가 꺾이고 있었다. 현륭원 이장과 용주사 건설 등은 정조 임금의 용의주도한 왕권 확립 과정의 산물이었다. 아버지의 원혼을 달랜다고 용주사를 세웠다. 유교국인 조선의 임금이 효도를 하겠다는데 그 누가 딴지를 걸 수 있단 말인가. 정조는 왕권 강화에 ‘효도’를 효과적인 외피로 사용했다. 그러나 백년 넘게 조선 정계를 장악한 노론 역시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1800년 정조는 사소한 부스럼 끝에 마흔 아홉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독살설도 나돌고 있다. 노론 벽파는 실권을 회복하였다. 이후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가 판치면서 조선 후기 정치는 부패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말았다. 정조의 왕권 회복 정책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고, 사찰로서는 용주사만 남게 되었다. 용주사를 짓고 주변 사찰들의 좋은 불교 유물들을 옮겨 왔다. 지장전에는 17,8세기의 뛰어난 시왕들상이 나열해 있다. 국보로 지정한 용주사 동종은 고려 때 작품인데, 역시 주변 다른 절에서 옮겨놓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용주사에는 조선 후기의 불교 미술을 만날 수 있다.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동자상들은 소박한 조선 조각의 멋을 잔뜩 담고 있다. 박물관에 진열하고 있는 사천왕상은 순박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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