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로챠나/사 찰

축서사 (文殊山 鷲棲寺,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 1)

왈선생 2011. 8. 16. 09:08

 

   

 

 

 

 

 

 

 

 

 

 

 

 

 

 

 

 

 

 

 

 

 

 

 

 

 

축서사란 이름은 독수리 축(鷲,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시던 영축산을 본따 ‘축’으로 읽는데, ‘취’라고도 읽음), 깃들 서(棲), 즉 독수리 사는 절이라는 뜻으로 독수리는 지혜를 뜻하며 지혜는 바로 큰 지혜를 가진 문수보살님을 뜻하므로 축서사란 이름을 붙인 듯 하다. 한편 험준한 뒷 세가 풍수지리학상으로 독수리 형국이므로 축서라 명명했다고 보는 이도 있다.

 

축서사는 신라 제 30대 문무왕 13년(서기 673년)에 의상 조사가 창건한 절로서 창건 연기설화에 의하면, 문수산 아래 지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의 스님이 어느 날 밤 지금의 개단초등학교 앞산을 바라보니 휘황찬란한 빛이 발산되고 있어 광채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더니 한 동자가 아주 잘 조성된 불상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 얼마 후 그 동자는 청량산 문수보살이라며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리고 불상만 남았다.

훗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의상대사가 불상을 모실 곳을 찾아 다니다가 현 대웅전 터에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시니 축서사의 창건이다. 이 때 산 이름도 문수보살이 출현하였다 해서 문수산이라 한듯 하다.
3년 뒤에 의상대사께서는 축서사에서 40여리 떨어진 봉황산 중턱에 대찰을 세웠으니 동국화엄제일도량인 부석사이다. 흔히 축서사를 부석사의 큰 집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대웅전 상량문에 의하면 이 절은 광서(光緖) 7년(서기 1875년)에만 해도 대웅전, 보광전, 약사전, 선승당, 동별당, 서별당, 청련당, 백화당, 범종각 등 여러 동의 건물이 있었고, 산내 암자만도 상대, 도솔암, 천수암 등 세개나 되었고, 대중이 44명이 살았으며 대웅전 본존불에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 하여 기도처로 유명한 사찰이기도 하였으나, 조선조 말기 을사보호조약(서기 1905년)과 정미 7조약(서기 1907년)으로 왜구의 속국화되는 것을 분개하여 전국적으로 의병이 무장봉기하여 항일투쟁할 때 이 곳에도 일군이 의병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으로 방화하여 대웅전 1동만 남기고 전소시켰다.
이 때 천년 고찰로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축서사는 하루 아침에 잿더미가 되었고 오랫동안 전해내려오는 수많은 유물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 후 한동안 폐사로 있다가 일제 말기에 삼성각과 6.25전쟁 직후에 요사 1동을 신축하여 사찰의 체모를 유지하다 최근에 서기 1980년 전후에 요사 1동과 토굴 2동을 신축하였다.


문화재급 보물로는 대웅전(지금의 보광전)의 석조비로자나불과 그 좌대와 석등 및 석탑이 있다. 불상은 대웅전 서벽에 봉안되어있지만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불신의 높이 108m, 어깨넓이 55cm, 머리높이 31cm, 대좌높이 96cm로 8각 대좌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는 이 불상은 신라하대(9세기경) 많이 조성되었던 일련의 비로자나불좌상의 모습과 비슷하다.

동화사 비로자나불좌상(보물 244호), 각연사 비로자나불상(보물 433호) 등과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불상으로서 당시의 조각수업 및 신앙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나발(螺髮)의 머리에는 커다란 육계가 표현되어 있으며, 가는 눈, 활형의 눈썹, 일자로 다문 입으로 인해 얼굴에는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신체는 곧고 반듯한 어깨, 넓은 가슴, 넓게 벌린 무릎과 함께 현실적인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분명하며 통견(通肩)의 법의는 옷주름이 등간격의 평행의 문선으로 이루어져있고, 몸에 밀착되어 신체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며, 평행계단식 옷주름은 지권인(智拳印)을 결한 양쪽 팔에 걸쳐 양쪽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무릎 사이의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퍼진 옷주름은 다른 불상에서와는 달리 물결식의 주름으로 표현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평행개단식 의문(衣紋)과 함께 9세기 후기의 불상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불상은 석탑기에 의해 9세기 후기에 조성되었다는 절대 연대가 밝혀져 신라후기 불상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비교적 훼손이 적어 그 가치가 더욱 높게 평가되고 있으며, 정교하고 뛰어난 모습은 신앙심을 불러일으키고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케 한다. 이 불상은 휘황찬란한 금빛으로 칠해져 있었으나, 서기 1950년대 항공 스님이 흰색으로 칠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상 뒤에는 정기유(正己酉)라는 연대가 보이는데 불상을 보수했던 연대로 추정된다. 이 연대가 조선 영조 5년(서기 1729년)인 것으로 볼 때 200여년 전에 보수가 된 것 같다. 대좌(台座)는 신라하대에 유행한 8각 대좌로서 상중하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대석에는 8각에 사자 1구씩을 양각했고, 중대에는 공양상 및 합장한 인물상, 상대에는 화문(花紋), 연화문(蓮花紋) 등이 조각되어 있다. 뒤에는 화려한 꽃무늬나 불꽃무늬의 목조광배는 상부만 남아있다.

 

석등은 높이 2.3m쯤 되는데 원래는 석탑앞에 있었으나 지금은 대웅전 앞으로 옮겼다. 귀꽃이 장식된 복련하석대(伏蓮下石台), 간주(幹株),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된 대석위에 화사석(火舍石)이 옮겨졌는데 개어져 심하게 금이 가 있다. 옥개석도 덮여있긴 하나, 오랜 세월로 자세마저 한쪽으로 기울고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석탑도 원형이 완전히 파괴되고 지금은 2층 기단위에 초층탑신만이 남아 있는데 기단 면석과 옥신에는 우주가 있고, 기단면석엔 탱주가 있어 각 면석을 양분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한 개의 옥개석은 4단 받침으로 되어 있다.

신라 이래 보존되어 신앙의 대상이 되어 오던 이 탑은 원래는 3층이었다고 한다. 일제때 일본인들이 도괴하여 파괴하고 탑속에서 나온 사리와 유물은 일본으로 가져가고 옥석 사리함만 현재 국립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이 사리함에 서기로 환산 867년이란 연대가 있어 신라후기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잘 다듬었던 흔적이 보이는 맷돌, 주춧돌, 석축 등 석재들이 사찰 주변 곳곳에 흩어져있는 것으로 볼 때 축서사는 상당히 큰 가람이었던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자랑거리로 우수한 괘불 1점이 있다. 지금부터 200여년전인 서기 1768년 무자년에 점안한 괘불로서 크기(가로 550cm, 세로 880cm, 면적 48.4제곱미터)는 대형이다. 입상 아미타불로서 성스러운 존안과 특이한 육계, 풍만한 가슴과 부처님상으로 보기 드물게 화려한 의상 및 특이한 후광배는 불자로 하여금 신심을 돈독하게 하고 발심케 한다. 큰 회화이면서도 적당한 구도와 섬세하고 뛰어난 솜씨는 관람자를 감탄케 한다. 사찰림이나 전답도 많아 15리쯤 떨어진 절단 마을까지가 절 땅이었다고 한다.

 

절단이란 이름은 절 땅이 변해서 절단이 되었다 한다. 일제 초기 일본인들이 조선을 완전 속국화하여 통치하기 위하여 전국을 측량하고 각종 산물을 조사했을 때 임야는 대부분 국유화되고 전답은 일부분 국유화되고 일부는 소작인 소유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