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절에 되새기는 중도(中道)와 네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
자야망갈라가타(Jayamangala-gatha, 길상승리게)
음력 12월 8일은 성도절(成道節)
음력 12월 8일은 성도절(成道節)이다. 부처님이 깨달은날이라해서, 도를 이룬날이라 해서 성도절이라 한다. 그런데 남방 불교국가의 경우 성도절도 음력12월 8일까.
대승불교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동아시아불교에서 4대명절이 있다. 즉, 부처님이 태어난날인 음력4월초파일(8일)의 ‘부처님오신날’, 출가한 날인 2월 초파일의 ‘출가절’, 도를 이루신날인 12월 초파일의 ‘성도절’, 그리고 열반하신날인 2월 15일의 ‘열반절’이 그것이다. 그러나 테라와다전통을 가지고 있는 남방불교는 이와 다르다.
북방불교에서 태어난 날과 깨달은 날과 열반하신 날이 모두 다르지만, 남방불교에서는 모두 ‘같은’ 날이다. 또 그날은 음력4월 초파일이 아닌 음력의 ‘만월’일인 4월 15일이다. 이처럼 북방불교와 남방불교의 차이는 교리의 차이 뿐만아니라 부처님의 행사일도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기념하는 날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이 깨달은 사항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흔히 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를 많이 한다. 특히 한국불교에서 그렇다. 스님들이나 교수들이 신문이나 방송에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을 종종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깨달음이 있기에 이구동성으로 각자 ‘깨달음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하여 한마디씩 하는 것일까.
그렇게 각자 한마디씩 하는 이유는 깨달음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모두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한국불교에 있어서 깨달음에 대한 정체성문제로 이어진다. 아직까지도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명확한 정의가 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테라와다에서 깨달음은 바로 사성제를 말한다. 사성제를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사성제는 불교의 시작이자 마지막과 같고,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사성제이다. 따라서 불교의 깨달음이란 사성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사성제는 어떤 것일까. 초기불교 경전에서 옮겨 보았다.
중도(中道)와 네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때 부처님은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 계셨다.
부처님은 다섯명의 비구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비구들이여 출가수행자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하여야 한다. 무엇이 두가지인가?
[첫번째는] 감각적인 쾌락에 몰두하는 것으로 이것은 저열하고, 천박하고, 하찮고, 유익함이 없으며,
[두번째는]지나친 고행에 몰두하는 것으로 이것은 고통스럽고,저열하고,유익함이 없는 것이다. 여래는 이 두가지 극단에 치우침이 없도록 중도를 깨달았다. 중도는 통찰력을 주며, 지혜를 주며, 평화를 주며, 깨달음으로 이끌고,열반으로 이끈다.
깨달음의 이끄는 여래가 깨달은 중도란 무엇인가? 중도는 바른 여덟가지 바른길(팔정도)이다. 여덟가지 바른길은, 바른견해, 바른생각, 바른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수단,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이다. 이것이 여래가 깨달은 중도로서 통찰력을 주며, 지혜를 주며,평화를 주며, 깨달음으로 이끌고, 열반으로 이끈다.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이와 같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괴로움이며,
싫은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며,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며,
한마디로 말하자면 집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가지 무더기’가 괴로움이다.
괴로움의 근원의 거룩한 진리는 이와 같다.
갈애는 쾌락과 욕망을 수반하며
여기저기서 쾌락을 찾아 헤매고 윤회로 이끈다.
갈애에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다시태어남에 대한 갈애,
다시 태어나지 않겠다는 갈애가 있다.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이와 같다.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하고,
포기하고 버려서 더 이상 갈애에 집착하지 않고
갈애로 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괴로움의 소멸로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는 이와 같다.
그 길은 바로 여덟가지 바른길이다.
그것은 바른견해, 바른생각, 바른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수단,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이다.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원인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로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는 일찍이 누구도 말한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런데 나에게 이 들어본 적도 없는 진리를 알았다는 통찰력이 일어났고 지혜가 생기고 앎이 생기고 빛이 생겼다.
이와 같이 나는 신과 악마와 범천과 수행자와 브라흐민과 모든 신과 인간의 세계에서 최상의 온전한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흔들림 없는 해탈을 얻었다.’ ‘이것은 나의 마지막 탄생이다.’ ‘윤회하는 일은 이제는 없다.’라는 통찰력이 생겼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자 다섯명의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에 기뻐하였다.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꼰단냐 비구는 티끌 없는 진리의 눈이 열렸다. ‘무엇이든지 생긴 것은 소멸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그때 부처님은 이렇게 감탄의 말씀을 하셨다.
“참으로 꼰단냐는 알아들었다.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다.”
이로 해서 꼰단냐 비구는 안냐-꼰단냐((Añña Kondañña) 깨달은 꼰단냐)로 불리게 되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이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도 다시 굴릴 수 없는 법륜을 굴리셨다.
(상윳따니까야: 56 삿짜상윳따11, sn56.011)
사성제 빠알리 챈팅음악(부드러운 남성음)
Cattāri Ariyasaccāni(짯따리 아리야삿짜니)
Idaṃ kho pana, bhikkhave, 이담 코 빠나 빅카웨
dukkhaṃ ariyasaccaṃ— 둑캄 아리야삿짬
jātipi dukkhā, 자-띠삐 둑카-
jarāpi dukkhā, 자라-삐 둑카-
byādhipi dukkho, 뱌-디삐 둑코
maraṇampi dukkhaṃ, 마라남삐 둑캄
appiyehi sampayogo dukkho, 압삐예히 삼빠요고 둑코
piyehi vippayogo dukkho, 삐예히 윕빠요고 둑코
yampicchaṃ na labhati tampi dukkhaṃ— 얌삣참 나 라바띠 땀삐 둑캄
saṃkhittena 삼킷테나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빤쭈빠-다-낙칸다-나 둑카-
Idaṃ kho pana, bhikkhave, 이담 코 빠나 빅카웨
Idaṃ kho pana, bhikkhave, 이담 코 빠나 빅카웨
dukkhasamudayaṃ ariyasaccaṃ— 둑카사무다얌 아리야삿짬
yāyaṃ taṇhā 야-얌 딴하-
ponobbhavikā 포노바위까-
nandirāgasahagatā 난디라-가사하가따-
tatratatrābhinandinī, 따뜨라따뜨라-비난디니-
seyyathidaṃ— 세이야티담
kāmataṇhā, 까-마딴하-
bhavataṇhā, 바와딴하-
vibhavataṇhā. 위바와딴하-
Idaṃ kho pana, bhikkhave, 이담 코 빠나 빅카웨
Idaṃ kho pana, bhikkhave, 이담 코 빠나 빅카웨
dukkhanirodhaṃ ariyasaccaṃ— 둑카니로담 아리야삿짬
yo tassāyeva taṇhāya 요 땃사-예와 딴하-야
asesavirāganirodho cāgo 아세사위라-가니로도 짜-고
paṭinissaggo 빠띠닛삭고
mutti anālayo. 뭇띠 아나-라요
Idaṃ kho pana, bhikkhave, 이담 코 빠나 빅카웨
Idaṃ kho pana, bhikkhave, 이담 코 빠나 빅카웨
dukkhanirodhagāminī 둑카니로다가-미니-
paṭipadā ariyasaccaṃ— 빠띠빠다- 아리야삿짬
ayameva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아야메와 아리요 앗탕기꼬 막고
seyyathidaṃ— 세이야티담
sammādiṭṭhi 삼마- 딧티
sammāsaṅkappa 삼마-상깝빠
sammāvācā 삼마-와-짜-
sammākammanta 삼마-깜만따
sammāājīva 삼마아-지-와
sammāvāyāma 삼마-와-야-마
sammāsati 삼마-사띠
sammāsamādhi 삼마-사마-디
The Four Noble Truths
"Suffering, as a noble truth, is this:
Birth is suffering,
aging is suffering,
sickness is suffering,
death is suffering,
sorrow and lamentation, pain, grief and despair are suffering;
association with the loathed is suffering,
dissociation from the loved is suffering,
not to get what one wants is suffering —
in short, suffering is the five categories of clinging objects.
"The origin of suffering, as a noble truth, is this:
It is the craving that produces renewal of being accompanied by enjoyment and lust,
and enjoying this and that; in other words,
craving for sensual desires,
craving for being,
craving for non-being.
"Cessation of suffering, as a noble truth, is this:
It is remainderless fading and ceasing, giving up, relinquishing, letting go and rejecting, of that same craving.
"The way leading to cessation of suffering, as a noble truth, is this:
It is simply the noble eightfold path, that is to say,
right view, right intention; right speech, right action, right livelihood; right effort, right mindfulness, right concentration.
네가지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이와 같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괴로움이며,
싫은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며,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며,
한마디로 말하자면 집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가지 무더기’가 괴로움이다.
괴로움의 근원의 거룩한 진리는 이와 같다.
갈애는 쾌락과 욕망을 수반하며
여기저기서 쾌락을 찾아 헤매고 윤회로 이끈다.
갈애에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다시태어남에 대한 갈애,
다시 태어나지 않겠다는 갈애가 있다.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이와 같다.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하고,
포기하고 버려서 더 이상 갈애에 집착하지 않고
갈애로 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괴로움의 소멸로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는 이와 같다.
그 길은 바로 여덟가지 바른길이다.
그것은 바른견해, 바른생각, 바른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수단,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바른 집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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