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는 7주간의 명상 끝에 이 법을 누구에게 먼저 알려야 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자기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두 선인과 이 기쁨을 나누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미 두 사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서, 다음으로 생각한 사람은 베나레스로 떠나 갔던 5명의 동료들이었으므로, 그들에게 법을 전하고자 전도 여행길에 나섰다. 당시의 베나레스 교외에 있는 프르가다바는 녹야원(鹿野苑)으로 번역되는 곳으로 현재의 사르나스인데, 이곳은 수행자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다. 거기에 와 있던 옛 동료인 5명의 수행자들은 타락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석가모니가 오는 것을 보고 그를 맞이하여 자리를 마련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깨달은 법을 정식으로 설하는데, 이것이 최초의 설법이었다. 예전의 동료였던 5명은 그 법에 귀를 기울여 부처와 동일한 경지를 깨닫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것을 유명한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한다. 처음에는 친한 보살에게 법을 설하여 그것이 이해되자, 석가모니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법을 설하기에 이른다.
이 베나레스에서 상인의 아들인 야사와 그의 친구 3명, 다시 그들의 친구 50명도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듣고서 출가했다. 그러나 사문은 한 장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석가모니는 "한 길을 둘이서 가지 말라"고 설하여 각각의 제자들을 전도의 여행으로 내보내는 동시에, 그 자신도 몇 사람의 제자들을 데리고 편력한다. 드디어 불을 섬기는 브라만으로서 마가다국에서 존경을 받고 있던 카사파라는 이름의 3형제와 그들의 무리 1,000명을 귀의케 했다. 또 마가다의 국왕 빔비사라도 귀의하여 증대하는 불교 수행승들을 위해 나중에 죽림정사(竹林精舍)를 기증했다고 전해진다. 또 가섭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카사파도 제자로 삼았는데, 그는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난 후 불교 교단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석가모니의 명성을 떨치게 했던 사람은 2대 제자로서 유명한 사리불(舍利弗 Śāriputta)과 목건련(目犍連 Moggallana)의 귀의였다. 이들은 당시 불가지론자인 산자야의 제자였으나, 스승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좋은 스승과 만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사지라는 석가모니의 제자가 탁발하며 지나가는 것을 본 사리불은 탁발이 끝나길 기다려 그에게 질문했는데,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일단을 설하는 그의 말에 감복하여 사리불과 목건련은 산자야의 제자 250명을 이끌고 집단으로 전향했다고 한다. 산자야는 이 사실을 알고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본래의 불교가 당시의 사상적 혼란을 넘어 회의론 및 불가지론을 일단 통과한 입장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당시 이미 유명하던 사리불과 목건련이 석가모니 곁으로 무리를 끌고 전향했던 사건은 마가다에서 석가모니를 일약 유명하게 했다. 나아가 이 사건은 인도에서 석가모니의 명성을 높이고, 그의 설법에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받고자 귀의하는 자가 늘어나는 단서가 되었다. 경전에서는 "1,250명의 제자와 함께 머물고 계셨다"는 표현이 정형화되어 있는데, 그 숫자는 카사파 3형제가 이끄는 1,000명과 사리불 등을 비롯한 250명을 총칭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당시에 그만큼의 사람들이 함께 행동하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석가모니는 항상 전도 여행을 계속하여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리하, 코살라국의 수도 사바티(舍衛城), 여기에 인접하는 바지국, 그리고 석가모니 생존시에 코살라국에게 멸망된 석가족의 나라를 중심으로 돌아다녔던 것 같다. 당시 갠지스 강 중류지방에는 사문들의 탁월한 지도자 6명이 잇달아 출현했다. 불교측에서는 이들을 '6사외도'라고 부르는데, 석가모니는 그들의 제자들과 문답하여 많은 사람들을 자기의 제자로 삼고 있다. 그의 유명한 제자들 속에는 사촌동생인 아난(阿難 Ananda)과 아나율(阿那律 Anuruddha), 자신의 외아들인 라훌라도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부왕인 정반왕과 자신의 부인이자 라훌라의 어머니인 야쇼다라도 귀의하기에 이르렀다. 후대에 불교의 이단자로 간주되었던 사촌동생 데바닷타도 제자가 되었으나, 그는 실천에 관해 가장 보수적이고 금욕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후대의 불교에서는 가장 사악한 반역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부처가 되기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석가모니에게 무엇보다도 비극이었던 것은 실질적인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던 사리불이 돌연히 죽고, 목건련도 바라문에게 맞았던 것이 원인이 되어 죽은 사건이었을 것이다. 교단의 지도자인 이 두 사람의 죽음은 실로 애통한 일이었다. 한편 일반 신자들 중에서 마가다의 국왕 빔비사라, 코살라의 국왕 파세나디(Pasenadi), 기원정사(祇園精舍)를 기증한 것으로 유명한 수다타(Sudatta)가 있었다. 특히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는 수다타는 코살라국의 수도 사바티에 사는 부유한 상인이었는데, 라자그리하에서 만난 석가모니에게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되어 석가모니를 사바티에 초청하고 그를 위해 제타(Jeta 祇陀)라는 왕자와 원림[祇園]에 수도원, 즉 정사를 세웠다. 이것이 기원정사이다. 이곳은 사실상 석가모니가 활동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여기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많은 설법도 여기서 이루어졌다. 이밖에 비사카(Visakha)라는 여인이 기증한 녹모강당(鹿母講堂), 코삼비에 있는 정사로서 흔히 미음(美音)정사라고 번역되는 고시타원, 베살리의 대림중각강당(大林重閣講堂) 등 많은 정사가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국왕이나 부유한 상인이 불교 신자로 귀의했던 점이 불교의 경제적 기반을 구축한 동시에 신자가 증대되는 원인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석가모니는 어느 사문 지도자보다 일찍이 출가승들의 집단생활을 도입했다. 그것을 상가(Samgha)라 한다. 흔히 말하는 승가(僧伽)가 이것이며, 불교의 교단을 가리킨다. 베나레스에서 5명의 수행자가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었을 때를 승가의 성립으로 삼고 있는데, 그 승가에는 큰 특색이 있었다. 즉 출가 이전에 속했던 사회적 계급을 불문하고, 하루 또는 한 시간이라도 일찍 출가하여 계(戒)를 받은 자를 윗자리[上座]에 앉혔다. 이렇게 출가하여 수계한 이후의 햇수를 법랍(法臘)이라 한다. 이리하여 교단 내부에서는 카스트 제도를 철저하게 부정했던 것이다. 교단에서의 이러한 평등주의는 기존의 사회 제도를 비판한 것인데, 그것이 교단 내부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석가모니의 적극적인 이상주의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승가에서 수행자 개인은 3개의 옷과 하나의 밥그릇[鉢盂]만을 소유하도록 한정되었고, 기증된 것은 모두 승가의 공동소유로 삼았다. 비가 쏟아지는 계절인 우기가 되면 수행자들은 정사를 중심으로 한 곳에 머물러 그간의 생활에 대한 반성과 학습에 전념했는데, 이것을 안거(安居)라고 한다. 드디어 우기가 끝날 때면 포살(布薩 uposatha)을 실행하여 이제까지의 생활을 반성하고 참회했으며, 그 마지막 날에는 자자(自恣)를 실행하고 새로운 의복을 분배했다. 한편 제자 아난의 진력에 의해 여성 교단을 설립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사부대중(四部大衆) 또는 사중(四衆)이라 불리는 불교 신도의 구성이 완결되었다. 사중이란 남성 출가자인 비구(bhikkhu), 여성 출가자인 비구니(bhikkhuni)·우바새(upasaka)·우바이(upasika)라고 재가(在家)의 남녀 신자를 말한다. 높은 이상을 내걸었던 승가의 정신은 인도의 고대사회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출처 : 박재홍
글쓴이 : 제레드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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