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본래 사색적인 성격인데다가 석가족이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점이 출가에 박차를 가했을 것이다. 여기에 아들 라훌라의 탄생은 출가의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더이상 지체했다가는 가정의 속박으로 인해 출가를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당연히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가란 사문이 되는 것이므로, 그가 출가했다는 것은 브라만에 대항하는 신흥사상가들의 길을 걷고자 한 것이다. 사문은 일정한 장소에 머물지 않고 항상 편력하면서 숲에서 수행하고, 마을로 가서는 법을 설했다. 석가모니는 "나는 29세에 선(善)을 구하여 출가했다"고 술회했다 하여, 일반적으로 이것이 인정되고 있다. 석가모니의 전기에는 그가 출가하는 정경이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한밤중에 깨어나자마자 그는 마부이며 시종인 찬나에게 그의 백마 칸타카에 안장을 얹게 하고는 침실로 가서 잠들어 있는 아내와 아들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을 다시 보기 위해 올 것을 생각하고 그 자리를 떠나 찬나가 이끄는 말을 타고서 성문을 나섰다. 그날 밤으로 그는 시종 찬나와 함께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새벽녘에는 아노마 강을 건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모든 장신구들을 찬나에게 주고, 찬나와 칸타카를 아버지에게 되돌려보내 출가의 사실을 알리게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지나가는 사냥꾼과 옷을 바꿔입어 고행자의 모습처럼 보이게 했다.
석가모니의 전기는 그가 본격적인 수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빔비사라 왕을 만났음을 기록하고 있다. 빔비사라 왕은 그가 깨달음을 성취한 이후 교제를 하게 된 인물인데, 여기서 그와의 만남을 전제해 둔 것은 전기작가의 문학적인 복선일지 모른다. 어쨌든 고행자가 된 싯다르타는 남쪽으로 향한다. 그곳은 영적인 고행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곳이다. 그리고 마가다 왕국의 수도인 라자그리하에 도착했다. 라자그리하는 왕사성(王舍城)이라는 번역어로 통용되는 지명이며 현재의 라지기르에 상당하는 곳이다. 낯선 고행자의 잘생긴 외모와 침착한 인품에 감명받은 마가다의 국왕 빔비사라는 언덕 기슭에 앉아 있는 그를 찾아갔다. 왕은 그 고행자가 예전에 왕자였음을 알아낸 후 그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했고, 자신의 왕국을 분배하여 함께 지내자고 제안했다. 물론 싯다르타는 왕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진리를 탐구하고자 포기했던 그 모든 것들이 다시는 아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빔비사라는 그에게 깨달음을 성취하면 다시 라자그리하를 방문해주기를 요청했으며, 싯다르타는 이에 동의했다. 싯다르타가 가르침을 구하러 나서서 최초로 만난 사람은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라는 선인이었는데, 그는 명상에 전념하는 수행자였다. 싯다르타는 얼마 가지 않아 그가 말하는 경지에 도달하여 그로부터 대등한 취급을 받게 되었으나, 그것은 단순한 지식이고 오로지 말로 통하는 정도의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영원한 평안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의 곁을 떠나게 된다. 다음에는 우다카 라마푸타(Uddaka Ramaputta)의 곁으로 갔다. 그에게서는 이전보다 더 높은 신비적 경지를 배웠으나, 싯다르타는 이것에도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여 그의 곁을 떠났다. 경전에서는 알라라 선인이 추구했던 경지를 무소유처(無所有處)라 하고, 우다카 선인의 그것을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고 한다. 이것은 초기의 불교사상에서 명상 수행의 정신적 경지를 단계적으로 표시하는 4무색정(四無色定)에 포함되는 것인데, 당시의 명상 수행자들은 여기에 역점을 두어 선정을 닦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가모니의 가르침 중에서도 "잘 정신차려 무소유를 기대하면서 거기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함으로써 번뇌의 흐름을 건너라"(〈수타니파타 Suttanipata〉, 1069)고 하여 무소유처의 명상을 가르치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생각하는 자도 아니고, 잘못 생각하는 자도 아니며, 생각이 없는 자도 아니고, 생각을 소멸한 자도 아니다. 이렇게 행하는 자의 형태는 소멸한다. 무릇 세계가 확대되는 의식은 생각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수타니파타〉, 874)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최초의 불교 사상이 발전해가는 과정이 발견된다. 아집을 버리는 무소유의 경지든 비상비비상처의 경지에서, 또는 허무론적으로 이해되는 경향도 있었던 탓인지, 이것도 타파했음이 석가모니의 전기에는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수정주의자(修正主義者)라고 불리는 그들에게 만족하지 않은 석가모니는 고행주의자를 찾아 편력한다. 알라라·우다카의 곁을 떠난 석가모니는 마침내 힌두교의 성지인 가야에 도착한다. 네란자라 강 근처에 있는 우루벳라는 마을 부근의 숲에는 많은 고행자들이 있었다. 석가모니는 수정주의로부터 고행주의로 향하는 하나의 전환을 시도했던 것이다. 경전은 이런 수행의 시기에 대한 석가모니 자신의 많은 회상을 싣고 있다. 이는 아무래도 그것이 그 자신에게 전기(轉機)가 된 하나의 큰 사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의 석가모니를 단적으로 묘사하여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 간다라의 고행상(2~4세기)이지만, 경전에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회상하고 있다(→ 금욕주의). "음식을 거의 섭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모든 수족은 마치 울퉁불퉁한 뼈마디들로 되어 있는 쇠약해진 곤충처럼 되었고, 내 엉덩이는 마치 물소 발굽과 같았고, 내 등뼈는 공을 1줄로 꿴 듯이 불거졌고, 내 늑골은 무너진 헛간의 서까래 같았고, 내 두 눈의 동공은 마치 깊은 우물의 바닥에서 물이 반짝이는 양 눈구멍 속에 깊이 가라앉은 듯했고, 내 머릿가죽은 마치 덜 익은 채 잘려 쓰디쓴 조롱박이 태양과 바람에 의해 쭈그러지고 오그라든 것처럼 되어버렸고…… 내 뱃가죽은 등뼈까지 붙게 되었다. 내가 대소변 등 생리적 요구로 움직이고자 할 때는 즉시 그자리에서 엎어지고 말았으며, 내 사지를 손으로 어루만지면 뿌리가 썩은 털들이 몸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같이 수행하는 석가모니가 악마의 유혹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수타니파타〉425~449). 고행으로 명상하고 있는 석가모니의 곁으로 악마 나무치가 다가와 이런 식으로 유혹한다. "그대는 이제 곧 죽을 그러한 얼굴을 하고 있다. 베다를 학습하는 자로서의 청정한 행동을 하고 성화(聖火)에 공물을 바쳐야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을 텐데, 그러한 고행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이에 대해 석가모니는 "나로서는 세간의 선행을 구할 필요가 전혀 없다…… 나에게는 신앙이 있고, 노력이 있고, 또 지혜가 있다. 이처럼 전념하는 나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생명의 보전을 묻는가?"라고 답하여 그 결의를 피력했다. 악마와의 문답은 많지만, 여기서는 전통적인 바라문 우위의 관습에 대해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하여 그것들을 초극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석가모니를 볼 수 있다. 다른 악마와의 문답에서도 석가모니 자신 속에 있는 정신적 갈등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부터 전래된 사상이나 번뇌와의 대결 등이 뒤섞여 있는 갈등이다. 거기서는 탐욕, 배고픔과 목마름, 쾌락 등 여성명사로 표현되는 악마도 보이며, 고행에 대한 석가모니의 고뇌도 묘사된다. 이런 악마의 유혹은 그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절정에 달한다. 악마는 석가모니 자신의 마음에 있는 또다른 일면을 상징하는 것이다. 유혹에 직면할 때는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그 속에서 대결하여야 비로소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고 석가모니는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구도의 고행 생활이 6년간 계속되었다고 말하지만, 더 오랜 기록에서는 7년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고난의 수행은 6년 또는 7년 동안 계속되었다. '깨달음' 6년 혹은 7년에 걸친 고행이 결국 목적을 달성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이에 석가모니는 "이렇게 극도로 여윈 몸으로는 안락을 얻기 어렵다. 이제 나는 실질적인 음식인 우유죽을 섭취해야지"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함께 수행해 온 5명의 동료는 그가 우유죽을 먹는 것을 보고서 혐오하여, 그는 탐내고 노력하길 포기했다고 말하며 떠나 버렸다.
이 사건은 우루벳라의 세나니라는 마을에 사는 처녀 수자타(Sujata)가 자신이 신앙하고 있는 나무의 신이 나타났다고 믿고서 석가모니에게 우유죽을 공양했던 것이라고 예로부터 전해져 있다. 그러나 격렬한 고행으로 쇠약해져 있던 석가모니에게 이 우유죽은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그의 이러한 실천적 체험은 나중에 그의 교리에서 중도(中道)로 반영된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나중에 보드가야라고 불린 장소에서 명상에 잠겨, 드디어 "아사타 나무 아래서 깨달음(보리)을 열었다"라고 표현되는 성도(成道)의 날이 도래했다. 경전은 이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악마를 등장시켜 그의 가장 위대한 투쟁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욕망 세계의 지배자요 유혹자인 악마 마라는 그를 굴복시켜 깨달음을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무시무시한 마력을 지닌 큰 무리를 이끌고 석가모니에게 접근하여 갖은 방법으로 방해했지만, 석가모니는 전혀 동요됨이 없이 명상에 잠겨 있을 뿐이어서 결국 실패하고 만다. '정진에 관한 가르침'인 〈파다나수타 Padhanasutta〉에 의하면, 마라는 그에게 접근하여 "당신은 야위었고 창백하며 거의 죽을 것 같다. 살아라, 그대여, 삶은 더 좋은 것이다. 가치있는 행위를 하라! 그러한 분투노력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유혹한다. 이에 대해 석가모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욕망은 첫째, 너의 군대, 둘째, 고결한 삶에 대한 혐오, 셋째, 굶주림과 목마름, 넷째, 갈망, 다섯째, 무감각과 게으름, 여섯째, 겁많음, 일곱째, 의심, 여덟째, 위선과 냉혹함, 아홉째, 칭찬과 명예와 그릇된 영화, 열째, 자기를 칭찬하고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이다. 마라여, 이들이 너의 대군들이다. 의지가 박약한 사람은 그들을 이겨낼 수 없으나 오직 그들을 정복함으로써만 사람은 최상의 기쁨을 얻는다. 나는 네게 도전하노니, 만약 패배한다면 내 삶을 비난하라! 싸움에서 죽는 것이 패하여 사는 것보다 더 나으리라……." 결국 마라는 낙담하고 사라졌다. 이 싸움은 신화화된 선과 악의 투쟁, 즉 내적인 갈등이었다. 이 갈등의 극복으로 그는 정각(正覺)을 얻어 비로소 부처가 되었던 것이다. 아사타 나무가 흔히 보리수(菩提樹)로 불리게 된 것은 이 고사에서 유래한다. 남방불교에서는 이 날을 베사카 달의 보름날이라 하는데, 태양력으로는 5월경이 된다. 중국에서 번역된 경전에서는 2월 8일이라 하지만, 이는 음력 12월 8일에 상당하기 때문에 한자문화권에서는 이날을 성도일로 경축해왔다. 석가모니의 나이 35(또는 36)세였다. 석가모니는 자신이 새롭게 발견한 진리(法)를 설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망설인다. 그러자 '범천'으로 번역되는 브라마 신이 나타나 빨리 설법하기를 권한다. 소위 범천권청(梵天勸請)의 전설이다. 아마도 석가모니의 심중에는 설법하더라도 과연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망설임이 오갔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망설임과 설법하려는 결의가 경전에서는 인도의 최고신으로 권위있는 범천이 권유한다는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 결의와 아울러 어떻게 설명하고 표현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위해, 또 새롭게 발견한 법에 대한 기쁨을 음미하면서 깨달은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7주간의 명상에 잠겼다고 한다.
석가모니가 추구한 것은 인생의 모순을 계기로 하여 인간의 고뇌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따라서 수정주의자를 거쳐 고행주의자로 편력하면서도 전혀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없었다는 사실은 양측에 분명히 인생도피의 경향이 강했음을 시사한다. 우유죽을 먹은 것도 이런 입장에서 이해된다. 즉 신체를 고행으로 심하게 괴롭혀도 문제의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고서 그 고행으로 체험한 결과를 토대로 삼아, 몸은 현실생활의 상태로 두면서 불안을 해소하는 노력이 가장 필요하다고 체득했기 때문이다. 항상 현실생활에 입각한 입장에서의 해결이 중시되었다. 이는 고행을 칭찬하고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종교보다도 좋은 수행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점과도 연관된다. 그런데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경전들마다 설하는 바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전통적으로 가장 유력한 설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12지인연, 즉 연기(緣起)의 도리를 관철하여 깨달았다고 한다. 이 도리에 의해 그는 모든 것이 서로 의존적인 관계에 있음을 알고서, 영원하고 영속적이며 불변하고 항구적인 것 또는 사람의 안이나 밖에 영혼이라든가 자기 또는 자아와 같은 절대적인 실체가 없음을 가르치게 된다. 석가모니 생존시에 체계화된 연기설이 성립되었을 것임은 확실하지만 당시는 훨씬 간단한 연기관(緣起觀)이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연기의 이법(理法)을 깨달아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조직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45년 동안 전도의 과정에서 성숙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자신의 체험을 근거로 현실의 생활 속에서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관찰하고, 거기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얻고자 노력했다.
여러 전설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은 석가모니가 인간의 이법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법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생활하고 있는 인간 그 자체에 입각하여 전개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나중에 불교사상이 다양하게 발전하게 되는 그 맹아가 여기서 발견된다. 석가모니가 항상 고정된 방식으로 설법하지 않고, 때에 따라 설하고 삶에 부응하여 설하는 소위 대기설법(對機說法)을 취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나중에 체계화되어 가긴 했지만, 연기의 본질적인 사고방식이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음은 당연했다.
출처 : 박재홍
글쓴이 : 제레드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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