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空)의 논리를 체계화시킨 용수보살은 누구이며 그 사상의 핵심은 무엇인가?
보살의 길을 간 사람은 실제로 얼마나 될까? 믿건대 아마도 그 숫자는 상당수이리라고 본다. 불교가 2천5백여 년 동안 인도며 동아시아 대륙, 그리고 이제는 세계로 내달아오면서 이 척박한 대지를, 그래도 기름지게 일구고 꽃피워 낼 수 있던 것은 분명히 이들 보살의 길을 살다간, 그리고 아직도 살고 있는 구도자들의 훈훈한 입김과 발자국 때문이다. 아니 인류 문명을 이끌어 온 모든 종교나 사상의 주인공들은 그들이 모두 이와 같은 보살의 길을 갔다면 그들도 역시 보살의 반열에 끼워넣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나아가 인류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을 망정 아파하는 이웃과 함께 한 이름모를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역시 보살의 향기를 맛볼 수 있으리라.
그들 모두를 일일이 다 헤아리기란 불가능하기에 여기서는 불교사 내지는 인류역사에 괄목할 만한 공헌을 한 몇몇 보살들만을 언급하겠다.
제2의 부처님, 용수보살
용수(龍樹 ;Nagarjuna), 그는 대승불교의 모든 학파에서 제2의 붓다로 추앙될 만큼 불교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로서 공(空)의 논리를 체계화한 중관파(中觀派, Madhyamika vadin)의 시조이다. 그의 덕택으로 공(空)의 이치가 논리적으로 체계화되었으며 더불어 불교가 서양의 어느 정신 체계에도 뒤지지 않는 뛰어난 종교이자 철학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실존철학자 칼 야스퍼스도 그의 저서 『위대한 철인들(Die Grossen Philsopen)』에서 붓다와 용수를 거론하고 있지만 사실 용수의 공의 논리는 현대철학의 그 어떤 논리나 이론 체계보다 뛰어나며 독특한 맛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괄목한 만한 성과 때문에 용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성시될 정도였으니 인도에서는 그의 이름이 부지기수로 바위나 나무 돌 등에 새겨질 지경이었다고 한다. 더욱이 중국에서는 용수가 정토교의 아미타 내영도 등에 아미타 오존(五尊)의 한 분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었고 일본에는 그 상(像)이 아직도 전해지는 모양이다.
여러 가지 역사적인 고증으로 보건대 그는 남인도 출신의 총명한 브라만이었다고 한다. 남인도 사타바나(satavahana)왕조의 왕이었던 가우타미푸트라 샤타카르니(Gautamiputra Satakarni)가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것을 보면 그는 기원후 2세기 후반과 3세기 전반 사이(A.D. 약 150 -250)에 살았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그 왕은 불교보다는 바라문교에 더 심취해 있었으며 대신 그의 어머니가 열렬한 불교 신도였다고 한다. 당시 궁정의 왕비나 지방의 영주, 그리고 상공업자들, 나아가 일반 서민들의 신앙은 불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데칸 고원에는 많은 석굴사원이 건립되게 이른다. 아무튼 이 사타바나 왕가는 로마와의 해상 무역을 통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으며 상인들은 그들의 수익을 불교 교단에 보시할 정도로 불교는 융성했다.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서 용수보살이 역사의 전면에 우뚝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믿을 것이 못되는 구마라집(鳩摩羅什: Kumarajiva)의 『용수보살전』에 따르면 용수는 천성이 총명한 브라만으로서 세 명의 친구를 둔 모양이다. 그들은 이성(異性)에 대한 욕망과 쾌락을 추구한 나머지 몸을 숨기는 둔갑술로 왕궁에 들어가 궁중의 미녀들을 모두 범해 임신시키는 일까지 벌인다. 그들의 소행임을 눈치챈 왕은 군사를 부려 땅 위에 모래를 뿌리게 한 다음 그들의 발자국이 모래 위에 새겨지자 창칼로 그 주변의 공중을 찔러대 세 명의 친구는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고 용수 자신만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이 사건을 통해 용수는 감각적인 쾌락과 욕망에 대해서 회의하고 불문(佛門)에 귀의하게 된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 순간 생과 사의 딜레마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에 직면한 결과 그것을 해결할 목적으로 불가에 발을 들어놓았을 것이리라.
용수는 이렇게 불문(佛門)에 귀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만 방자한 태도를 버리지 못하자 대룡(大龍) 보살이 그를 바다로 데려가 대승의 이치와 남을 이롭게 하는 길, 그리고 태어남도 없고 죽어감도 없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우치게 만든 것으로 전하고 있다.
용과 용수보살의 관계
왜 용수라 이름했을까? 여기서 용의 상징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위에서 말한 대로 그를 깨달음으로 이끈 선한 대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한 걸을 더 나아가 "수(樹)"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용수는 유달리 용과 관련되어 많이 거론되고 있다. 그의 어머니가 아르주나(arjuna)라는 나무 아래서 그를 낳았으므로 아르주나라 하고 용이 그의 길을 완성시겼으므로 나가〔naga;용〕이라 이름지었다. 그래서 그를 "나가르주나(Nagarjuna)"라 했다는 설도 있다.
부통(Buton Rinpoche, 1290 -1364)이 지은 『불교사』를 보자. 용수의 부모는 그가 어려서 죽게 될 운명을 타고났다는 점성술사의 말을 듣고 브라만 사제와 수행승 각각 100명에게 공양을 베풀어 목숨을 겨우겨우 연장한다. 결국에는 용수가 수행승이 된다면 목숨을 더 연장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아미타 다라니를 늘 외운 결과 그는 죽을 운명에서 비로소 벗어난다. 그후 용수는 날란다 사(寺)의 거장이었던 라후라바드라(Rahulabadra) 밑에서 수행하다가 용궁으로 들어가 그 용들에게 부처님 말씀을 설해주어 그들을 조복시키고, 거기서 반야경』을 가지가지고 나온다.
이 부퉁의 『불교사』에서 그는 부처님의 말씀을 설해서 용들을 정복했기 때문에 나가르주나로 불린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가란 정욕과 번뇌의 상징물이요 아르주나란 나무가 아니라 "정복자"라는 의미라야 옳다. 나가르주나는 날카로운 지혜로 불같은 정욕과 번뇌를 조복시키게 된다는 깨달음의 완성을 여기서는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용이란, 용의 용맹한 눈처럼 빛나는 통찰력을 비유하며, 아르주나는 힘의 소유자요 통치자이며 정복자라는 뜻이 더 설득력있게 들린다. 그렇게 용의 눈처럼 빛나는 통찰력으로 죄악과 번뇌를 정복하고 정법을 수호한다는 메타포가 훨신 그의 이름에 걸맞는다고 생각한다. 그의 주요 저술로서는 중론송(中論頌), 대지도론(大智度論), 회쟁론(廻諍論), 십이문론(十二門論),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등이 있다.
공(空)과 세속제, 그리고 중도(中道)
용수의 철학적 성찰은 석가모니의 침묵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지론이다. 부처님은 세계가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영혼은 육신과 같은가 다른가 등의 14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침묵으로 응답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형이상학에 무지했다는 말인가? 아니다. 요즈음의 철학 용어를 쓰자면, 부처님은 형이상학적 입장에 대해 에포케(epoche, 판단중지)의 입장을 취했다는 얘기다. 부처님은 세계·영혼 등의 형이상학적 대상을 파악할 수 없는 이성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용수는 이러한 부처님의 침묵을 이어받아 당시에 난무하던 모든 형이상학의 중심 문제를 정교한 논증의 형식을 빌어 부정한다. 불교의 중요한 개념인 연기로부터 시작해서 사제(四諦), 업(業), 운동, 그밖에 인도의 여러 철학의 중심 개념들을 자체 모순으로 이끌고 가 파사(破捨)해 버린다. 형이상학의 중심 개념에 대한 부정 자체게 그에게는 철학함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용수가 그러한 개념을 어떻게 파사했는가를 그의 논리를 통해서 확인해 보자.
형이상학의 발판인 이성적 판단은 상대적 입장에서만 진리성을 확보하기 때문에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 즉 상대적 입장에서만 진리성을 확보할 따름이므로 궁극적으로는 자체 갈등의 내부 모순을 드러낸다. 이것은 이성적 분별 작용은 그러한 한계를 자체 속에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세계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성적이며 합리적으로 사태를 파악하여 올바른 행위의 준칙으로 삼는다. 여기서는 분명히 업의 법칙이며 도덕율이 적용된다.일상적인 모든 진리와 가치 내지는 상식도 거기에 포함된다. 그것은 구체적이며 실용적이고 상대적인 진리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용수는 그것을 (世俗諦; samvrti -satya)로 규정한다.
그러나 이성에 바탕을 둔 이러한 상대적 진리는 상대적인 일상세계 속에서는 효용성을 발휘하지만 이성을 초월한 궁극적 진리의 입장에서는 부정될 수 밖에 없다. 용수는 그 궁극적 진리를 진제(眞諦 ; paramartha - satya)라고 부른다. 용수가 공에 입각해서 상대적 진리이며 형이상학의 중심 개념을 파사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의 논리는 단순히 부정으로만 이어져 허무주의와 염세주의로 끝나지는 않는다. 부정에 부정을 거쳐 나중에는 그 부정마저 부정하여 절대 긍정의 논리를 확립한다. 사실 부정 내지 공에 집착하다보면 당연히 허무주의나 상대주의, 내지는 회의주의에 빠지겠지만 용수는 그 공마저 공하다고 하여 공에 대한 견해인 공견(空見)으로부터도 벗어날 것을 강조한다. 결국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는 일체의 잘못된 결박으로부터 인간을 철저히 해방시킨다. 그것이 바로 선에서 말하는 방하착(放下着)이요 그리이스적 개념인 무사(無私, apatheia)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와 부정을 통해서(via negatio) 신에 이르는 부정신학과 어느 정도 궤를 같이한다고 보는 설도 있다.
그러한 결박으로부터 해방된 다음, 그렇다면 어디로 가는가. 저 세상으로 멀리멀리 날아가는가. 아니다. 그것은 다시 세속제로의 복귀이다. 세속에 대한 절대 긍정이다. 단 그때의 세속은 집착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상적 세속이 아니라 공을 통해서 정화된 세속이다. 공을 바탕에 깔고 있는 절대 긍정의 세속제이다. 이는 공을 통해서 부정된 세속제와 정반대의 입장에 선다. 똑같은 세속이 부정을 통하여 긍정된 것이다. 세속제의 부정을 통하여 공에 도달하고, 다시 그 공에 머무르지 않으면서 세속제로 복귀한다는 논리다.
일반적으로 그 세속제를 흔히 언어의 세계로만 못박고 있지만, 야지마 요우기찌(失島羊吉) 교수는 그것은 잘못된 견해라고 비판한다. 세속제가 통용되는 사회는 구체적으로 언제나 특수한 사회속이다. 세속제는 서양의 기독교일 수 있고 철학일 수 있으며 어떤 다른 사상일 수도 있다. 심지어 불교의 사성제도 그 세속에 범주에 들어간다고 그는 말한다. 예를 들어 불교권에서는 사성제가 진리이지만 기독교나 서양의 다른 사상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진리가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도 사이에 행해지고 있는 교의나 관행은 다른 세속제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본질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불어 공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예외 없이 부정되므로 전통적인 불교 교설이 부정되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불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나 철학, 가치체계나 상식(상식도 반성적, 철학적 사유를 깔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 진리이다)까지도 이 세속제에 포함된다. 다만 그것이 진정한 가치를 발하려면 공의 물줄기로 자신의 입장을 씻어내야 한다. 그래야만 보편의 장에서 각각의 특수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채 드러나기 때문이다.
공이 성립되는 사람에게는 일체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세속제를 공의 입장에서 순화시켜 그 가치를 인정해 준다. 그것이 중도(中道)이다. 아베 마사오는 이것을 입장없는 입장(positionless position)이라고 한다. 중도를 다른 말로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다고 하여 부주이제(不住二際)라 한다. 생사〔세속제〕를 떠나 있으면서 열반〔空〕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돌아와 생사의 세계〔세속제〕 속에서 자비를 펼친다. 그것이 진정한 보살의 이념이며 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물어본다. 불교의 진리도 다른 세속제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하면 불교 나름대로의 특징은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그에 대한 답변은 그렇한 공을 설하고 있는 것은 불교밖에 없기에 공에 의해서 도달된 불교의 교설은 다른 교설과 동일 수는 없는 뛰어난 사상이라고 한다.
공의 철학과 현대의 서양철학
용수의 이러한 공의 철학은 현대의 서양철학에 비추어 보았을 때 주체나 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의 입장과 어느 정도 궤를 같이한다. 그는 모든 것을 허구이거나 가상이라고 보고 모든 것이 가상일 경우, 최종적으로 그 가상마저 가상으로 부정되어 모든 것은 참으로 인정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니체는 말한다. ""아무것도 참인 것이 없다. 일체가 인정된다"" 이렇게 그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부정하여 신에 의해서 박탈된 생과 자연성을 회복한다.
하이데거(Heidegger, M. 1884 - 1974)는 여기서 한 발 앞서나가 존재 자체를 무(無) 또는 공(空)이라 본다. 존재는 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의 형이상학은 존재를 유(Sein)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서양철학사를 존재 망각의 역사라 규정지으며 기존의 형이상학에 대한 거부를 분명히 밝힌다.
이러한 니체와 하이데거의 뒤를 잊는 현대의 포스터모더니즘은 바로 주체와 자아, 이성, 신의 해체와 맞물려 있다. 지금까지 서양 세계는 아니 그러한 서양을 일방적으로 쫓아가려 하는 인류는 너무나 신·자아·인간·이성"중심주의"에 매달려 왔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을 서양의 기독교적 신관(神觀)에 입각하여 해석하는 서양 절대주의, 하나님 절대주의로 치달아 왔으며, 이기적인 에고이스트들만 키워온 경향이 적지 않다. 인간 중심적 가치판단으로 동물학대와 자연파괴를 조장한 결과 그것이 오히려 인류를 파멸의 길로 인도하고 있으며, 이성 중심에 매몰되다보니 기계적인 매마른 풍토를 조성해 놓고야 말았다.
이제는 그러한 중심에서 이동할 때다. 중심에서 주변으로,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잘난 곳에서 못난 곳으로 우리의 중심을 해체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중심의 해체를 통해 일상적 세속으로의 철저한 복귀를 선언하는 용수보살의 "공의 철학"은 인류의 미래에 "희망"을 던져줄 것이다. (출처 : 죽림사)
보살의 길을 간 사람은 실제로 얼마나 될까? 믿건대 아마도 그 숫자는 상당수이리라고 본다. 불교가 2천5백여 년 동안 인도며 동아시아 대륙, 그리고 이제는 세계로 내달아오면서 이 척박한 대지를, 그래도 기름지게 일구고 꽃피워 낼 수 있던 것은 분명히 이들 보살의 길을 살다간, 그리고 아직도 살고 있는 구도자들의 훈훈한 입김과 발자국 때문이다. 아니 인류 문명을 이끌어 온 모든 종교나 사상의 주인공들은 그들이 모두 이와 같은 보살의 길을 갔다면 그들도 역시 보살의 반열에 끼워넣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나아가 인류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을 망정 아파하는 이웃과 함께 한 이름모를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역시 보살의 향기를 맛볼 수 있으리라.
그들 모두를 일일이 다 헤아리기란 불가능하기에 여기서는 불교사 내지는 인류역사에 괄목할 만한 공헌을 한 몇몇 보살들만을 언급하겠다.
제2의 부처님, 용수보살
용수(龍樹 ;Nagarjuna), 그는 대승불교의 모든 학파에서 제2의 붓다로 추앙될 만큼 불교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로서 공(空)의 논리를 체계화한 중관파(中觀派, Madhyamika vadin)의 시조이다. 그의 덕택으로 공(空)의 이치가 논리적으로 체계화되었으며 더불어 불교가 서양의 어느 정신 체계에도 뒤지지 않는 뛰어난 종교이자 철학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실존철학자 칼 야스퍼스도 그의 저서 『위대한 철인들(Die Grossen Philsopen)』에서 붓다와 용수를 거론하고 있지만 사실 용수의 공의 논리는 현대철학의 그 어떤 논리나 이론 체계보다 뛰어나며 독특한 맛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괄목한 만한 성과 때문에 용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성시될 정도였으니 인도에서는 그의 이름이 부지기수로 바위나 나무 돌 등에 새겨질 지경이었다고 한다. 더욱이 중국에서는 용수가 정토교의 아미타 내영도 등에 아미타 오존(五尊)의 한 분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었고 일본에는 그 상(像)이 아직도 전해지는 모양이다.
여러 가지 역사적인 고증으로 보건대 그는 남인도 출신의 총명한 브라만이었다고 한다. 남인도 사타바나(satavahana)왕조의 왕이었던 가우타미푸트라 샤타카르니(Gautamiputra Satakarni)가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것을 보면 그는 기원후 2세기 후반과 3세기 전반 사이(A.D. 약 150 -250)에 살았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그 왕은 불교보다는 바라문교에 더 심취해 있었으며 대신 그의 어머니가 열렬한 불교 신도였다고 한다. 당시 궁정의 왕비나 지방의 영주, 그리고 상공업자들, 나아가 일반 서민들의 신앙은 불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데칸 고원에는 많은 석굴사원이 건립되게 이른다. 아무튼 이 사타바나 왕가는 로마와의 해상 무역을 통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으며 상인들은 그들의 수익을 불교 교단에 보시할 정도로 불교는 융성했다.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서 용수보살이 역사의 전면에 우뚝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믿을 것이 못되는 구마라집(鳩摩羅什: Kumarajiva)의 『용수보살전』에 따르면 용수는 천성이 총명한 브라만으로서 세 명의 친구를 둔 모양이다. 그들은 이성(異性)에 대한 욕망과 쾌락을 추구한 나머지 몸을 숨기는 둔갑술로 왕궁에 들어가 궁중의 미녀들을 모두 범해 임신시키는 일까지 벌인다. 그들의 소행임을 눈치챈 왕은 군사를 부려 땅 위에 모래를 뿌리게 한 다음 그들의 발자국이 모래 위에 새겨지자 창칼로 그 주변의 공중을 찔러대 세 명의 친구는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고 용수 자신만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이 사건을 통해 용수는 감각적인 쾌락과 욕망에 대해서 회의하고 불문(佛門)에 귀의하게 된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 순간 생과 사의 딜레마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에 직면한 결과 그것을 해결할 목적으로 불가에 발을 들어놓았을 것이리라.
용수는 이렇게 불문(佛門)에 귀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만 방자한 태도를 버리지 못하자 대룡(大龍) 보살이 그를 바다로 데려가 대승의 이치와 남을 이롭게 하는 길, 그리고 태어남도 없고 죽어감도 없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우치게 만든 것으로 전하고 있다.
용과 용수보살의 관계
왜 용수라 이름했을까? 여기서 용의 상징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위에서 말한 대로 그를 깨달음으로 이끈 선한 대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한 걸을 더 나아가 "수(樹)"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용수는 유달리 용과 관련되어 많이 거론되고 있다. 그의 어머니가 아르주나(arjuna)라는 나무 아래서 그를 낳았으므로 아르주나라 하고 용이 그의 길을 완성시겼으므로 나가〔naga;용〕이라 이름지었다. 그래서 그를 "나가르주나(Nagarjuna)"라 했다는 설도 있다.
부통(Buton Rinpoche, 1290 -1364)이 지은 『불교사』를 보자. 용수의 부모는 그가 어려서 죽게 될 운명을 타고났다는 점성술사의 말을 듣고 브라만 사제와 수행승 각각 100명에게 공양을 베풀어 목숨을 겨우겨우 연장한다. 결국에는 용수가 수행승이 된다면 목숨을 더 연장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아미타 다라니를 늘 외운 결과 그는 죽을 운명에서 비로소 벗어난다. 그후 용수는 날란다 사(寺)의 거장이었던 라후라바드라(Rahulabadra) 밑에서 수행하다가 용궁으로 들어가 그 용들에게 부처님 말씀을 설해주어 그들을 조복시키고, 거기서 반야경』을 가지가지고 나온다.
이 부퉁의 『불교사』에서 그는 부처님의 말씀을 설해서 용들을 정복했기 때문에 나가르주나로 불린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가란 정욕과 번뇌의 상징물이요 아르주나란 나무가 아니라 "정복자"라는 의미라야 옳다. 나가르주나는 날카로운 지혜로 불같은 정욕과 번뇌를 조복시키게 된다는 깨달음의 완성을 여기서는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용이란, 용의 용맹한 눈처럼 빛나는 통찰력을 비유하며, 아르주나는 힘의 소유자요 통치자이며 정복자라는 뜻이 더 설득력있게 들린다. 그렇게 용의 눈처럼 빛나는 통찰력으로 죄악과 번뇌를 정복하고 정법을 수호한다는 메타포가 훨신 그의 이름에 걸맞는다고 생각한다. 그의 주요 저술로서는 중론송(中論頌), 대지도론(大智度論), 회쟁론(廻諍論), 십이문론(十二門論),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등이 있다.
공(空)과 세속제, 그리고 중도(中道)
용수의 철학적 성찰은 석가모니의 침묵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지론이다. 부처님은 세계가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영혼은 육신과 같은가 다른가 등의 14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침묵으로 응답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형이상학에 무지했다는 말인가? 아니다. 요즈음의 철학 용어를 쓰자면, 부처님은 형이상학적 입장에 대해 에포케(epoche, 판단중지)의 입장을 취했다는 얘기다. 부처님은 세계·영혼 등의 형이상학적 대상을 파악할 수 없는 이성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용수는 이러한 부처님의 침묵을 이어받아 당시에 난무하던 모든 형이상학의 중심 문제를 정교한 논증의 형식을 빌어 부정한다. 불교의 중요한 개념인 연기로부터 시작해서 사제(四諦), 업(業), 운동, 그밖에 인도의 여러 철학의 중심 개념들을 자체 모순으로 이끌고 가 파사(破捨)해 버린다. 형이상학의 중심 개념에 대한 부정 자체게 그에게는 철학함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용수가 그러한 개념을 어떻게 파사했는가를 그의 논리를 통해서 확인해 보자.
형이상학의 발판인 이성적 판단은 상대적 입장에서만 진리성을 확보하기 때문에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 즉 상대적 입장에서만 진리성을 확보할 따름이므로 궁극적으로는 자체 갈등의 내부 모순을 드러낸다. 이것은 이성적 분별 작용은 그러한 한계를 자체 속에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세계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성적이며 합리적으로 사태를 파악하여 올바른 행위의 준칙으로 삼는다. 여기서는 분명히 업의 법칙이며 도덕율이 적용된다.일상적인 모든 진리와 가치 내지는 상식도 거기에 포함된다. 그것은 구체적이며 실용적이고 상대적인 진리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용수는 그것을 (世俗諦; samvrti -satya)로 규정한다.
그러나 이성에 바탕을 둔 이러한 상대적 진리는 상대적인 일상세계 속에서는 효용성을 발휘하지만 이성을 초월한 궁극적 진리의 입장에서는 부정될 수 밖에 없다. 용수는 그 궁극적 진리를 진제(眞諦 ; paramartha - satya)라고 부른다. 용수가 공에 입각해서 상대적 진리이며 형이상학의 중심 개념을 파사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의 논리는 단순히 부정으로만 이어져 허무주의와 염세주의로 끝나지는 않는다. 부정에 부정을 거쳐 나중에는 그 부정마저 부정하여 절대 긍정의 논리를 확립한다. 사실 부정 내지 공에 집착하다보면 당연히 허무주의나 상대주의, 내지는 회의주의에 빠지겠지만 용수는 그 공마저 공하다고 하여 공에 대한 견해인 공견(空見)으로부터도 벗어날 것을 강조한다. 결국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는 일체의 잘못된 결박으로부터 인간을 철저히 해방시킨다. 그것이 바로 선에서 말하는 방하착(放下着)이요 그리이스적 개념인 무사(無私, apatheia)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와 부정을 통해서(via negatio) 신에 이르는 부정신학과 어느 정도 궤를 같이한다고 보는 설도 있다.
그러한 결박으로부터 해방된 다음, 그렇다면 어디로 가는가. 저 세상으로 멀리멀리 날아가는가. 아니다. 그것은 다시 세속제로의 복귀이다. 세속에 대한 절대 긍정이다. 단 그때의 세속은 집착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상적 세속이 아니라 공을 통해서 정화된 세속이다. 공을 바탕에 깔고 있는 절대 긍정의 세속제이다. 이는 공을 통해서 부정된 세속제와 정반대의 입장에 선다. 똑같은 세속이 부정을 통하여 긍정된 것이다. 세속제의 부정을 통하여 공에 도달하고, 다시 그 공에 머무르지 않으면서 세속제로 복귀한다는 논리다.
일반적으로 그 세속제를 흔히 언어의 세계로만 못박고 있지만, 야지마 요우기찌(失島羊吉) 교수는 그것은 잘못된 견해라고 비판한다. 세속제가 통용되는 사회는 구체적으로 언제나 특수한 사회속이다. 세속제는 서양의 기독교일 수 있고 철학일 수 있으며 어떤 다른 사상일 수도 있다. 심지어 불교의 사성제도 그 세속에 범주에 들어간다고 그는 말한다. 예를 들어 불교권에서는 사성제가 진리이지만 기독교나 서양의 다른 사상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진리가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도 사이에 행해지고 있는 교의나 관행은 다른 세속제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본질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불어 공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예외 없이 부정되므로 전통적인 불교 교설이 부정되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불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나 철학, 가치체계나 상식(상식도 반성적, 철학적 사유를 깔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 진리이다)까지도 이 세속제에 포함된다. 다만 그것이 진정한 가치를 발하려면 공의 물줄기로 자신의 입장을 씻어내야 한다. 그래야만 보편의 장에서 각각의 특수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채 드러나기 때문이다.
공이 성립되는 사람에게는 일체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세속제를 공의 입장에서 순화시켜 그 가치를 인정해 준다. 그것이 중도(中道)이다. 아베 마사오는 이것을 입장없는 입장(positionless position)이라고 한다. 중도를 다른 말로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다고 하여 부주이제(不住二際)라 한다. 생사〔세속제〕를 떠나 있으면서 열반〔空〕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돌아와 생사의 세계〔세속제〕 속에서 자비를 펼친다. 그것이 진정한 보살의 이념이며 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물어본다. 불교의 진리도 다른 세속제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하면 불교 나름대로의 특징은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그에 대한 답변은 그렇한 공을 설하고 있는 것은 불교밖에 없기에 공에 의해서 도달된 불교의 교설은 다른 교설과 동일 수는 없는 뛰어난 사상이라고 한다.
공의 철학과 현대의 서양철학
용수의 이러한 공의 철학은 현대의 서양철학에 비추어 보았을 때 주체나 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의 입장과 어느 정도 궤를 같이한다. 그는 모든 것을 허구이거나 가상이라고 보고 모든 것이 가상일 경우, 최종적으로 그 가상마저 가상으로 부정되어 모든 것은 참으로 인정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니체는 말한다. ""아무것도 참인 것이 없다. 일체가 인정된다"" 이렇게 그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부정하여 신에 의해서 박탈된 생과 자연성을 회복한다.
하이데거(Heidegger, M. 1884 - 1974)는 여기서 한 발 앞서나가 존재 자체를 무(無) 또는 공(空)이라 본다. 존재는 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의 형이상학은 존재를 유(Sein)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서양철학사를 존재 망각의 역사라 규정지으며 기존의 형이상학에 대한 거부를 분명히 밝힌다.
이러한 니체와 하이데거의 뒤를 잊는 현대의 포스터모더니즘은 바로 주체와 자아, 이성, 신의 해체와 맞물려 있다. 지금까지 서양 세계는 아니 그러한 서양을 일방적으로 쫓아가려 하는 인류는 너무나 신·자아·인간·이성"중심주의"에 매달려 왔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을 서양의 기독교적 신관(神觀)에 입각하여 해석하는 서양 절대주의, 하나님 절대주의로 치달아 왔으며, 이기적인 에고이스트들만 키워온 경향이 적지 않다. 인간 중심적 가치판단으로 동물학대와 자연파괴를 조장한 결과 그것이 오히려 인류를 파멸의 길로 인도하고 있으며, 이성 중심에 매몰되다보니 기계적인 매마른 풍토를 조성해 놓고야 말았다.
이제는 그러한 중심에서 이동할 때다. 중심에서 주변으로,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잘난 곳에서 못난 곳으로 우리의 중심을 해체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중심의 해체를 통해 일상적 세속으로의 철저한 복귀를 선언하는 용수보살의 "공의 철학"은 인류의 미래에 "희망"을 던져줄 것이다. (출처 : 죽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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