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보살(龍樹菩薩) 과 중관론(中觀論)
용수(龍樹 : Nagarjuna)
그는 대승불교의 모든 학파에서 제2의 부처님으로 추앙될 만큼 불교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로서 공(空)의 논리를 체계화한 중관파(中觀派)의 시조다. 인도의 대승불교를 연구하여 그 기초를 확립하여 놓아 대승불교를 크게 선양하였다. 인도 제14조이며 空宗의 시조이다.
여러 가지 역사적인 고증으로 보건대 그는 남인도 출신의 총명한 브라만이었다. 남인도 사타바나 왕조의 왕이었던 '가우타미푸트라 샤타가르니'가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것을 보면 그는 기원후 2세기 후반과 3세기 전반 사이(A.D.약 150~250)의 인물로 추정된다.
그렇게 믿을 것이 못되는 구마라집의 [용수보살전]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일찍이 4베다, 천문, 지리 등 모든 학문에 능통하였다. 천성이 총명한 브라만으로서 세명의 친구를 두었는데 이들은 인생의 향락은 정욕을 만족하는데 있다 하고 이성에 대한 욕망과 쾌락을 추구한 나머지 몸을 숨기는 둔갑술로 왕궁에 들어가 궁중의 미녀들을 모두 범해 임신시키는 일까지 벌였다. 그들의 소행임을 눈치챈 왕은 군사를 부려 땅위에 모래를 뿌리게 한 다음 그들의 발자국이 모래위에 새겨지자 창칼로 그 주변의 공중을 찔러대 세 명의 친구는 그 자리에서 피 흘리며 죽어갔고 용수 자신만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이 사건을 통해 용수는 욕락은 괴로움의 근본이 되는 것을 깨닫고 절에 가서 가비마라에게서 소승3藏을 배우다가 만족하지 못하여 설산지방으로 갔다.
거기서 늙은 비구를 만나 대승경전을 공부하고 후에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대승경전을 구하여 깊은 뜻을 잘 통달하였다. 용수는 또 용궁에 들어가 화엄경을 가져 왔다고 하며, 남천축의 철탑을 열고 금강정경을 얻었다 한다.
중관파(中觀派)
인도대승불교의 한 학파인데 이것을 일으킨 시조는 용수(龍樹:Nāgārjuna)보살입니다. 그의 생존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150~250년으로 추정합니다. 그는 남인도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인도 고대종교인 바라문교의 베다경전을 학습하였으며, 어려서부터 그 학식이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장하여 육신의 욕망을 탐닉하다가 고난을 당하자 그것이 고통스런 불행임을 깨닫고, 어느 산 위에 있는 불교의 탑을 찾아가 계율을 받고 출가하였습니다. 출가한 뒤에 먼저 소승불교를 배우고 다시 더 깊은 뜻을 담은 경전을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많은 대승경전을 얻어 심오한 대승불교의 진리를 깨우쳤습니다. 그리하여 남은 생애 동안 대승불교사상을 전파하며 부처님의 근본 뜻을 선양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용수보살이 활약할 무렵, 인도의 사상계는 밖으로 실재론적(實在論的)인 이론으로 무장된 수론(數論), 승론(勝論), 정리파(正理派) 등 여러 철학이 흥기하였으며, 안으로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비롯하여 독자부(犢子部) 등 소승불교의 여러 부파가 또한 실유론적(實有論的)인 이론에 치우쳤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외도(外道) 및 소승불교의 실유론적인 견해를 척파하고, 부처님이 설한 진실한 법인 중도(中道)를 선양하기 위하여 반야경(般若經)의 공사상(空思想)에 입각한 중도사상을 주장하였습니다. 용수보살의 대표적 저술인 중론(中論)의 귀경게(歸敬偈)에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去]”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이것은 열반(涅槃)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것인데 열반은 원래 생(生)하는 것도 멸(滅)하는 것도 아니므로 연기하여 생한 일체의 모든 법은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는 것으로서 어떠한 자성(自性)이 있지 않은 공(空)임을 표명한 것입니다. 이 여덟 가지 부정, 즉 팔불(八不)은 중생들의 수많은 미혹된 견해를 대표하는 생(生), 멸(滅), 단(斷), 상(常), 일(一), 이(異), 래(來), 거(去)의 여덟 가지 견해를 부정한 것으로서 외도들의 사견(邪見)과 불교 내의 유부(有部) 등의 유견(有見)을 척파한 것입니다. 즉 일체 존재가 저절로 생긴 것이라거나, 어떤 절대자로부터 파생한 것이라거나, 또는 미세한 물질들이 화합하여 생긴 것이라는 등, 중생들이 여러 삿된 견해에 빠져 바른 법을 보지 못하므로, 용수보살이 이러한 편견을 타파하기 위하여 팔불설(八不說)을 주로 한 '중론(中論)'을 지어 공사상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가 주장한 공(空)은 단순히 모든 것을 부정하는 허무주의도 아니고, 도피와 체념에 사로잡힌 회의주의도 아니며, 결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무(無)도 아닙니다. 그의 공사상의 근저에는 어디까지나 연기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곧 연기하여 생겨나는 일체의 법은 고유한 본성 즉 자성이 없으며, 고정적인 자성이 없으므로 공하다고 설한 것입니다.
중론에서 설하는 제일의제(第一義諦)와 세속제(世俗諦)의 내용은 이 뜻을 잘 설명합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일체가 공하며 이러한 견지에서 제법을 관하는 것이 제일의제입니다. 그러나 제법이 비록 공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적으로 연기하여 상대적인 세계가 성립하기도 하니 이 같은 세간의 입장이 곧 세속제입니다. 중론에서는 제일의제는 세속제에 의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고, 또 이 이제(二諦)의 도리를 잘 파악하지 못하면 깊은 불법의 뜻을 알지 못한다고 설하여, 공이 결코 단순한 무(無)가 아님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는 이와 같이 공사상에 근거하여 그 당시의 잘못된 사상계를 비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불교의 근본진리인 중도를 천명하였습니다. 곧 ‘여러 인연으로 생한 법[衆因緣生法]이 곧 공(空)이며 또한 가명(仮名)이며 또한 중도(中道)’라고 설하여 중도의 뜻을 간명하게 정의하였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세 가지 진리인 공(空), 가(仮), 중(中)의 삼제(三諦)는 후대 불교사상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이 삼제게(三諦偈)의 내용을 깊이 수용한 중국불교의 천태종(天台宗)에서는 이것을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로 파악하여 천태종 특유의 원융삼제(圓融三諦)를 주장하게 됩니다.
용수보살은 중론을 비롯하여 십이문론(十二門論), 회쟁론(廻諍論), 육십송여리론(六十頌如理論), 보행왕정론(寶行王政論) 등과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의 주석서인 대지도론(大智度論) 그리고 기타 여러 저술을 남겼는데, 그 저술 대부분의 중점은 바로 공사상의 천명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외도와 소승불교를 타파하고 대승불교를 크게 중흥시켰으므로 불교계에서는 용수보살을 부처님 이래로 제일이며 대승불교의 선구자요 최대의 공로자로 추앙합니다.
그의 입멸 후 그의 사상은 제자인 제바(提婆)보살에 계승되고, 마침내는 인도에서만 수많은 뛰어난 학승을 배출하게 되어 중관파라는 학파를 형성하여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할 때까지 지속적인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8세기에 활약한 적호(寂護)논사는 용수보살 이후 최대의 사상가라고도 지적되는데, 그는 당시까지 지속되어 오던 부파불교의 교리와 유식설 등의 사상을 중관사상에 서서 비판하고 흡수하여 유가행중관파(瑜伽行中觀派)라고 불리는 후기 중관파의 사상적 체계를 수립하였습니다. 그의 사상은 인도에서 계승된 것은 물론, 티베트에도 전해져서 티베트불교가 중관학에 기울어지게 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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