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부처님의 일생
불교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우주의 진리를 깨우치고 이를 전파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였다. 불교의 교조(敎祖)이신 석가모니부처님이 이 세상에 살았던 생애는 80년에 불과하지만 그가 끼친 영향은 이 우주를 덮고 있으며, 세월이 지날수록 그 향기를 더하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을 부르는 명호는 여러 가지다 있다. 한국과 중국, 일본 등지에서는「석존(釋尊)」「세존(世尊)」「석가모니부처(Sakyamuni-Buddha)님」등으로 부르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는 일반적으로 붓다(Buddha)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이란 뜻은 석가족의 성자(聖者)로서 깨달음을 얻은 분이라는 의미이다. 석가는 석가족(Sakya族)을 뜻하고, 모니는 무니(muni)의 음역으로 성자(聖者)라는 의미이며, 부처는 붓다(Buddha)의 음역으로 완전히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석존은 석가족의 존자라는 의미이고, 세존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스러운 분이라는 뜻이다.
출생과 성장
석가모니부처님은 샤카족(Sakya족)출신이며, 샤카족은 일반적으로 불교문화가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3천 5백 여 년 전에 서북인도 방면에서 침입해 와서 인도의 지배 족이 된 아리아족(Arya족)이 아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샤카족은 히말라야 남쪽 산기슭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카필라」라는 조그마한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이 왕국은 고타마(Gotama)라는 성을 가진 숫도다나(Gotama Suddhodana)가 다스리고 있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BC 624년 음력 4월 8일에 숫도다나를 아버지로 하고, 마야(Maya)를 어머니로 두고 태어났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연도와 입멸한 연도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불교계에서는 BC 624년(혹은 623)에 오셨다가 BC 544년(혹은 543)에 입멸하신 것으로 보고 있다. 불교의 기원이란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불기(佛紀)는 BC 544(혹은 543)년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태어나신 연도 보다는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에 드신 시점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는 것은 인도인의 역사관 때문이다. 인도에는 역사가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인도인들은 전통적으로 세속적인 일은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는 성격이라는 의미다. 그들은 영원한 우주의 진리를 중요시 하였지 윤회하는 한 과정 속에 있는 인간의 존재를 중요시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개인에 관한 기록이 없다시피 하다. 그나마 석가모니부처님에 관한 역사적 기록이 현재만큼 존재하는 것은 인도 역사에서 석가모니부처님과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느 날 마야 왕비는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가 왕비의 오른 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도솔천(tusita, 天)에 계시다가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코끼리를 타고 인간 세계로 내려오신 것이다. 도솔천은 선행을 하여 공덕을 쌓은 사람이 죽은 후에 태어나는 안락한 하늘나라[천당, 天堂]의 하나이다. 현재는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때를 기다리는 곳이다.
산달이 되어 왕비는 친정인 콜리성으로 떠났다. 당시 풍속에는 여자는 친정에서 해산을 하였다. 마야왕비가 친정으로 가는 도중 룸비니(Lumbini) 동산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산기를 느껴, 무우수(無憂樹) 나무 아래에 휘장을 처 급히 산실을 마련하고 왕자를 낳았다. 그가 후에 인류를 고통의 바다에서 구제해 주는 길을 열어주신 석가모니부처님 이시다. 왕자는 태어나자마자 오른손은 하늘을 향하여 높이 들고 왼손은 땅을 향하고서 좌우로 일곱 발자국을 옮기고 나서「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외쳤다.
이 뜻을 두고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온 세상이 모두 괴로움에 잠겨 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하게 하리라」이고, 다른 하나는「우리 스스로 노력 여하에 따라 최고의 진리를 깨닫고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이다. 나 홀로 존귀하다는 것은 비록 석가모니부처님 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나’의 주체는 석가모니부처님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을 가진 모든 중생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인간의 존엄성을 선언한 것이다.
아버지 숫도다나는 왕자가 ‘모든 일이 뜻한 대로 다 이루어지라’는 뜻에서 이름을「싯다르타(Siddhartha, Siddhattha)」라고 지었다. 그러나 이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왕자를 낳은 마야왕비가 출산 칠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왕비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당시의 풍속에 의하여 왕비의 동생인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가 어린 싯다르타를 생육하였다.
어느 날 아시타 라는 선인(仙人)이 카필라성으로 찾아왔다. 아시타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조부 때부터 궁중 사제를 지내며 석가족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신통력을 갖춘 현자였으며, 숫도다나왕이 열반한 후 은둔생활을 하였다. 싯다르타의 얼굴을 본 그는「싯다르타는 뛰어난 이인의 상을 갖추고 있습니다. 만약 왕위에 오르면 무력을 쓰지 않고 전 세계를 통합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고, 출가하여 수행하면 반드시 부처님이 되어 모든 중생을 구제해 줄 것입니다.」하고 예언을 하였다.
싯다르타는 어려서부터 깊은 사색에 잠기기를 좋아하였고, 서로 먹고 먹히는 자연계의 먹이 사슬에 대해 회의심을 갖게 되었다. 늙어서 지팡이에 겨우 몸을 의지하고 힘들게 걷는 노인을 보고「저 사람은 왜 저렇게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는가?」하고 회의심을 갖고, 길가에 누더기를 입고 쓸어져 신음하는 병든 사람을 보고는「저 사람은 왜 병에 걸려 고통을 받아야 할까? 늙음의 고통이나 질병의 고통은 왜 생기는 것일까?」하는 문제를 놓고 싯다르타의 마음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시체를 앞세우고 슬피 울며 지나가는 행렬을 바라 본 싯다르타는 자기 자신이 죽음에 닿은 것 같이 가슴이 내려 앉았다. 싯다르타는 지금 자기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죽음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날부터 그는 혼자 있는 시간이 더욱 많아졌다. 숫도다나왕은 늘 깊은 명상에 잠겨 얼굴빛이 어두운 싯다르타를 보고 ‘혹 출가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앞서 많은 신경을 썼다. 싯다르타의 나이가 열아홉 살이 되자 결혼 시켰다. 그의 부인은 같은 샤카족이며 대신의 딸인 야쇼다라(Yasodhara)이다. 싯다르타는 결혼한 후에도 늘 변함없이 실존적(實存的) 고뇌를 가지고 깊은 사색에 잠기거나 침울한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았다.
싯다르타의 마음이 이와 같이 감각적 쾌락을 떠났음을 알아차린 브라흐민의 아들인 우다인은 싯다르타에게
“이 세상에서 감각적 쾌락과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하고 충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싯다르타는 목소리를 높여,
“그대는 나를 잘못 알고 있다. 내가 감각적 쾌락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며, 즐겁게 사는 것이 자연적 현상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이 덧없다고 생각하면 내 마음은 그 속에서 즐겁지가 않구나. 만약 늙음과 죽음과 병듦이 없다면 나도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즐길 것이다. 만약 여인의 아름다움이 변하지 않는다면 내 마음은 열정에 집착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아름다움이 늙음으로 시들어 갈 때 받아들이기가 어렵구나. 그런 아름다움 속에서 기뻐한다는 것은 어리석음일 뿐이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알기 때문에 그 속에서 만족이나 평화, 기쁨을 얻을 수 없다.”라고 일갈(一喝)하였다.
싯다르타의 나이가 어느덧 스물아홉 살이 되었다. 야쇼다라와 결혼한 지도 벌써 십년이 되었다. 그 동안 아들 라훌라(Rahula)를 낳았다. 그러나 싯다르타의 마음속 깊이에는 태어남과 늙음, 병들고 죽어가는 고통의 속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만이 깊어 갔다.
고심 중에「그렇다! 출가 사문의 길을 찾아 나서자」하고 결심 하였다. 싯다르타는 아버지 숫도다나왕에게 출가를 허락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숫도다나왕은 완강히 부인하였다. 싯다르타는
“내 목숨이 죽지 않는다면, 내가 질병으로 건강을 해치지 않는다면, 늙음이 나의 젊음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나는 출가하지 않겠습니다.”하고 말씀 드렸다. 그런데도 숫도다나왕은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싯다르타는
“이 네 가지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불타는 집을 떠나려는 사람을 붙잡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서로 이별한다는 것은 분명한 이치이오니 가르침을 위하여 떠나는 것이 다른 헤어짐보다 훨씬 더 났습니다. 그러니 저의 목표를 이루지 않고는 저에게 만족은 없습니다.”하고 출가의 결심을 말씀드렸다. 그날 밤 모두가 잠들은 사이에어머니 마하파자파티와 아내 야쇼다라에게는 알리지 않고 카필라성의 성문을 나서 수행자의 길을 걸었다. 이 때가 싯다르타 나이 스물아홉 되는 해 음력 2월 8일이다. 싯다르타는 따르는 시종 찬다까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던 패물을 건네주면서「이것을 이모님과 야쇼다라에게 전하여라. 그리고 내가 출가사문이 된 것은 세속을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혜(智慧)와 자비(慈悲)의 길을 얻기 위해서라고 전하여 다오」하고는 홀로 구도자의 길을 떠났다.
석가모니부처님의 가족관계는 정반왕인 아버지 숫도다나(Suddhodana), 어머니 마야(Maya), 이모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 아들 라훌라(Rahula), 부인 야쇼다라(Yasodhara), 아난다(Ananda), 아난다는 25년간 항상 곁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의 시중을 들었다. 사촌동생 데바닷타(Devadatta). 데바닷타는 석가모니부처님께 반역하였으며, 교단의 분열을 꾀하는 등 석가모니부처님에게 많은 괴로움을 끼친 사람으로 전하여 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의견도 있다. 같은 샤캬족인 이발사 우팔리(Upali), 우팔리는 후에 계율에 통달하였다.
구도(求道)의 길
구도의 길을 찾아 출가한 싯다르타는 가까운 숲에 들어가 마음을 집중하는 명상을 시작했다. 한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면서 명상을 계속했다. 그러나 세속의 번거로운 기억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우주의 진리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고 굳게 결심을 하였다. 여러 가지 생각 끝에 싯다르타는 혼자서 진리를 구하는 것보다 수행의 힘이 뛰어난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 진리 탐구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천상(天上)에 태어나기 위하여 고행을 하는 박가바 라는 선인을 찾아갔다. 박가바는 당시 많은 수행자들이 그러하듯이 혹독한 고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그가 단순히 자기 하나만이 천상에 태어나기 위하여 수행하는 것을 알고는 ‘어떤 보상을 바라고 고행을 한다면 괴로움은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그의 곁을 떠났다.
싯다르타는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여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왕사성, 王舍城)에 이르러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를 찾았다. 알라라는 마음의 작용이 정지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에 이르는 수행을 가르쳐 주었다. 싯다르타는 밤낮 정진하여 마침내 알라라가 가르쳐 준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알라라 깔라마는 자아(自我, atman)는 영원하다고 말하였다. 무지와 업과 욕망을 버리면 윤회에서 벗어난다고 하였는데 자아도 버려야 할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알라라 깔라마의 가르침에도 한계가 있음을 알아차리고서 이보다 더 높은 경지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다시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웃다카 라마풋타(Uddaka Ramaputta)라는 수행자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는 ‘상념(想念)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관(觀)하는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이상으로 삼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이 경지에도 쉽게 도달하였다. 싯다르타는
‘웃다카 라마풋타도 역시 자아에 집착 돼있구나 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면 설령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다 하여도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싯다르타는 자기가 출가한 궁극의 목적이 여기에 있지 않음을 알고는 또 다시 이곳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싯다르타는 세 명의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나 자기가 바라는 경지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고 깊은 명상 끝에 얻은 결과 「진정한 스승은 나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는 홀로 고행의 길을 찾아 나섰다. 싯다르타는 우선 홀로 머물러 명상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나섰다. 라자가하 서남쪽의 가야(Gaya) 교외에 있는 우루벨라(Uruvela)의 세나(Sena) 마을에 있는 숲이 마음에 들었다. 그 곳에는 훌륭한 숲이 있고 쾌적하고 완만하며 맑은 물이 흐르는 강이 있다. 또 가까이에서 탁발할 수 있어 명상을 하기에 적절한 곳 이다. 더구나 이곳은 네란자라(Neranjara)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여 수행의 장소로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여기를 명상의 장소로 정하였다.
성 도(成道)
싯다르타는 결심하였다.「사문들 중에는 마음과 몸을 쾌락에 맡기고 탐욕과 집착에 얽힌 채 겉으로만 고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젖은 나무에 불을 붙이려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몸과 마음이 탐욕과 집착을 떠나 고요히 자리 잡고 있어야 그 고행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이를 수 있으리라」이와 같이 고행에 대해 근본적인 태도를 확실히 하고 나서 혹독한 고행수행에 들어갔다. 싯다르타의 고행은 다른 사람이 감히 따를 수 없을 만큼 혹독했다. 하루에 곡식 몇 알과 물 한 컵으로 연명하면서 수행에 정진하였다. 그의 몸은 뼈만 남아 앙상한 몰골로 변해갔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이 정상이 아닌 성 싶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아직도 번뇌를 끊지 못했으며, 삶과 죽음을 뛰어 넘지도 못했다. 그의 고행은 계속되었다. 그가 고행을 하는 목적은 육신의 번뇌와 망상, 욕망을 여의어 영원히 평온한 마음인 열반을 얻고자 함이다. 깨닫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거듭 다짐하면서 고행을 계속하였다.
그는 이따금 모든 번뇌와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의 삼매경에 들어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으나, 삼매는 곳 흩어지고 현실의 고뇌가 파고들었다. 고행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오년이 되었다. 혹독한 고행을 계속해 보았지만 자기가 바라던 최고의 경지인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다. 싯다르타는 문득 지금까지 자기가 해온 고행에 대해 회의심이 일었다.
싯다르타는 육체를 괴롭히는 일은 오히려 육체에 집착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육체를 괴롭히기 보다는 육체를 맑게 가짐으로서 마음의 고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동안 싯다르타는 수행의 방법에만 집착한 나머지 형식에 빠져 마음을 고요하고 깨끗하게 가지는 일에는 소홀했다.
그는 고행과 단식을 중단했다. 지친 몸을 회복하기 위하여 네란자라 강가로 내려가 맑은 물에 몸을 씻었다. 그 때 마침 강가에서 우유를 짜고 있던 수자타(Sujata)라는 소녀에게서 우유 한 그릇을 얻어 마셨다. 이때 함께 수행하던 다섯 명의 비구들은 싯다르타가 고행을 포기하고 음식물을 취한다고 비난하면서 모두 떠났다. 싯다르타는 우유를 마시고 나니 몸에 새로운 기운이 돋고 마음이 맑아졌다. 싯다르타는 가벼운 몸과 맑은 정신으로 혼자서 숲 속에 들어가 아사타(Assatta)나무(무화과나무의 일종) 아래에 앉았다. 아사타 나무는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후에 보리수라고 부르게 되었다. 네란자라 강이 시원스럽게 보이고 고요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니 마음이 한결 평온하다. 싯다르타는「이곳에서 육신이 다 녹아 없어져도 좋다. 우주와 생명의 실상(實相)을 깨닫기 전에는 결코 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리라」하고 마음을 단단히 다짐하였다.
그는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깊은 명상에 잠겨 우주의 실상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 늙음과 죽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는 진리를 온전히 꿰뚫어 사유한 후에 그것은 태어나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였다.
⒝ 그러면 태어남은 어데서 오는가? 그것은 업(業)의 결과인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원인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 존재는 어데서 오는가? 집착에서 온다.
⒟ 집착은 어데서 오는가? 갈애(渴愛)에서 온다.
⒠ 갈애는 어데서 오는가? 느낌에서 온다.
⒡ 느낌은 어데서 오는가? 접촉에서 온다.
⒢ 접촉은 어데서 오는가?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온다.
⒣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어데서 오는가? 이름과 모양에서 온다.
⒤ 이름과 모양은 어데서 오는가? 의식작용에서 온다.
⒥ 의식작용은 어데서 오는가? 형성에서 온다.
⒦ 형성은 어데서 오는가? 어리석음에서 온다.
⒧ 어리석음은 모든 것의 원인이 된다.
이어서 이러한 진리를 거꾸로 관찰 하였다.
⒜ 어리석음[無明]에서 형성[行]이 생기고,
⒝ 형성에서 의식[識]이 생기며,
⒞ 의식에서 모양[名色]이 생기고,
⒟ 모양에서 여섯 가지 감각기관[6處]이 생시며,
⒠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접촉[觸]이 생긴다.
⒡ 접촉에서 느낌[受]이 생기고,
⒢ 느낌에서 갈애[愛]가 생기며,
⒣ 갈애에서 집착[取]이 생기고,
⒤ 집착에서 존재[有]가 생긴다.
⒥ 존재에서 태어남[生]이 생기며,
⒦ 태어남에서 늙고 죽음[老・死]이 생긴다.
싯다르타는 이와 같이 최상의 지혜와 통찰력으로 우주의 실상을 관찰하였다.
그는 어디에서도 영원한 자아[atman]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팔정도(8正道)의 최상의 통찰력으로 그의 마음을 고요함과 평온함으로 가득 찼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인연이 있어 생기고 저절로 생기는 것이 없으며, 인연을 다 하면 사라지고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와 같이 존재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어느 것이고 영원하고 고정된 실체가 없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무상(無常)하게 인연에 의하여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였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하여 생겨나 잠간 존재했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연기생멸(緣起生滅)의 실상을 깨달았다.
마침내 주위는 신비로우며 고요한데 샛별이 하나 둘 돋기 시작한다.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는 문득 마음이 형언(形言)할 수 없는 희열(喜悅)로 넘치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모든 이치가 밝게 드러났다. 태어나고 죽는 일까지도 환히 깨닫게 되었다. 욕망의 제어로 온갖 고뇌가 자취도 없이 풀렸다. 우주가 곧 나 자신이고 나 스스로가 우주임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과 우주의 배후에 있는 참다운 존재는 바로 ‘나의 마음’임을 알게 되었으며, 명상을 통하여 체험으로 인간을 초월한 진리를 깨달았다.
이때 네란자라강 저 너머에서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마침내 싯다르타는 해탈(解脫)을 얻었다.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깨달음을 얻어 Buddha가 되었다. 이 때가 서른다섯 살이 되는 해의 음력 12월 8일이다. 이날을 성도일 이라고 한다. 깨달은 사람, 곧 부처가 된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구할 필요가 없었다. 부처인 석가모니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결가부좌 하고 7일 동안 해탈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율장』에『그때 석가모니부처님은 깨달음을 완성하여 우루벨라 네란자라강 근처 보리수 아래에 있었다. 그리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결가부좌한 채로 7일 동안 해탈의 기쁨을 누리며 앉아 있었다.』라고 하였다.
그런 석가모니부처님에게 고민이 생겼다. 자기가 깨달은 진리를 널리 펴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데 일반 중생이 그의 심오한 깨달음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또 어떠한 방법으로 그들을 교화할 수 있을까를 놓고 고심하였다. 망설이고 있는 석가모니부처님에게 브라흐마(Brahma, 梵天)가 나타나 설법하기를 권청하였다. 드디어 그는 많은 사람이 겪는 고통이 곧 자기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우주의 진리를 밑바닥까지 들여다 본 부처님의 자비(慈悲)였다. 그는 이제부터 중생을 구제하는 길로 나아가기로 뜻을 세웠다. 자비(慈悲, maitri-karuna)는 고통을 없애주고,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은 어떤 내용인가를 놓고 여러 설이 있다. 먼저, 사성제(四聖諦), 12연기(緣起)와 같은 법리(法理)라는 설이 있고, 두 번째는 4념처(4念處), 4정근(4正勤), 4여의족(4如意足), 5근(5根), 5력(5力), 7각지(7覺支), 8정도(8正道)와 같은 수행도의 완성에 의했다고 하는 설이 있으며, 세 번째는 5온(5蘊), 12처(12處), 4계(4界)와 같은 제법(諸法)의 여실(如實)한 관찰에 의했다고 하는 설이 있다. 끝으로 4선(4禪), 3명(3明)의 체득에 의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
여러 설이 전해지는 이유는 석가모니부처님은 깨달음의 내용을 특정한 교설로 고정시켜서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상대방의 교육수준이나 신분 등에 맞도록 방법을 달리하여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 한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깨달음은 인연(因緣). 연기(緣起)였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명상에 의하여 6근(6根), 12처(12處), 18계(18界)를 관찰하여 감각기관(6근)을 통제하여 욕망을 제어함으로서 집착에서 벗어나고 마음을 다스리는 진리였을 것으로 생각하며, 4성제(4聖諦)가 그 다음 이었을 것으로 본다.
삼보(三寶)의 성립
석가모니부처님은 먼저 누구에게 설법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래도 깨달음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마음의 눈에 먼지가 적은 사람이어야 함을 알고 그가 처음 찾았던 알라라와 웃다카를 적임자로 생각했으나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한 사람이 네란자라 강가에서 한 때 함께 수행을 했던 다섯 사문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석가모니부처님은 그들이 고행하고 있는 바라나시(Baranasi)에 있는 녹야원(鹿野園)을 찾았다. 바라나시는 당시 인도에서 가장 오래되고 번창한 도시였다. 여기는 상업, 문화, 종교의 중심지였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전도하기로 결의한 후 네란자라 강가에서 400km나 떨어진 바라나시로 간 것은 사상과 문화의 중심지에서 자신의 깨달음을 대중에게 펴고자 했던 의지가 담겨 있었다고 할 것이다.
다섯 사문은 처음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경계하고 멸시하였으나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은 자의 모습을 보이므로 자리를 마련하고 공손히 맞이하면서 “벗이여”하고 불렀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엄숙하게 말씀하셨다.「비구들이여! 이제부터는 내 이름을 고타마 싯다르타라고 부르지 마라. 나를 여래(如來)라고 불러라. 나는 이제 여래가 되었다. 여래는 아라한이며, 바르고 온전히 깨달으신 분이다. 나는 불사의 경지를 성취하였다. 내가 가르치리라. 그대들에게 달마(dharma, 법)를 가르치겠다. 내가 가르친 대로 실천한다면, 그대들은 오래지 않아 청정한 삶의 최고의 지혜를 스스로 깨달아 성취할 것이다.
여래란 진리의 세계에 도달한 사람이란 뜻도 있고, 진리의 세계에서 설법하러 우리의 세계에 오신 분이라는 뜻도 된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이들 다섯 사문들에게 최초로 설법을 하였다. 이를 초전법륜(初轉法輪) 이라고 한다. 먼저「수행의 길을 걷고 있는 사문들은 감각적 쾌락에 몰두하여 육체의 요구대로 맡기는 쾌락주의와 육체를 지나치게 학대하는 자세를 버리고 중도(中途)의 길을 가야 한다.」고 설하셨다.
석가모니부처님은 계속해서 설법을 하셨다.「그렇다면 중도란 무엇인가? 중도는 여덟 가지로 되어있다. 바른 견해(正見), 바른 생각(正思),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관찰(正念), 바른 선정(正定)이다.」바로 8정도(8正道)를 설하셨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이어서 고(苦), 집(執), 멸(滅), 도(道)의 4성제(4聖諦)를 설하셨다.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다음과 같다(고성제, 苦聖諦)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괴로움이며, 싫은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며,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 괴로움이며, 오성이 치성한 것이 괴로움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집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가 괴로움이다.
괴로움의 근원의 거룩한 진리는 다음과 같다(집성제, 集聖諦). 갈애는 쾌락과 욕망을 수반하여 여기저기 쾌락을 찾아 헤매고, 윤회로 이끈다. 갈애에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다시 태어남에 대한 갈애, 다시는 태어나지 않겠다는 갈애가 있다.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다음과 같다(멸성제, 滅聖諦).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하고 포기하고 버려서 더 이상 갈애에 집착하지 않고 갈애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는 다음과 같다(도성제, 道聖諦). 이 길은 여덟 가지 바른 길이다(8정도).」
이어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무아와 무상의 가르침을 주셨다.
「육신은 무아(無我)이다. 만약 육신이 영원한 자아가 있다면 몸이 병들지도 않을 것이고, 육신에게 ‘이렇게 되라, 되지 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육신은 무아이기 때문에 병들게 되고, 이래라저래라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몸이 무아인 것처럼 느낌, 지각, 형성, 의식 등이 자아가 없는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육신은 무상한가, 영원한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즐거운 것인가? 괴로운 것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수시로 변하는 것을 두고 ‘이것이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 이것은 나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가?”
“합당하지 않습니다.”
“느낌은, 지각은, 형성과 의식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수시로 변하는 것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 이것은 나이다’하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육신,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은 ‘나의 것이 아니며, 내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하고 바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몸과 느낌과 지각, 형성, 의식(5온을 말함)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 해탈할 수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던 다섯 사문들 중 콘단냐(Kondanna)가 제일 먼저 집착에서 벗어나 번뇌를 여의고 깨달음을 얻어 최초의 제자가 되었고, 이어서 나머지 네 명도 깨달음을 얻어 제자가 되었다. 그들은 석가모니부처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해서 석가모니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치심인 법, 그리고 다섯 명의 아라한이 탄생하여 불・법・승의 삼보(三寶)를 갖추게 되었다.
어느 날 석가모니부처님이 강가에서 경행(걷는 명상)을 하고 계시다가 한 청년이 고성을 지르며 괴로워 날뛰는 것을 목격하였다. 베나레스에 사는 장자의 야사(Yasa)라는 이 청년은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보시, 도덕적 습관, 감각적 쾌락에 따른 재난과 위험, 또 이것들을 놓았을 때의 이익에 관하여 설법을 듣고, 마지막으로 인생의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출가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야사의 소식을 듣고 야사의 아버지가 석가모니부처님을 찾아왔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야사의 아버지에게 먼저 삼보에 귀의하게 하고 나서
“내가 말하는 바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하셨다. 야사의 아버지는
“신명을 다 바쳐 지키겠습니다.”한다. 이 때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첫째, 생명을 존중해야 합니다. 둘째, 남이 주지 않는 것을 가져서는 아니 됩니다. 셋째, 항상 바른 말만을 해야 합니다. 넷째, 남의 여자를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다섯 번째, 술을 마셔서는 아니 됩니다.”하고 재가 5계를 설하셨다. 야사의 아버지는 이를 지킬 것을 약속하였기에 최초의 재가 신자가 되었다. 그 후 야사의 친구들이 부처님께 귀의하여 재가신자(在家信者)가 되었다.
야사가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네 명의 가까운 친구들이 그의 뒤를 이어 출가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아라한이 되었으며, 뒤이어 50명의 야사 친구들이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부호집의 자식들 이였다. 이제는 이 세상에 아라한이 모두 61명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三寶)와 재가신도를 비롯한 교단이 형성되었으며 비구, 비구니, 우바새(남자 재가신자), 우바이(여자 재가신자)의 사부대중(四部大衆)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석가모니부처님은 하루도 쉬지 않고 북인도 전역을 다니면서 5온(5蘊)과 무아(無我)의 법을 설하셨다.
교화활동(敎化活動)
석가모니부처님이 설법할 때 마다 많은 사람이 출가하여 아라한이 된 자가 60여명에 이르렀으며, 재가 신자가 된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아라한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나는 인간을 얽어매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다. 그대들도 인간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이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나아가라. 그러나 같은 길을 두 사람이 함께 가지는 말아라. 한결같이 훌륭한 법문을 중생들에게 들려주고 언제나 깨끗한 수행자의 생활을 하여라. 이 세상에는 때가 덜 묻은 자도 많으니 그들이 법문을 들으면 곧 깨달아 아라한의 지위에 오를 것이다. 나도 또한 가르침을 설하기 위해서 우루벨라의 세나니 마을로 가야겠다.」하시고는 길을 떠나셨다.
많은 아라한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을 널리 세상에 펴서 중생을 괴로움으로부터 건지는 교화활동이 시작되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바라나시를 떠나 마가다로 갔다. 여기에서 불을 섬기는 사문인 카샤파 삼형제를 제도하여 제자가 되게 하였으며, 그를 따르는 일천 명의 무리도 함께 귀의 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일천 여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라자가하(왕사성)로 떠났다. 그곳에는 빔비사라왕이 기다리고 있었다. 빔비사라왕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감명을 받아 그 자리에서 신하들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 하였다. 그리고 그는 라자가하성 밖 숲 속에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지어 기증하였다. 이 정사는 석가모니부처님의 교단이 가지게 된 최초의 절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교단은 날로 번창해 갔다.
라자가하에는 당시 인도사회의 보편적 가치인 바라문과 이념을 달리하는 육사외도(六師外道)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인 산자야가 있었는데 그의 제자 중에 사리풋타(Sariputta, 舍利佛・사리불・)와 목갈라나(Moggallana,目健連・목건련・목련)를 만나 귀의하게 하여 후에 훌륭한 제자가 되었으며, 이들은 250명의 무리를 이끌고 함께 귀의하였다. 이렇게 해서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가 1,250명이 되었다. 이제까지 삼보를 갖춘 승단과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竹林精舍), 빔비사라왕의 후원과 상류계층의 훌륭한 가문의 자제들이 대거 출가하는 등 불교는 초기부터 그 기초를 튼튼히 다져나갔다.
이 무렵 수다타(Sudatta) 장자가 코살라국의 수도인 사위성 남쪽에 있는 코살라국의 왕자 제다(Jeta)가 소유하고 있는 동산을 매입하여 정사(절)을 지어 석가모니부처님께 봉헌하였다. 이 사원은 「기수급고독원」이라고도 하는데 집단 수행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갖춘 정사로 죽립정사와 함께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많은 기간동안 머무시면서 설법을 하신 곳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은 고향인 카필라성으로 향했다. 아버지 숫도다나왕과 모든 사람들이 그를 귀하게 대접하며 환영해 맞았다. 석가모니부처님은 그의 가족과 카필라성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설법을 하였다. 샤카족 청년들이 앞을 다투어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석가모니부처님에게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그를 키워주신 이모 마하파자파티 왕비가 낳은 동생 난다(Nanda)가 있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그를 교화하여 출가시켰다. 이어서 이제 열두 살이 된 아들 라훌라도 출가시켰다. 왕위를 이을 아들과 손자마저 출가시켜야 했던 숫도다나왕은 비통한 마음을 진정하고 석가모니부처님께「앞으로는 미성연자의 출가는 반드시 부모의 허락을 받은 후에 하도록」건의 하였으며, 석가모니부처님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때 이발사 우팔리도 출가하였는데 그는 후에 계율을 지키는데 제일인자가 되었다. 또 아난다와 데바닷타도 출가하였는데 아난다는 석가모니부처님의 곁을 떠나지 않고 25년 동안 그의 시봉을 들었다. 그러나 데바닷타는 부처님 교단에 반역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을 몹시 괴롭혔다고 전한다.
숫도다나왕이 세상을 떠났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카필라성 밖에 있는 니그로다 정사에 머무르고 계셨다. 이 때 마하파자파티 왕비가 찾아와 출가를 부탁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은 거절하고 카필라를 떠나 베살리로 가셔서 교외에 있는 마하바나 정사에서 대중들과 함께 머무르고 계셨다. 마하파자파티 왕비는 맨발에 노란 가사를 입고 많은 무리의 샤카족 여성들과 함께 이곳까지 찾아와서 출가를 간청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여러 번 거절하다가 아난다의 청이 있어서「출가한 사문은 청정한 계율을 닦고 세속의 애착을 떠나야 한다. 그런데 여인은 세속의 애착이 강하므로 도에 들어가기 어렵다. 그리고 여인이 출가하면 청정한 법이 이 세상에 오래 갈 수 없다. 그것은 잡초가 무성한 논밭에는 곡식이 자라지 못하는 것과 같다. 가정에 여인이 많고 사내가 적으면 도적이 들기 쉽듯이 이 교단에 여인이 출가하면 청정한 교법이 오래 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물을 넘치지 않게 하기 위해 둑을 쌓는 것과 같이 교단의 질서를 위해 따로 여덟 가지 제법(尼八敬戒)을 마련한다. 출가한 여인은 반드시 이 여덟 가지 계법을 지켜야 한다.」하시고는 비구보다 더욱 강화된 계율을 별도로 제정하여 이를 지킬 것을 조건으로 출가를 허락하였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비구보다는 비구니가 지켜야할 계율이 더욱 많다. 이렇게 해서 마하파자파티 왕비는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다.
석가모니부처님 제자 중에 지혜(智慧) 제일의 사리풋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옆에서 슬프게 우는 아난다를 보고「너희들은 내가 항상 하던 말을 잊었느냐? 가까운 사람과는 언젠가는 이별해야 하는 법이다. 세상에서 무상하지 않은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세월에 따라 변해간다.」 고 말씀하셨다. 사리풋타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목갈라나도 죽었다. 유능한 두 제자를 잃은 석가모니부처님은 「사리풋타와 목갈라나가 보이지 않는 모임은 어쩐지 텅 빈 것 만 같구나.」하시면서 서운한 생각을 감추지 못했다. 다만 슬픔에 집착하지 않을 뿐 이였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만년에 이르러 슬픈 일이 되풀이 되었다. 아버님의 죽음, 아끼던 두 제자의 죽음에 이어 카필라를 노려오던 코살라가 기어이 쳐들어 와서 정복하고 말았다.
열반(涅槃)
불교에서 죽음을 열반, 또는 입멸(入滅)이라고 한다. 열반은 깨달음을 의미하는데 살아서 깨달음에 이른 상태를 유여의열반(有餘衣涅槃)이라 하고, 완전한 열반, 즉 죽음의 상태를 무여의열반(無餘衣涅槃)이라고 한다. 특히 석가모니부처님의 열반을 반열반(般涅槃, 완전한 열반), 또는 대반열반(大般涅槃)으로 표현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의 나이도 어느덧 여든이 되었다. 노쇠한 몸을 이끌고 라자가하에서 갠지스강을 건너 밧지족의 서울인 베살리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우안거에 드셨다. 그해에는 인도 전역에 극심한 흉년이 들어 많은 수행자들이 한곳에 머물면서 밥을 빌기가 곤란했다. 그래서 석가모니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각자 흩어져서 지내도록 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아난다만을 데리고 벨루바 마을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곳에서 혹심한 더위에 병을 얻어 몹시 고생하였다. 어렵게 병에서 회복이 되어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었다. 이때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여래의 법에는 스승이 특별한 자에게만 전하는 은밀한 비전(秘傳)은 없다. 여래는 ‘나는 교단을 통솔한다.’ 거나, ‘교단은 나에게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자기를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 처로 삼아 남을 의지 처로 삼지마라. 법을 등불로 삼고, 법을 의지 처로 삼아 남을 의지 처로 삼지마라.」하고 소위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을 가르치셨다 .
우안거를 마치고 석가모니부처님은 베살리로 탁발을 나갔다. 이때 석가모니부처님이 아난다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약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일 겁(劫), 또는 그 이상 동안 수명을 연장할 수도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도 아난다는 잠시 악마에게 사로잡혀서 이를 듣고도 석가모니부처님께「그러시다면 석존이시여! 부디 일 겁 동안 이 세상에 머무르시어 중생을 제도하여 주시옵소서.」하고 간청을 드리지 못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같은 말을 두 번 더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아난다는 악마에게 사로잡혀 그렇게 하시기를 청원하지 못하고 흘러듣고 말았다. 아난다는 이 일로 인해서 후에 많은 공격을 받게 된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악마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나는 3개월 후에 입멸해야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입멸을 결심한 석가모니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베살리를 떠나면서 코끼리가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바라보는 것처럼 베살리를 뒤돌아보고 아쉬워하며 북쪽으로 길을 재촉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베살리를 떠나 말라국의 파바라는 마을에 이르셨다. 여기에서 대장장이 아들 춘다(Cunda)가 올리는 수카바 마다바(Sukava-maddava)공양을 드셨다. 이것이 석가모니부처님에게는 마지막 공양이 되었다. 이 음식을 드시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이질과 비슷한 병에 시달리시게 되었다. 매우 아픈 고통을 참으시면서 계속 여행을 하여 쿠시나가라(Kusinagara)에 도착하셨다. 교외의 숲 속으로 들어가신 석가모니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아난다, 나는 지금 몹시 피곤해 눕고 싶다. 사라(Sara)나무 아래에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 깔아다오. 나는 오늘 밤 여기에서 열반에 들겠다.」고 하시면서 두 그루의 사라나무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두시고,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시고는 두 발을 나란히 포개고 누우셨다. 그리고서는 비탄에 젖어 슬피 울고 있는 아난다에게 4대 성지와 입멸 후 장례방법, 그리고 탑 공양 등에 대하여 설명하셨다. 아난다는 슬픔을 참으면서 석가모니부처님께 열반에 드신 후에 그 몸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너희 출가 수행자는 여래의 장례 같은 것에 상관하지 마라. 너희는 오르지 진리를 위해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여래의 장례는 재가신도들이 알아서 치러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말라족 사람들이 슬퍼하면서 모여들었다. 이 때 수닷타라는 사람이 찾아와 석가모니부처님께 가르침을 청하였다. 아난다가 만류하였으나 석가모니부처님은 기력을 다하여 그에게 가르침을 주신 결과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 수닷타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최후의 제자가 되었다. 이와 같이 석가모니부처님은 수행자에게 아낌없이 그 법을 설하여 출가자에게는「자기의 완성」을 이루게 하고, 재가 신자에게는「평온한 생활」이 가능하도록 가르치심을 주셨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입멸한 후에 교단이 나아가야할 자세에 대하여 자세히 훈계를 하시고 나서 주위를 돌아보시면서「그 동안 내가 한 설법에 대하여 의심나는 점이 있거든 묻도록 하여라. 승단이나 계율에 대해서도 물을 것이 있으면 물어라.」하고 이르셨다. 제자들은 이미 성자의 경지에 이르렀을 뿐만이 아니라 최후를 맞이하시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안타까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수행자들이여! 이제 너희들에게 말하노라. 내가 지금까지 가르치고 규정한 법과 율이 내가 열반한 후에는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모든 현상[諸行]은 소멸해 가는 것이다. 게을리 하지 말고 노력하여라.」하고 마지막 말씀을 남기시고 편안히 열반에 드셨다.
이 때가 불교계의 문헌에 의하면 BC 544, 혹은 BC 543년 음력 2월 15일이다
다비(茶毘)는 입멸 7일 후에 치러졌다. 화장 후 유골은 마가다국의 아자타삿투 왕과 베살리의 릿차비족, 카필라밧투의 샤카족, 알라카파의 불리족, 라마촌의 콜리야족, 베타섬의 어떤 바라문, 파바시(市)의 말라족, 쿠시나라의 말라족 등이 서로 연고권을 주장하면서 부처님 유골을 자기들이 모시겠다고 나섰다. 이들은 석가모니부처님이 유랑을 하시면서 교화활동을 한 지역이 주로 갠지스강 유역이므로 그 지역에서 권력을 가진 종족과 세력가 들이다. 이들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때 나름대로 인연을 가진 관계로 일정한 연고권을 주장했던 것이다. 처음에 그들의 주장이 팽팽하여 사리를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때 도나 라는 바라문이 와서 여덟 개로 나눌 것을 제의하여 8등분 하여 나누어 가졌다. 뒤 늦게 이 사실을 알고 찾아 온 드로나 바라문은 유골이 담겼던 병을 차지하였고, 모랴족은 재를 각각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유골과 병, 재는 탑을 건립하고 그곳에 모셨다. 그래서 석가모니부처님의 유골은 10개의 탑에 모셔졌다. 그 후 기원전 3세기경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왕이 여덟 개의 탑을 열어 사리를 다시 나누어서 8만 4천개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8만 4천 이라는 숫자는 실제 8만 4천이 아니고, 아주 많다는 인도식 표현 방식이다. 탑은 후에 불상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하여도 가장 신성한 숭배의 대상 이였으며, 이 탑 공양은 대승불교 탄생의 모티브(motive)를 제공한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교화활동의 경로나 우안거 장소, 또 정사를 세운 장소를 보면 주로 도시 근처의 숲 속이다. 이는 사람들의 왕래가 편리하고 낮에도 시끄럽지 않으면서 밤에는 사람의 통행이 없어 명상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음식을 구하기가 쉬웠던 점도 고려가 되었을 것이다.
초기 불전에 나오는 16대국(大國)은 동쪽으로는 방글라데시 경계지역에서 서쪽으로는 델리를 지나, 인도 북서지역의 간다라와 파키스탄지역까지이다. 북쪽으로는 네팔 남부에서 남쪽은 중인도인 고다바리강 유역까지가 당시 불교의 영향을 받은 지역이다. 이 지역을 불교중국(佛敎中國) 이라고 한다. 그러나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직접 교화활동을 위하여 방문한 지역은 동쪽으로는 마가다의 수도 라자가하로부터 서쪽으로는 코살리의 사밧티 사이이다. 주로 야무르강 북쪽의 갠지스강 주변지역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여기에는 죽립정사(竹林精舍)와 망고 숲, 영취산(靈鷲山, 독수리의 봉우리라는 뜻), 칠엽굴(七葉窟, vebhara산 중턱에 있는 굴)이 있으며 이곳 정사에서 많은 설법을 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바라문의 세력이 강했던 코살라국의 사밧티에서도 오랫동안 교화활동을 하였다. 성도 후 20년이 되는 해부터 입멸 한해 전까지 25년의 안거를 이곳에 있는 기원정사(祇園精舍)와 녹자모 강당(鹿子母 講堂)에서 보냈다고 한다. 사밧티는 석가모니부처님의 후반기 교화활동의 중심지 이였다. 또 고향인 카필라밧투와 밧지국의 베살리, 밤사국의 코삼비 등도 주 활동지역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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