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고대 인도에서 싯다르타 고타마에 의해 성립된 후 지금 시대까지 계속 이어져 온 종교이다.[1] 불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교들 중의 하나이다. 불교는 인도아대륙의 동북부 지방에서 시작되어 그 후 중앙아시아 · 동아시아 ·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었으며 이러한 전파와 더불어 불교는 발전을 거듭하여 다양하고 복잡한 종교적 전통을 지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불교는 특히 아시아 지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역사적으로 불교에는 많은 종파와 불교 운동이 있었는데, 이 중에서 상좌부 불교 · 대승 불교 · 티베트 불교의 전통이 특히 중요하며 현재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연표: 불교 전통의 성립과 발전 (기원전 450년경부터 기원후 1300년경까지) | |||||||||||||||||||
450 BCE | 250 BCE | 100 CE | 500 CE | 700 CE | 800 CE | 1200 C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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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파 불교 | 대승 불교 | 밀교·금강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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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부 불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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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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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종 · 선종 · 정토종 · 일련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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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 BCE | 250 BCE | 100 CE | 500 CE | 700 CE | 800 CE | 1200 C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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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불교의 성립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싯다르타 고타마(Siddhārtha Gautama)에 의해 현재의 인도 동북부 지방과 네팔에 있던 마가다(Magadha) 왕국을 중심으로 성립하였다.[1]
싯다르타는 카필라 성주(城主) 슈도다나(Suddhodana) 왕을 부친으로 하고 마야(Maya) 부인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으며, 샤카 족에 속하는 크샤트리아 계급이었다.[1] 깨달음(覺 · 각)을 성취한 후에는 "깨달은 자"라는 뜻인 붓다(불타 · 부처)라는 칭호를 더하여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2], 또는 "샤카 족의 성자"라는 뜻인 샤카무니(석가모니 · Śākyamuni) 혹은 석존(釋尊)이라고 불리었다.[1]
고타마 붓다의 출생지는 룸비니(Lumbini)였고 성장지는 카필라 성(Kapilavastu · 迦毘羅城 · 가비라성)이었으나 불교가 종교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마가다 왕국에서였다.[1] 고타마 붓다의 종교적 활동인 수도(修道) · 깨달음(正覺 · 정각) · 포교(布敎) 등이 지금의 인도 비하르 주에 해당되는 마가다 왕국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출생지나 성장지보다는 마가다 왕국이 불교 발생의 중심지로 여겨지고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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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세기 마가다 왕국의 대략적인 범위 |
인도 비하르주의 위치 |
샷다르다가 깨달음을 얻은부다가야에 있는 마하보디 대탑 |
불교의 팔대성지 |
시대적 배경
불교가 일어날 당시 인도는 베다(Veda)와 우파니샤드(Upanisad)에 근거를 둔 브라만교가 지배하는 사회였다.[3] 당시 브라만교는 우주의 궁극적 근원인 브라만(Brahman · 범 · 梵)과 개인에 내재하는 아트만(Atman · 아 · 我)이라는 두 원리가 동일한 것이라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3] 또 인간의 행위는 전생(前生)의 카르마(Karma · 업 · 業)에 의해 지배된다는 교의를 가졌으며, 현재의 행위의 결과는 미래의 행위를 결정한다는 윤회 사상(輪廻思想)을 지니고 있었다.[3] 당시의 사상가나 종교가들은 윤회로부터 해탈(解脫)해야 한다는 것을 이론이나 실천 수행을 통해 주장하였다.[3] 브라만교의 카르마 · 윤회 · 해탈의 사상은 후대 인도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불교 역시 이러한 인도의 전통적 종교 · 철학 사상을 근저로 하여 새로운 종교 사상으로 출현하였다.[3]
붓다의 수행과 깨달음
싯다르타도 "깨달음(無上正等覺 · 무상정등각 · 阿耨多羅三藐三菩提 · 아뇩다라삼먁삼보리 · Anuttarā Samyaksaṃbodhi)"을 얻기 전까지는 이러한 종교적 풍토 속에서 브라만교의 수행 방법을 따랐다.[3] 싯다르타는 29세에 부인인 야쇼다라(Yaśodhara)와 아들 라후라(Rāhula)를 버리고 출가(出家)한 후 선정(禪定)과 고행(苦行)을 택하여 수행하였는데 이들은 당시에 유행되었던 수행법이었다.[3]
싯다르타는 출가 후에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와 우다카 라마푸타(Uddaka Ramaputta)에게 사사하다가 만족하지 못하여 스승을 버리고 5명의 수행자와 함께 고행의 길을 떠나 6년의 고행을 하였다.[3] 하지만 싯다르타는 6년의 고행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였으며, 이에 고행을 버리고 중도(中道)의 길을 택하였다.[4] 이윽고 마침내 싯다르타는 35세의 해 12월 8일 이른 새벽에 부다가야(Buddhagaya)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성취하여 생 · 노 · 병 · 사의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근원을 단멸(斷滅)하고 열반(涅槃)의 세계를 체현하였다.[3][5][6]
불교의 성립
고타마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은 고(苦) · 집(集) · 멸(滅) · 도(道)의 사성제(四聖諦)와 생사윤회의 모습인 연기(緣起)이다.[3] 고통(苦)의 원인인 집착(集)을 극복 또는 제거(滅)하여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방법(道)으로 제시된 것이 정견 · 정사 · 정어 · 정업 · 정명 · 정정진 · 정념 · 정정의 팔정도(八正道)이다.[3] 고타마 붓다가 깨달은 진리를 법(法 · 다르마)이라 하며 그는 이 법을 펴기 위해 녹야원(鹿野園 · 사르나트)으로 가서 다섯 수행자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고("초전법륜 · 初轉法輪") 그들을 제자로 삼았다.[3] 이로써 불 · 법 · 승의 삼보(三寶)가 갖추어지고 불교는 비로소 하나의 종교로서 교조(敎祖) · 교리(敎理) · 교단(敎團)을 갖추고 전파되기 시작하였다.[3]
원시 불교의 발전
고타마 붓다는 45년 동안 교화 활동을 하며 승단을 이끌다가 80세에 쿠시나가르에서 입멸하여 반열반(般涅槃 · Parinirvana)에 들었다.[7] 그 후 승단은 제자인 마하가섭 등이 중심이 되어 붓다의 율과 법을 유지하게 되었다.[7]
경전의 결집
불멸후, 곧 붓다의 가르침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붓다가 듣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맞추어 설법한 것("수기설법 · 隨機說法")을 결집을 통해 경전으로 편집하였다.[7] 이것을 제1회 결집이라 한다.[7] 라자기르(왕사성)에 500명의 비구들이 모여 마하가섭을 사회자로 하고 우바리가 율을, 아난다가 법을 암송하여 붓다의 설법을 정전화(正典化)하였다.[7] 그후 불교는 마가다 왕국을 근거지로 여러 도시의 왕과 제후 그리고 일반 서민의 귀의를 얻으며 각지로 전파되어 갔다.[7]
아소카와 불교의 전파
기원전 317년경 찬드라굽타(Chandra Gupta)에 의해 인도 최초의 통일 국가인 마우리아 왕조가 성립되고 제3대 왕 아소카가 즉위한 후 불교는 비약적으로 팽창하여 캐시미르와 간다라 지방을 비롯한 인도 각 지역 · 그리스의 식민지인 박트리아 · 스리랑카(실론) · 미얀마(버마) 등 국외로까지 전파되었다.[7] 특히 스리랑카에는 아소카 왕은 자신의 아들 마힌다(Mahinda)를 보내 불교를 전파했다.[7] 아소카 왕은 열렬한 불교 신도로서 '법(法)인 진리'에 의한 통치를 지도 이념으로 삼는 등 불교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7]
부파 불교 시대
상좌부와 대중부의 분열
싯다르타가 입멸한 후 100년이 지나자 계율(戒律) 해석을 놓고 전통적 보수파와 진보적 자유파가 대립되어 두 개의 부파(部派)로 갈라졌다.[8] 전통적 보수파를 상좌부(上座部 · Theravada · 테라바다)라 하였고 진보적 자유파를 대중부(大衆部 · Mahasamghika · 마하상기카)라 하였다.[8] 바이샬리(Vaisali · 毘舍離 · 비사리)에서 비구계(比丘戒)로 10사(事)를 두고 합법(合法)을 주장하는 측과 비법(非法)이라고 반대하는 측이 대립되어 분열되었다.[8] 이를 근본2부의 분열이라고 한다.[9] 비법을 주장하는 측이 700명의 비구를 모아 집회를 열었는데 이것을 제2회 결집이라 한다.[8]
소승 20부
근본2부의 분열이 가져온 분열의 기운은 교리상의 견해, 지도자간의 대립, 지리적 조건 등으로 인하여 더욱 심화되어 붓다의 입멸 후 약 200년 뒤에는 대중부 계통으로부터, 그리고 그 뒤에 이어서 상좌부 계통으로부터 교단의 파생적인 분열이 촉진되었다.[10] 이에 따라 서력 기원을 전후하는 시기에는 18-20개 정도의 부파를 형성하였다.[8]
이 여러 갈래로 분열하는 모습과 파의 이름 그리고 분파의 수에 관하여는 여러 설이 있다.[10] 부파 발생의 주된 원인은 계율의 해석에 관한 학설 상의 차이에 있었지만, 학설보다는 지도적 장로(長老)를 중심으로 한 체제가 달랐거나 지리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부파를 형성하는 일도 생겼다.[8] 대표적 부파로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 설산부(雪山部) · 독자부(犢子部) · 화지부(化地部) · 음광부(飮光部) · 경량부(經量部) 등이 존재하였다.[8]
일반적으로 소승20부로서는 대중부 계통의 대중부(大衆部) · 일설부(一說部) · 설출세부(說出世部) · 계윤부(鷄胤部) · 다문부(多聞部) · 설가부(說假部) · 제다산부(制多山部) · 북산주부(北山住部)의 9부와 상좌부 계통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 설산부(雪山部) · 독자부(犢子部) · 법상부(法上部) · 현주부(贅胄部) · 정량부(正量部) · 밀림산부(密林山部) · 화지부(化地部) · 법장부(法藏部) · 음광부(飮光部) · 경량부(輕量部)의 11부, 합계 20부를 들 수 있다.[10] 이들의 성립 시기는 대략 서력 기원 전후였을 것으로 보인다.[10]
부파 불교의 성격
이와 같은 불교의 부파적 전개("부파 불교")는 외적 확대와는 달리 성립 당시와 같은 순수성을 잃고 율(律)과 경(經)에 대한 훈고학적인 주석학에 빠졌다.[8] 즉, 아비달마(阿毘達磨) 불교가 발달되어 불교는 승원(僧院) 중심, 출가 중심의 학문 불교로 변화하고, 따라서 대중성을 잃었다.[8] 또 일부에서는 저급한 미신적 신앙에 친화감을 갖게 되어 불교는 본래의 탄력을 잃고 말았다.[8] 이러한 경향에 대해 진보적 입장을 대표하던 대중부 및 재가(在家) 불교도가 줌심이 되어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복귀하려는 대승 불교 운동이 시작되었다.[8]
대승 불교의 성립과 발전
인도의 초기 대승 불교
대승 불교의 성립
대승 불교가 성립된 것은 기원전 1세기경이나 이 움직임의 태동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11] 대승 불교의 대두로 인하여 이전의 6세기 간에 걸친 불교를 통칭하여 소승 불교라 불러 대승 불교와 함께 오늘날까지 불교의 성격을 규정하는 2대(二大) 유파로 간주하게 되었다.[11]
그러나 대승 불교의 대두로 소승 불교는 쇠퇴 · 소멸의 길을 달린 것이 아니라 소승 불교의 부파들은 서로 정통을 주장하며 계속 부파적 발전을 하여, 스리랑카와 같은 남방 국가로도 퍼져갔다.[11] 스리랑카의 경우 기원후 4-5세기 동안 부다다타(Buddhadatta), 부다고사(Buddhaghosa · 覺音 · 각음)와 같은 일단(一團)의 학자들에 의해 수많은 주석서들이 만들어졌다.[11] 이러한 활동이 바탕이 되어 스리랑카의 소승 불교는 미얀마 · 타이 · 캄보디아 · 라오스 등지의 소승 불교와 함께 남방 불교 문화권을 형성하였다.[11]
소승에 대해 대립적 자세를 취하며 일어난 대승 불교는 종래의 관점을 혁신하였다.[11] 수행관(修行觀)에 있어서 자기 완성을 주장하기 보다 대중의 구원을 우선할 것을 주장하였다.[11] 열반의 상태에 안주해 버리는 아라한(阿羅漢 · Arhan) 대신에 보살(菩薩 · Bodhisattva)이라는 새로운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하였고 이미 열반에 들어간 역사적 인물로서의 붓다 대신에 법신(法身) · 보신(報身) · 응신(應身) 또는 화신(化身)의 삼신설(三身說)과 같은 초월적 불신관(佛身觀)을 내세웠다.[11][12] 이러한 변화는 자타카(Jataka · 本生譚 · 본생담), 아바다나(Avadana · 譬喩文學 · 비유문학) 및 아비달마의 우주론의 발달과 더불어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11]
대승 경전의 성립
기원후 1세기 후반에 쿠샨 왕조가 성립되고 제3대 왕인 카니슈카(Kanishka · 迦腻色伽 · 가니색가: 재위 127-151)가 즉위한 후 불교는 또 다시 중흥기를 맞게 되었다.[11] 카니슈카는 푸르샤푸라(Pursapura: 현재의 파키스탄 북서부의 페샤와르)에 수도를 정하고 북인도의 대부분과 서인도 북반(北半), 중앙 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11] 카니슈카는 국내 각지에 불탑과 사찰을 건립하고 적극적인 불교 보호정책을 썼다.[11] 이때 불교는 파르티아(Parthia), 소그디아(Sogdia) 지방에까지 보급되었고 이 시기부터 이곳의 학승(學僧)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불전(佛典) 번역에 종사하였다.[11]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에 이르는 사이 대승 운동의 결실로 수많은 대승 경전들이 출현했다.[11] 초기 대승 경전 가운데 중요한 것들은 《반야경(般若經)》·《유마경(維摩經)》·《법화경(法華經)》·《아미타경(阿彌陀經)》· 《십지경(十地經)》 등이다.[11] 이 가운데 《반야경》은 대승 경전을 대표하는 경전으로, 이 경전에 실린 공 사상(空思想)은 대승 불교의 기본적 교리로서 불교 사상의 근본 사조를 이루었다.[11]
인도의 중기 대승 불교
중관파와 유가행파
공 사상의 기초를 닦은 대표적 인물은 남인도 출신의 용수(龍樹 · Nagarjuna: c.150-c.250)로서 그의 《중론송(中論頌 · Madhyamaka karika)》은 부파 불교가 지닌 오류를 결정적으로 논박하였다.[11] 용수는 고타마 붓다의 근본사상인 연기설(緣起說)을 공의 입장에서 해명하여 공 사상을 철학적으로 기초지었고, 공 사상은 제자인 제바(提婆 · Aryadeva: 3세기), 또 그의 제자인 라후라발타라 등에게 계승되어 중관파가 성립되었다.[13]
용수 이후에 《승만경(勝鬘經)》·《해심밀경(解深密經)》·《능가경(楞伽經)》 등이 나타났다.[11] 특히 《해심밀경》의 유식설(唯識說 · Vijñapti-mātratā)은 270년과 480년 사이에 미륵(彌勒 · Maitreya: c. 270-350) · 무착(無着 · Asanga: c. 300-370) · 세친(世親 · Vasubandhu: fl. 4세기) 등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유가행파가 확립되었다.[11] 그 결과 중관파의 공 사상과 유가행파의 유식설은 중기 대승 불교 사상의 2대 조류를 형성하는 학설이 되었다.[11]
공 사상 또는 중관 사상(中觀思想)의 중관파와 유식 사상(唯識思想)의 유가행파는 7세기에 이르러 인도 대승 불교의 주요한 학파로 군림하게 되었다.[11] 중관파는 용수(c.150-c.250) 이래 불호(佛護 · Buddhapalita: c.470-540)의 계통과 청변(淸辨 · Baviveka: c 490-570)의 계통으로 나뉘었고, 전자는 월칭(月稱 · Candrakirti: 600-c.650)과 적천(寂天 · Santideva: 6세기)이 계승하였으며, 후자는 적호(寂護 · Santaraksita: 8세기)와 연화계(蓮華戒 · Kamalasila: fl. 713-763)가 계승하였다.[11] 유가행파는 세친(世親 · Vasubandhu: fl. 4세기)을 계승한 진나(陳那 · Dinnaga: c.480-540) 계통과 덕혜(德慧 · Gunamati)와 안혜(安慧 · Sthiramati: 6세기)의 계통으로 나뉘었고 전자는 호법(護法 · Dharmapala: 530-561) · 법칭(法稱 · Dharmakirti: 7세기)이 계승하였다.[11]
인도의 후기 대승 불교
7세기는 불교사상에 있어 난숙한 발달을 보인 시기였는데 중관파와 유가행파는 불교 내부에서 상호간에 활발한 논전을 벌였을 뿐 아니라 외부의 힌두교나 자이나교의 종파들과도 논쟁을 벌였다.[11] 인도 불교는 이렇게 대승 불교의 학파들을 형성하여 발전을 계속하였으며 그 학문적 전승을 위해 나란타(那爛陀 · Nalanda) 사원이 국제 대학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발라비(Valabhi) 사원도 불교학의 중심지가 되었다.[11] 그러나 인도 불교의 종교적 열정은 감퇴되기 시작하여 종교 생활은 나란타(Nalanda) · 발라비(Valabhi) · 비크라마실라(Vikramasila)와 같은 대학으로 집중되었고 승단 중심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11]
밀교의 성립과 발전
밀교의 성립
7세기 중엽에서 말엽에 이르는 시기에 새로운 불교인 밀교(密敎)가 성립하였다.[14] 밀교는 고타마 붓다 당시부터 주법(呪法)으로 전해오던 것으로 주구(呪句) · 진언(眞言 · Mantra) · 다라니(陀羅尼 · Dharani)를 송지(誦持)하여 그것으로 마음을 통일하고 구경의 경지에 도달하여 붓다(佛 · 불)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불교의 일파였다.[14] 7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러한 사상이 조직화되고 종합되어 《대일경(大日經)》·《금강정경(金剛頂經)》과 같은 문헌으로 나타남으로써 밀교의 기초가 확립되었다.[14]
밀교도 대승 불교로 분류되고 있으나 인도에서 대승 불교가 쇠퇴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사상으로 평가된다.[14] 그 이유는 세친(世親 · Vasubandhu: fl. 4세기) 이후 대승 불교가 지나친 철학적·이론적 경향으로 흘러 일반 대중과 유리되었는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밀교가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14] 이러한 상황은 아비달마 불교의 지나친 철학적·이론적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승 불교가 발생한 것과 동일하다.[14] 또 당시 인도에서 탄트라 문학이 유행되었고 그 풍조에 따라 불교의 밀교적 전개가 촉진되었다.[14] 중관 사상도 밀교화되었으며 따라서 밀교는 힌두 사회에서 환영받아 급속히 보급되었다.[14] 8세기 후반에 와서는 밀교가 대중화됨과 동시에 저급한 의례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14]
금강승과 티베트 불교로의 발전
밀교가 대중화되면서 금강승(金剛乘 · Vajrayana)이라는 불교 유파가 형성되었다. 금강승 운동을 일으킨 사람은 인타라부저(因陀羅部底 · Indrabhuti: 687-c.717)였다.[14] 그의 아들인 파드마삼바바(蓮華生 · Padmasambhava · 연화생)는 밀교를 티베트로 전했고, 또한 당시에 인도로부터 다수의 고승이 티베트에 들어가 밀교를 중심으로 한 대승 불교를 전파하였다.[14] 그러나 티베트에는 중국에서 온 학승들이 있어, 이들과 인도 학승 사이에 견해 차이가 생겨 혼란이 일어났다.[14] 티손데첸(Trisong Detsen · 치쏭 데짼: 755-797) 왕은 수도 라사(Lhasa)에서 회의를 열어 논쟁을 매듭지었고, 그 결과 인도측의 점문파(漸門派)의 설이 인정되고 중국의 돈문파(頓門派)의 설은 배척되었다.[14] 이로써 티베트 불교는 인도 후기 불교의 성격을 그 주류로 삼게 되었다.[14] 티베트로 들어간 밀교는 머지 않아 라마교로 발전하여 티베트 고유 불교로 정착하였다.[14]
인도 불교의 쇠퇴
8세기 중반부터는 금강승(金剛乘) 불교가 팔라 왕조(Pala Empire: 750-1174)의 보호를 받으며 마가다(Magadha) 지방과 서벵골(West Bengal) 지방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나 이때의 불교는 거의 힌두교나 다를 것이 없는 상태로 변질되고 말았다.[15] 불교는 오히려 중국 · 한국 · 일본에서 번성하였다.[15] 이와 같이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된 것은 불교 자체가 내적으로 변화를 일으켜 미륵(彌勒) · 관음(觀音) · 대일여래(大日如來) 등의 부처나 보살이 힌두교의 신들과 거의 같은 성격과 기능을 갖게 되었고 이슬람교의 박해에 의해 승려의 수가 줄어들고 사원이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15]
아시아로의 불교의 전파
인도에서 불교가 소멸된 대신 불교는 남방 아시아의 스리랑카 · 미얀마 · 타이,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 북방 아시아의 티베트 · 중국 · 한국 · 일본 등 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되어 각 지역의 토착 문화와 융합하여 다채로운 종교 문화를 이룩하였다.[16]
중국으로의 전파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1세기경이라고 추정되지만 불교 경전의 한역(漢譯)은 2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행해지고 위진 남북조 시대부터 명 시대까지 중국 불교는 크게 번창하여 독자적인 불교 문화를 형성하였다.[16]초기 수용기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전한(前漢: BC 206-AD 8) 시대였으며 불교 경전이 본격적으로 번역된 것은 후한(後漢: 25-220) 시대에 들어와서였다.[16] 불교의 전래 당시, 세간(世間) 또는 현세를 떠나 출세간(出世間)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는 불교의 교의는 당시의 중국의 현세주의적 사상풍토와는 상치되어 쉽게 수용되지 못하였다.[16] 따라서 처음에 불교는 도교적 신앙과 결부되어 신선방술(神仙方術)의 하나로 수용되었다.[16] 이와 같은 불교의 초기 수용기는 대체로 전한말(前漢末)에서 4세기 말까지 약 400년간이라 여겨지고 있다.[16]
중국 불교의 확립
전한말(前漢末)에서 4세기 말까지 약 400년간의 초기 수용기 이후, 5세기 초에서 6세기 말까지의 200년간 불교는 중국에서 착실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 시기 동안 불교 경전의 전래가 격증되고 많은 인도 승려들이 중국으로 들어왔다.[16] 구마라습(鳩摩羅什 · Kumārajīva: 344-413) · 담무참(曇無讖 · Dharmakṣema: 385-433) · 보리유지(菩提流支 · Bodhiruci: 5세기말-6세기초) · 진제(眞諦 · Paramārtha: 499-569) 등이 나타나 불교 경전과 논서들을 본격적으로 번역함에 따라 불교의 학문적 · 신앙적 토대가 이루어졌다.[16] 이에 따라 경론(經論)을 연구하는 학파가 형성되었으며 이들 학파들은 단순한 학파를 넘어 종파(宗派)로까지 발전하였다.[16] 이러한 종파들로는 아비달마를 연구 · 강술한 비담종(毘曇宗), 《성실론(成實論)》을 연구 · 강술한 성실종(成實宗), 열반경(涅槃經)을 연구 · 강술한 열반종(涅槃宗), 《십지경론(十地經論)》을 연구 · 강술한 지론종(地論宗), 《섭대승론(攝大乘論)》을 연구 · 강술한 섭론종(攝論宗) 등이 있었다.[16]
수나라(隋: 581-618)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문화의 남북 대립이 통합 · 해소되고 불교계에도 신기풍이 일어났다.[16] 6세기 말에서 8세기 초까지의 약 150년간의 시대 동안, 전대(前代)의 연구와 신앙을 기초로 중국 독자(獨自)의 불교 종파가 발생하였다.[16] 이러한 독자적인 중국 불교 종파로는 길장(吉藏: 549-623)의 삼론종(三論宗), 지의(智顗: 538-597)의 천태종(天台宗), 신행(信行: 541-594)의 삼계교(三階敎), 도작(道綽: 562-645)의 정토종(淨土宗), 도선(道宣: 596-667)의 율종(律宗), 규기(窺基: 632-682)의 법상종(法相宗), 법장(法藏: 643-712)의 화엄종(華嚴宗), 혜능(慧能: 638-713)의 선종(禪宗), 일행(一行: 683-727)의 밀교 등의 종파가 있었다.
선종의 성립과 발전
선종은 중국 불교의 두드러진 특징을 나타내는 종파로서 보리달마(菩提達摩: ?-528)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이래 육조 혜능(慧能: 638-713)에 이르러 불교계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16] 그후 선종 5가라고 불리는 임제종(臨濟宗) · 위앙종(潙仰宗) · 조동종(曹洞宗) · 운문종(雲門宗) · 법안종(法眼宗)의 종파가 성립되었고, 선종은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의 불교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16]
한국과 일본으로의 전파
송 시대를 거쳐 형성된 중국 특유의 불교는 한국 · 일본에도 전래되었다.[16]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 부견(符堅)에 의해 불교가 전래된 이래 고구려 · 백제 · 신라는 중국에서 전래된 종파를 종합하는 종합불교(綜合佛敎) 또는 통불교(通佛敎)적 성격을 지향하면서 독자적인 불교 문화를 꽃피웠다.[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