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생애(生涯)
부처님의 존명은 석가모니(Sakyamuni:釋迦牟尼)로 B.C 623년에서 B.C 544년까지 약 80년간을 사바세계에 계시면서 당신께서 증득(證得) 하신 무상각(無上覺)으로 무명(無明) 중생을 구제하고자 불교(Buddhism)를 열으신 시방의 스승이시다.
석가모니(釋迦牟尼)ㆍ석가문(釋迦文) 등으로도 음사하며, 능인적묵(能仁寂黙)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보통 석존(釋尊)ㆍ부처님이라고도 존칭한다. 석가(Sakya)는 민족의 명칭이고 모니(muni)는 성자라는 의미로, 석가모니라 함은 석가족(族)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다.
본래의 성은 고타마(Gotama), 이름은 싯다르타(Siddhartha)인데, 후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Buddha:佛陀)라 불리게 되었다. 또 달리 진리의 체현자(體現者)라는 의미에서 여래(如來:Tathagata), 존칭으로서의 세존(世尊:Bhagavat)ㆍ석존(釋尊) 등으로도 불린다. 부처(佛陀:Buddha)의 뜻은 깨달은 각자(覺者)이다. 이는 지혜로서 시방의 제실상의 일체를 있는 그대로 보아,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뜻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알아야 할 것을 모두 알고, 끊어야 할 것을 모두 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또 일체승자(一切勝者) 일체지자(一切知者) 일체능자(一切能者)라는 뜻도 있다.
□ 거룩한 탄생(誕生)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부근인 히말라야산(山) 기슭의 카필라성(Kapilavastu:迦毘羅成)을 중심으로 샤키야족(釋迦族:Sakya)의 작은 나라가 있었다. 석가모니는 그 나라의 왕 슈도다나(Suddhodana:凈飯王)와 마야(Maya:摩耶)왕비 사이에서 그해 4월 8일 태어나시었다.
샤키야족은, 그 왕호가 정반왕(凈飯王), 그리고 정반왕의 동생이 백반(白飯)ㆍ감로반(甘露飯) 등으로 불리고 있는 점에서 미작(米作) 농경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마야왕비께서 흰코끼리가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시고 태기를 느끼신 후 만삭(滿朔)이 되어 출산이 촉박해오자 당시의 풍속대로 친정에 가서 해산하기 위하여 코올리(Koli)성으로 가던 도중, 룸비니(Lumbini)동산 무우수(無憂樹) 나무아래에서 나뭇가지를 붙잡으려는 순간 탄생하시었다. 그때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난 후, 한 손은 하늘방향으로 한 손을 땅 방향으로 하여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말씀하시었다.
석가모니가 탄생하시었을 때, 히말라야산에서 아시타라는 선인(仙人)이 찾아와 당시 태자의 상호(相好)를 보고, “집에 있어 왕위를 계승하면 전세계를 통일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며, 만약 출가(出家)하여 수행의길에 나선다면 도(道)를 이루어 세상에 둘도 없는 진리를 증득한 부처(Buddha)님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하나 생후 7일 째에 어머니 마야왕비께서 세상을 떠나시는 바람에 이모 파자파티(Pajapati)를 새어머니로 하여 자라게 되시었다. 성장하면서 왕족의 교양에 필요한 학문ㆍ기예를 익히며 성장하였다. 태자로서의 생활은 당연히 부족함이 없이 매우 풍족한 생활이었다.
□ 태자의 번민(煩悶)과 출가(出家)하심
태자는 호화를 극한 나날을 보냈지만 마음 깊숙이 자리잡은 번민(煩悶)을 떨쳐 버릴 수 는 없었다. 그의 번민은 이세상의 덧없음과 근본적인 인간고(人間苦)에 대한 것이었다.
그때 성문의 나들이에서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 모습과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모습과 사문(沙門)을 목격한 이른바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 불리는 사건으로 출가를 결심하게 되시었다.
16세가 되어서 당시의 풍습을 따라 같은 석가족 콜리성주의 공주인 야쇼다라(Yasodhara)를 맞이하여 결혼하시었다. 그리고 곧 아들 라훌라(Rahula)를 얻게 되었다. 세상에 더할 수 없는 호강을 다하고 자란 태자가 부모와 처자, 부귀영화를 모두 버리고 출가를 막으려고 했던 부왕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궁전을 벗어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도자의 길을 나섰다.
□ 수행(修行)과 성도(成道)
29세에 고(苦)의 본질 추구와 해탈(解脫)의 진리를 추구하고자 출가한 태자는 남방으로 내려가 갠지스강(江)을 건너 비야리ㆍ마가다국(國)의 왕사성(王舍城:Rajagrha)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알라라 칼라마와 우다카 라마푸타라는 2명의 선인(仙人)으로부터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ㆍ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이라는 선정(禪定)을 배웠다.
하나 그들의 방법으로 생사의 괴로움을 해탈할 수 없음을 확인하고 그들로부터 떠나 부다가야(Buddhagaya) 부근의 산림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다시 당시의 출가자의 풍습이었던 고행(苦行)에 전념하여 신체가 해골처럼 야위도록 진력하였으나 해탈을 이룰 수 없었다.
35세에 그 동안 행했던 6년간의 고행으로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함을 확인하고, 보리수(菩提樹:Bodhi-tree) 아래에 자리잡고 새로이 선정수행에 들어 갔다. 구도자(求道者) 고타마는 “도(道)를 이루지 못하면 결코 이자리(金剛寶座)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라는 굳은 결심을 하였다.
악마의 왕(魔王)이 갖가지 핍박과 장애와 유혹과 마력으로 성도(成道)를 방해하였으나 그는 끝내 더없이 바르고 참된 평등원만(平等圓滿)의 깨달음, 곧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anuttarasamyaksambodhih)을 이루어 부처(buddha:覺者)님이 되셨다.
□ 가르침을 펴다
석가모니는 성도 후 보리수 아래에서 해탈의 기쁨(法悅)에 잠겨 있었다. 이제 대우주와 둘이 아닌 하나의 생명으로 통해있는 자신을 발견하시었다. 처음에 중생이 이해 못할 것을 염려하여 설법을 상당히 주저하셨다. 자신이 성불한 기뿜과 만족감으로 혼자 법열(法悅)에만 젖어 있을 수 없어, 끝없이 노(老)ㆍ병(炳)ㆍ사(死)의 고통에 허덕이고 있는 중생의 아품이 바로 부처님의 아품이었기 때문에 중생을 제도(濟度)해야 한다는 자비(慈悲)의 가르침을 펴시게 되었다.
석가모니는 바라나시(Baranasi)의 녹야원(綠野苑:Migadaya)에서, 일찍이 고행을 같이 하였던 5명의 수행자에게 고락의 양 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와 사성제(四聖諸-苦,集,滅,道)에 관하여 설하였다. 그들은 모두 법을 알아들어 제자가 되었다. 이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불교가 비로소 세상에 출현하게 되었으며, 불(佛:Buddha 가르침을 연 부처님)ㆍ법(法:dharma 부처님이 가르친 진리)ㆍ승(僧:sangha 佛法을 받들고 실천하는 敎團)의 삼보(三寶)가 이루어졌다.
그후 석가모니는 적극적으로 설법을 계속하여, 제자의 수가 점점 증가하였고 각지에 교단이 조직되어져 갔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실적이고 실제 생활적인 것이었다.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철리나 이론적인 지식을 주입시키거나 전파 하는데에 목적을 두지 않으셨다. 현실 생활에 보다 진실되고 이익 되게 하였으며, 행복을 창조하는 삶을 갖도록 일깨웠던 것이다.
부처님이 직접 교화한 곳으로는 왕사성과 사위성이 가장 중심지였으며, 북쪽으로는 카필라, 남쪽은 바라나시, 동쪽은 참파(Campa), 서쪽은 코삼비 등이었다. 당시 부처님 재세시(在世時)에 가르침은 동쪽으로 갠지스강 하류에까지 전해졌고, 서쪽으로는 아라비아해 연안에까지 전파되었다고 한다.
□ 열반(涅槃)
부처님은 성도 하신지 45년이 되는 80세 때에 쿠시나가라(Kusinagara)국의 살라(Sala) 나무숲으로 가서 살라나무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아난(阿難)을 비롯한 여러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에게 歸依하고 法에 歸依하며, 스스로를 光明으로 하고 法을 光明으로 삼아라.” 라고 하였으며, 또 “모든 生한 것은 반드시 滅하는 법이다. 그러니 부지런히 힘써 解脫을 구하라”는 마지막 유훈(遺訓)을 남기신 뒤에, 영원한 인류의 스승이신 부처님은 열반(涅槃)에 드시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열반일을 2월 15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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