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불교

바이샬리(Vaishali)

왈선생 2011. 8. 21. 14:12

 

 

 

 

 

 

 

 

 

 

 

 

바이살리


비하르주(州)의 주도(州都)인 파트나 북쪽 갠지스강(江) 중류에 있다. 비사리(毘舍離)라고도 적는다. 석가모니(BC 566∼BC 480) 시대에는 인도 6대도시의 하나로 16국의 하나인 바지국(國)을 형성한 리차비족(族)의 주도(主都)이기도 하였다. 자이나 교조(敎祖) 마하비라가 이 도시 출신의 왕족이었기 때문에 처음에 이 지방은 불교보다도 자이나교가 융성하였다.

그러나 석가모니와 그의 제자들이 자이나교에서 유명한 제자나 신자들과 꾸준히 문답식으로 대화하여 마침내 그들을 불교로 전향시킴으로써 불교도 차차 융성하게 되었다. 석가모니가 오(悟)를 깨우쳐 불타(佛陀)가 된 뒤 제5년의 우기(雨期)를 이 도시 교외의 마하바나[大林]에서 지내고 주민들은 그를 크게 환영하여 중각강당(重閣講堂:大林精舍) 외에 여러 절을 세웠으며 거기에서 설법한 경전(經典)도 적지 않다.


석가모니는 제45년의 최후의 우기도 이 부근에서 지내고 이 도시의 유녀(遊女)인 암바팔리를 불교에 귀의(歸依)시켜 출가하게 하였는데 그녀 소유의 원림(園林)은 불교재단에 기증되었다. 석가모니의 사망 후 이 도시는 유골의 8분의 1을 받아 사리탑을 세워 추모하였으며 제2회 불전 편찬회의가 이 곳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를 바이살리 결집(結集)이라고 한다.

[출처] 바이살리 | 네이버 백과사전

 


 

 

유마거사(維摩居士)의 고향 바이샬리(Vaishali)


바이샬리로 부터「왕오천축국전」은 시작되고…

상권 전부와 중권 앞부분이 없는, 현존본「왕오천축국전」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있다.


『이삼보(三寶)를.....맨발에… 외도(外道)라 옷을 입지 않는다. <약19자 缺> 음식을 보자마자 곧 먹는다. 재계(齋戒)도 하지 않는다. 땅은 모두 평평하고..... 노비가 없다. 사람을 팔면 살인하는 죄와 다르지 않다<약18자 缺>』


*바이샬리 입구


구체적인 지명은 보이지 않지만 위 구절은 바이샬리에 해당된 것이라고 학계에서는 비정하고 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현존본에는 혜초의 다음 행선지가 열반지 쿠쉬나가르이다. 이는 혜초가 동천축의 탐룩(Tamluk)에서 무슨 이유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먼저 가장 가까운 보드가야로 가지 않고 갠지스 북쪽 행로를 경유해 중천축으로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반드시 바이샬리를 경유하기 마련이다.


두 번째 근거는 본문에 ‘나체외도’ 구절이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자인교(Jainism)도를 말한다. 8세기 당시 자인교는 불교 이상으로 번성했었는데 그 본거지가 바로 바이샬리이다. 그렇기에 이런 근거로 혜초의 ‘8대성지’의 첫 걸음으로 바이샬리를 꼽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다. 혜초는 뒤 부분에 바이샬리를 ‘비야리성(扉倻離城)’이라고 적고 있다.

『이 중천축국 안에 4개의 대탑이 있는데 항하의 북쪽에 세 개가 있다. 첫째 탑은 사위국의 급고독원에 있으니 거기에는 절도 있고 승려도 있음을 보았다. 둘째 탑은 비야리성의 암라원(菴羅園) 안에 있으니, 지금 탑은 볼 수 있으나 절은 허물어지고 승려도 없다』


옛 마가다국의 수도였고, 유명한 아쇼카의 도읍지였던 곳은 현재 비하르주의 수도 파트나(Patna)로 변해있었다. 왕사성이었던 라즈기르에서 파트나를 경유하여서 드넓은 갠지스를 건너 바이샬리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차를 몇 번씩이나 바꿔 타야했기 때문이었다. 며칠을 달려도 구릉하나 볼 수 없는 드넓은 황토색의 대지에는 끝없이 푸른 논밭이 이어지고  간간이 궁핍함이 배어 나오는 조그만 촌락과 늪지가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아마도 붓다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진리를 설파하기 위해 걸어 다녔던, 직선으로 뻗어나간 그 길에는 오늘도 신의 대접을 받는 성우(聖牛)들이 차를 가끔 가로막기도 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수천 년 전부터 그래왔을 인도의 전형적인 농촌의 정경이었다.

 

*바이샬리 풍경


오늘 날 속칭 ‘4대’니 ‘8대’니 하는 불교성지들의 과반수는 현 행정구역상으로 비하르주에 속해 있다. 이 이름은 원래 사찰을 의미하는 ‘비하라(Vihara)’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것이 말해주듯이 불교나 자인교가 융성했던 당시는 이곳에는 그처럼 가람이 즐비했을 것이다. 지금은 인도에서도 가장 가난한 주로 전락했지만 옛날의 비하르는 인도의 심장이었다. 전 인도를 장악했던 마가다·마우리야·굽타 같은 역대 왕국들의 연이은 도읍지가 있었던 곳이었기에 이 지방은 자연스럽게 인도대륙의 정치·경제·문화·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제일 북쪽에 위치한 바이샬리도 한때는 번성하던 곳이었다. 자인교의 고향으로 또한 고타마 붓다의 활동무대였던 이곳은 그 이전에는 바지안(Vajian)연합이라는 인류 최초의 공화국의 하나가 있던 곳이었다. B.C 6세기경 랏차비족의 8개 지역연합으로 구성되어 의회제도에 의한 공화정치를 폈던 번영기의 바이샬리의 모습은, 경비를 위한 성벽이 3겹으로 처져 있는 성안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여러 층으로 올라간 건물들이 줄을 이은 시가지 곳곳에는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한 공원들이 자리하고 있어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곳이라고 묘사되고 있다.


*바이샬리 주민들


당시의  중인도의 정세는 속칭 ‘고대 16국’이라는 병립체제가 무너지면서 코살라와 마가다라는 두 강대국으로 흡수되며 전제군주제도로 변해가는 과도기 상태였는데 바지안 연합만은 아직 공화국으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동쪽의 미틸라를 중심으로 하는 비데하족과 바이샬리를 중심으로 하는 랏차비족으로 구성된 이 바지안 연합은 이상적인 민주공화정치를 펴나가면서 평화롭게 살았다고 하는데, 그렇기에 붓다도 특별히 이 나라에 대해서 애정을 표시하여 종종 제자들에게 “만일 교단이 여기 랏차비족들이 보여주는 예에 따라 운영된다면 바지안 연합처럼 오래 지속되고 번영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경전은 전하고 있다.

 바이샬리에서 마지막 하안거를 보내고 어느 날 탁발을 하고 돌아오는 언덕에서 붓다는 코끼리가 먼 곳을 쳐다보듯이 성을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다.

 “아난다야, 이제 내가 저 아름다운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마지막이 될 것이다”

 하시고 3달 뒤에 열반할 것을 예언하셨다 한다. 여기서 “저 아름다운 바이샬리”를 강조한 이유는 붓다가 바이샬리의 거리와 사람들의 인정과 바지안의 평화로움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만 그 이외에도 이후 닥쳐올 그곳의 운명을 예견하고 이후의 세계역사를 통하여 바이샬리 같은 민주공화제도가 수천 년이 지나야 다시 출현할 것이라는 아쉬움을 토로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는 붓다가 이미 그곳으로 오기 전 왕사성에 있을 때 그를 후원하던 마가다왕국이 후에 새로 천도하는 파트나에서 대제국을 이루리란 예언과 같은 초능력적 예언에 부합하고 있다.


이 랏차비족은 여래의 열반 뒤에 사리의 분배 시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불사리를 8등분 할 때 이 랏차비족은 한 몫을 가져와 바이샬리에다 사리탑을 세웠다. 그런데 후에 다른 나라로 흩어진 불사리가 모두 산실되었을 때 아쇼카왕이 전국에 8만4천 사리탑을 세우려고 원을 세워 사리를 구하려고 했으나 확실한 근거가 있는 진짜 불사리를 얻을 수 없었다. 오직 바이샬리의 사리탑만이 원래의 진신사리(眞身舍利)였기에 이에 아쇼카는 이 사리탑을 헐어 사리를 분배하여 다시 전국에 사리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런, 다소 설화적인 문제에 대하여, 현장은 다음과 같이 다시 보충설명을 하고 있다. 현장이 확인하여 인용했다는「인도기」의하면, 그 안에는 본디 여래의 사리가 1곡(斛) 있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아쇼카 왕이 발굴하여 아홉 말을 반출하고 나머지 한 말만을 남겨 두었다고 하는데, 나중에 어떤 국왕이 다시 꺼내고자 할 때 대지가 진동했기 때문에 발굴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만약 위의 설이 사실이라면 지금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래의 진신사리는 모두 이 바이샬리의 랏차비족에 의해 보존될 수 있었으니 이 또한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바이샬리 호수


바이샬리는 자인교의 교주 마하비라(MahaVira)가 태어나고 소년시절을 보낸 자인교의 중요한 성지이다. 그래서  자인교에서는 바이샬리의 교조 탄생지에 대학과 사원을 세워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불교가 인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종교는 철저한 불상생(不殺生)의 계율로 인하여 생산직보다는 상업에 종사하는 부유한 중산층에 뿌리를 내려서 지금도 힌두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그것은 중세시대에도 마찬가지였던지 혜초·법현·현장의 기록에서 “맨발의 나체 외도(外道)”라는 구절로 자주 나타나고 있다. 인도의 위대한 영혼이라는 마하트마 간디가 신봉한 종교로 유명한 이 무소유를 지향하는 나체교는 불교와 거의 동시대에 출현하였다.


인도대륙의 원주민이었던 드라비다족을 몰아내고 새 주인이 된 인도-아리안족은 인더스문명을 이어 받아 브라흐만교의 사제들에 주도하에 찬란한 베다문화를 이룩하였지만 교단이 비대해짐에 따라 생기는 부패와 피비린내 나는 과도한 ‘희생제(犧牲祭)’에 대한 반발로 B·C 5-6세기경에는 많은 신진 사상가, 속칭 ‘6사외도(六師外道)’가 출현하여 반(反) 부라흐만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이 상황은 마치 중국의 춘추시대와 방불한 것이었는데 그 중에 자인교와 극도의 고행위주의 아지바카(Ajivaka)교 같은 종교도 끼어 있었다. 물론 넓은 의미로는 고타마 싯타르다가 이끄는 교단도 이들 중의 하나였다.


마하비라의 가르침은 자이나교로 발전하여 지금껏 인도사회에 한 갈래를 이루고 있다. 자이니즘에서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성인을 디르탄카라라고 하는데 교조로 꼽히는 마하비라, 즉 니간타는 제24대에 해당된다. 초대 디르탄카라인 리샤바나트는 우주의 중심인 아스타파타(Astapata)에서 수행을 한 후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불교의 만다라에 해당되는 자이니즘의 얀트라(Yantra)에 의하면 아스타파타는 수메르와 같은 우주적 산으로 인식되어서 그곳에서 초대 교주를 비롯한 역대 성인들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믿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아스타파타라고 여겨지는, 티베트고원에 실제 솟아 있는 카일라스산은 불교의 수미산처럼 영혼의 귀의처로서, 우주의 중심으로서, 영원한 세계로의 ‘스카이 코드’로서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자인교는 교리와 수행방법 차이로 간단한 옷을 입는 ‘백의파[Svetambaras]’와 단지 물병과 살생을 피하기 위해 앉을 자리를 쓸 수 있는 공작깃털 솔만 같은 최소한의 물건만을 소유할 수 있을 뿐인 ‘공의파[Digambaras]’로 나눠지는데 세인의 관심은 아무래도 완전 나체주의자로 몰리고 있다고 한다. 이 자이나교도들은 힌두의 ‘쿰부 멜라’ 축제처럼 12년을 주기로 성지를 순차적으로 돌아다니며 큰 축제를 여는 볼만한 광경을 연출한다. 기회가 있으면 기웃거려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우리에게 “옷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들고 말이다.


*원숭이 공양도


참 이 ‘디감바라’ 말고도 인도에는 나체의 수행자가 많다. 힌두교의 일파인 ‘나가-사두(Naga Sadhu)’ 가 그들인데 그 구별은 쉽다. 머리를 깎고 손에 깃털이나 부채나 우산을 들고 있으면 자이나이고 장발에 주장자를 들고 노란 옷을 입은 사람들에 쌓여 있으면 '나가 사두'로 보면 된다.


바이샬리 인근의 유적지군은  비록 망고 숲은 별로 없지만 주위가 유적지로 지정되어 있어서 그런대로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그 안에는 혜초가 보았다는 벽돌로 쌓은 아쇼카 스투파는 반쯤 허물어진 채로 남아 있지만 여래가 오랫동안 머물었던, 그리고 열반 전에 마지막으로 안거했던 정사는 역시 기단부분만이 남아 있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유적지군 속에서 유독 눈을 끄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쇼카의 석주였다. 비록 석주 위에 4마리 사자가 아니라 사자 한 마리가 앉아있는 형태지만, 인도대륙 각처에서 보아왔던 많은 아쇼카 석주가 대개는 부서진 상태로 땅위에 나뒹굴고 있는 것에 비해 여기 바이샬리의 석주는 푸른 하늘에 우뚝 선채로 긴 세월을 버텨내고 있는 모습이 강열하였는데, 특히 유적지 건너편에서 바라볼 때 그 사이의 넓은 연못에 비친 모습은 더욱 인상적이어서 2천수백 년의 세월이 전혀 무상하게 느껴지지 않아서 아예 이 광경을 바라보려고 자리를 잡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한 없이 바라보게 만들었다. 


이 유적지군은 옛 망고나무 숲이 우거졌던 암라원 터였다고 한다. 여기서 ‘암라원’은 기녀(妓女) 암바팔리가 부처님 교단에 안거용으로 보시한 곳을 말한다. 혜초나 현장도 이 암라원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혜초보다 3세기 먼저 도착한 법현도 이 유명한 여인과 그녀가 세운  탑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 비야리성 북쪽에는 대림중각정사(大林重閣精舍), 부처님이 머무시던 곳, 아난반신탑(阿蘭半身塔)이 있다. 이 성 뒤에는 암바팔리여인의 집이 있었다. 그녀는 부처님을 위해 탑을 세웠는데, 지금도 그대로 있다. 성의 남쪽 3리 되는 곳에 암바팔리여인이 장원을 만들어 부처님께 보시하여 부처님께서 주석하신 곳이 있다.』


글 / 다정 김규현 <현대불교미디어센터 ⓒ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