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불교

라지기르 [Rajgir] / 왕사성(王舍城)

왈선생 2011. 8. 20. 21:41

 

  

 

라지기르 [Rajgir]

  

인도 동부 비하르주(州) 날란다 디스트릭트(Nalanda District)에 있는 불교성지. 


나중에 마우리아 제국(Mauryan Empire)으로 흡수된 마가다왕국(Magadha Kingdom)의 첫 번째 수도 왕사성(王舍城)이 있던 곳이다. 도시의 기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BC 1000년경의 도자기류가 발견되었다. 옛 인도의 힌두 서사시인 〈마하바라타 Mahabharata〉에서는 ‘기리브라자(Girivraja)’라고 했으며, 불교와 자이나교의 중요한 순례지이다.


불교(佛敎) 교화(敎化)의 중심지(中心地)로 석가모니가 설법을 했으며 마가다왕국의 첫 수도인 왕사성터, 즉 라자그리하(Rājagrha)에는 당시 시대의 구성(舊城)과 신성(新城) 유적이 있다. 석가모니가 살았다고 전해지는 바이바르산(山)의 성(城), 석가가 《법화경(法華經)》과 《무량수경(無量壽經)》을 강의하였다고 하는 영취산(靈鷲山) 등 불교 관련 유적이 많다. 원형의 마니야르마트 힌두 유적지, 3~4세기에 자이나교도들이 파놓은 손반다르굴 등 힌두교와 자이나교 관련 유적도 있다. 바위구릉으로 둘러싸인 숲이 무성한 계곡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인도철도(Indian Railways)가 개통되어 콜카타와 델리까지 운행한다.

 


왕사성(王舍城) 


왕사성(王舍城)은 당시의 인도 사대강국(四大强國) 중의 하나인 마가다국의 수도며 당시로서는 가장 번성하고 가장 새로운 경향의 도시였다.


이 도시는 구(舊)왕사성과 신(新)왕사성의 둘로 나뉘어 있고 구도(舊都)는 산성(山城)이라고 불리워지고 현재도 인도 최고(最古)의 석조건축으로서 그 자리가 남아 있는데 현장(玄?)법사는 이 구도(舊都)를 상모궁성(上茅宮城) 구사게라보라(矩奢揭羅補羅, 쿠사그리푸라) 성(城)이라고 부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성은 마하고빈다(大牛賓陀)왕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신왕사성은 그 후 빔비사라왕 때에 평지에 세운 것이다. 주위에는 다섯 개의 산이 있어 모두 부처님이 머물러 있던 곳으로 알려져 그 이름이 유명하므로 그 이름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판다바(白善山, 盤塗山)

② 깃쟈쿠타(靈鷲山, 祇離渠阿山)

③ 벱바아라(負重山, 倍阿羅山)

④ 이시기리(仙人掘山, 離師祇離山)

⑤ 베풀라(廣普山, 毗富羅山)

그 산의 주위에는 불적(佛跡)이 많고, <대지도론(大智度論)>에는 그곳에 있던 다음과 같은 여러 정사(精舍)의 이름이 적혀 있다.

① 죽원 또는 죽림정사

② 벱바라산의 칠엽굴

③ 인다살알라구하

④ 삽파손디카팝바라

⑤ 영축산(靈鷲山)


이와 같이 부처님이 있던 곳이 많은 까닭은 부처님이 여기에 오랫동안 머물렀기 때문이다. <지도론>을 지은 나가르주나(龍樹)는 말하기를 부처님은 그 육신이 난 곳과 그 법신(法身; 제일가는 진리의 몸)이 난 곳, 이 두 곳에 가장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고 하면서 왕사성을 법신이 난 붓다가야에 가까운 곳으로 들고, 사위성(舍衛城)을 육신 즉 생신(生身)이 난 룸비니에 가까운 곳으로 들고 있다.


왕사성의 교외에는 장림(杖林)이라는 숲이 있고 거기에 선주(善住)라는 이름의 체티야(制底)가 있었다. 부처님은 앞서 말한 세 카삽파 형제를 비롯하여 천명의 도중(徒衆)을 이끌고 이곳으로 와서 머물렀다.


장림(杖林)이란 현장법사가 전한 전설에 의하면 어떤 브라만 승려가 죽장(竹杖)을 가지고 부처님의 키를 재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장법사가 쓴 것을 보면 ‘죽림수조피산미곡(竹林脩?被山彌谷)’이라고 있으므로 역시 죽림(竹林)이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숲에는 선주(善住)란 이름의 체티야(制底)가 있었다는 것이다. 체티야란 천소(天所), 천가(天家) 등으로 번역되며 대부분은 민간신앙에 의한 야차(夜叉) 등을 봉안한 곳이며, 또 훌륭한 사람의 무덤같은 모양을 한 것이었다. 과연 선주제지(善住制底)가 무엇이었던가는 잘 알 수가 없다. 이 장림(杖林)에 들어온 다음 날 부처님은 빔비사라왕의 초청으로 그 왕궁에 가기 위해 왕사성의 길거리에 들어섰다.


그 광경을 불전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조복(調伏)한 사람이 조복(調伏)당한 사람들을 이끌고,

앞서 결발행자(結髮行者)였던 사람들을 이끌고,

해탈한 사람이 해탈된 사람들을 이끌고,

황금의 빛도 아름다운 세존은 왕사성에 들어가셨다.

벗어난 사람이 벗어난 사람들을 이끌고,

해탈한 사람이 해탈한 사람들을 이끌고,

황금의 빛도 아름다운 세존은 왕사성에 들어가셨다.


생사의 바다를 넘어선 사람이 생사의 바다를 넘어선 사람들을 이끌고,

해탈한 사람이 해탈한 사람들을 이끌고,

황금의 빛도 아름다운 세존은 왕사성에 들어가셨다.

십주(十住) 시방(十方)이시며 십법(十法)을 알고 십호(十號)를 갖추어

천 명의 비구에 둘러싸여 세존은 왕사성에 들어가셨다.

이 노래는 어린애의 모습을 하고 부처님의 행렬의 선도(先導)에 선 제석천(帝釋天)의 노래라고 전해지는 노래다. 부처님 일행의 위풍당당(威風堂堂)한 모습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은 앞서 장림(杖林)으로 부처님을 방문하고 그 가르침을 듣고, 지금 또 왕궁으로 부처님을 모셔다 진리의 가르침을 받아 깊이 부처님께 귀의(歸依)하기에 이르렀다. 그 때부터 왕은 부처님이 유(留)할 곳을 물색하기에 바빴다. 성내(城內)에서 멀지 않고, 또 너무 가깝지도 않으며, 왕복(往復)하기 좋고 언제든지 가기 쉬우며 낮에는 사람들이 잡답(雜沓)하지 않고, 또 밤에는 훤조(喧?)하지 한거(閑居)하여 정사(靜思)에 잠길 수 있는 곳, 그러한 곳을 왕은 물색하였다.


왕은 그의 소유인 교외(郊外)의 칼란다카의 죽림원(竹林園)을 최적(最適)의 자리로 택하고 이곳을 부처님께 바쳤다. 칼란다카 죽림원이란 말은 칼란다카 즉 다람쥐가 방사(放飼)되고 있는 죽림(竹林)이란 말이다. 옛날에 다람쥐가 잠자고 있던 왕을 해치려는 독사(毒蛇)를 물리친 데 대한 보은(報恩)으로 이 동산에 다람쥐들을 방사하게 되었던 것이라는 전설에 근거가 있는 것이다. 이 동산에 세워진 정사를 죽림정사(竹林精舍)라고 하며 불교역사상 최초의 사원이 되는 것이다. 이 죽림정사는 기원정사(祇園精舍)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것으로 부처님이 가장 오래 체류(滯留)한 곳이다.



<법현전(法顯傳)>에는, “出舊城北行三百餘步, 道西, 迦蘭陀竹園精舍, 今現在 衆僧掃灑精舍”라고 되어 있고, 또 현장삼장(玄?三藏)은 그 <서역기(西域記)>에 “出城北門行一里餘 至迦蘭陀竹園, 今有精舍, 石基?室, 東關其戶, 如來在世多居此中說法開化”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왕사성에는 옛 모습이 남아 있지 않지만 다른 遺蹟들과 더불어 죽림정사의 옛 자리는 아름답데 잘 보존되어 있다.  (출처 : 매사와법진 / 글쓴이 : 法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