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는 주로 천수다라니와 능엄주 및 육자대명왕진언 등을 외우는 수행을 한다.
이러한 주문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며, 따라서 의사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주문에는 초월적이고 신성하고 신비한 힘이 담겨져 있으며, 수행자는 주문을 외움으로서 신비한
능력을 갖추게 되고 결국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주문의 초월적인 힘’이 바로 주력수행의 원천이 된다.
주문은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와 도교 그리고 무교를 비롯한 수많은 종교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수행법이다. 그만큼 보편적인 수행법이란 말이 되며, 달리 생각하면 불교 외적 수행법과 혼란될 수
있는 여지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주문이 가지는 신이하고 초월적인 힘 또한 불교뿐만 아니라 타 종교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주문이 무엇이기에 신이하고 초월적인 힘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고대 인도의 경우 주문은 의례와 관련되어 있었다.
즉 베다시대 신(神)들에게 공양물을 올리는 의례의 의식절차가 주문으로 행해졌다.
따라서 인도인들은 신들에게 올리는 주문이나 그것의 소리(V c)가 초월적인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주문은 신보다 앞서는 실체로서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특히 ‘옴(O )’과 같은 특정한 주문은 우주의 실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인도의 주문은 힌두 탄트라 수행에 이르러 신의 힘( akti)으로 인식되어진다.
신의 힘을 간직하고 있기에 초월적이고 신이한 능력을 발휘한다.
탄트라 수행자는 특정한 의례와 수행을 통하여 이 힘을 자기와 합일하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된다.
인도에서 주문이 초월적 힘을 간직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우주의 소리이며, 신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주문 또한 인도의 이러한 전통과 무관하진 않다.
다만 불교의 주문은 신이 아닌 법(法), 법신(法身)의 소리라 할 수 있다.
이는 주문이 다라니(陀羅尼), 총지(總持), 진언(眞言), 대명주(大明呪), 호주(護呪)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데서 알 수 있다.
‘다라니’란 본래 범어로서 ‘기억’ ‘회상’ ‘유지’ ‘파악’을 의미한다.
즉 ‘무엇인가를 꼭 붙들고 놓치지 않는 행위’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대승불교에서 훨씬 적극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기억해 간직하는 것을
말한다.
즉 다라니에는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총지’라고 번역되는 것이다.
‘진언’이란 밀교에서 법신(法身)인 대일여래(大日如來)께서 말씀하시는 진리의 실상이란 뜻이다.
이것을『반야경(般若經)』에서는 지혜의 완성 또는 근원적인 지혜 자체를 의미하여 대명주(大明呪)
라 하고 있다.
이 대명주를 받아 지킴으로서 재해를 면하게 된다고 설하고 있다.
‘호주’란 말은 남방불교에서 사용하는 빠릿따(paritt )의 번역어로 자주 사용된다.
남방불교권 사용하는 ‘빠릿’이라는 말은 주로 주문이나 그 주문이 적힌 경전 등을 지칭하는데,
어떠한 위험과 악으로부터의 보호, 방어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와 같이 ‘주문’은 법신(法身)의 소리 즉 진리 그 자체의 소리이다.
법의 소리이기에 부처님이 법에 대하여 말씀하신 경전을 압축해 놓은 것이다.
그러기에 위험이나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 있어 주문의 신비한 힘은 ‘법(法)’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부처님의 ‘법’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주문은 불교 수행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런 주문이나 함부로 외우는 것은 극히 위험스러운 것이다.
불교의 여러 수행법이 있지만 주력수행은 다른 어떤 수행법보다 짧은 시간에 강한 체험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주문이 가지고 있는 ‘초월적인 힘’ 때문이다.
주력수행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체험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질병이기 보다는 수행이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또 어느 정도 깊어지면 예언력과 예지력 등의 초능력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대개의 경우 마장이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마장을 극복하고 더욱 수행을 정진하게 되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주문을 통하여 과연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일까’
혹은 ‘주문은 밀교 수행법이며, 따라서 현교의 수행법은 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 그
러한 의문은 불교에 있어서 주문의 신령한 힘의 원천이 어디에서 오는 지를 깊이 생각하여 보면
해답이 보인다.
선(禪)이 우리 땅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주력 수행은 한국불교에서 행해져 왔다.
그리고 역사를 통하여 지금까지 한국불교의 주요한 수행법으로 실천되고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명랑법사가 당나라에서 문두루비법을 배워왔으며, 나당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통하여 두 차례나 당나라 군대를 무찌르고 사천왕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때 밀교종단인 신인종이 탄생하였다.
그 후 혜통 스님에 의하여 총지종이 만들어지게 된다.
‘총지’가 곧 다라니라는 말이니, 총지종이란 다라니를 지송하고 사경하거나 호마법을 통하여 국가의
재앙을 막는 밀교 종파였다.
이는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밀교 종단이 형성되었으며, 그 이전부터 주력수행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일본의 기록에는 백제에 《청관음경》이 널리 유포되었다는 내용이 전한다.
이 경전의 내용은 무량수불과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인데, 그 속에 네 가지의 다라니가
보이며 그것이 등장하게 된 인연이 소개되어 있다.
이는 백제에도 주력수행이 유행했다는 증거이다.
또 해동화엄 초조로 알려진 의상 스님의 〈백화도량발원문〉에도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대비주
(大悲呪)를 외우고 보살의 이름을 부르게 하여 다 같이 원통삼매 성품의 바다에 들기를 발원하나이다”라고 하고 있다. 대비주는 다름 아닌 천수다라니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처럼 삼국시대에 주력 수행이 광범위하게 유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능엄경》이 유행되면서 이 경전에 포함되어 있는 능엄주의 수행법이 자연스럽게 유포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능엄경》은 고려전기 대학자였던 이자현 거사에 의하여 크게 유포되었으며, 이후 한국불교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 고려 후기에는 천태종의 원묘요세가 백련결사를 하는 과정에서 염불수행과 더불어 하루 천 번씩 준제(准提)다라니를 외웠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려시대에도 주력 수행법이 주된 수행법이었음을 말해 준다.
조선시대에도 주력수행은 사찰을 중심으로 하여 신도들 사이에서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러한 증거가 다라니를 묶어 간행한 진언집의 발간이다. 그 시초는 고려말 원나라불교의 영향 속에서 나타나지만,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것은 1485년 발간된 《오대진언집(五大眞言集)》이다. 이 책은 대불정다라니(大佛頂陀羅尼),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陀羅尼), 대비심다라니(大悲心陀羅尼) 등 오대진언을 함께 묶어 간행한 것이다.
근·현대에 와서도 주력 수행은 여전히 유행하고 있다. 우선 총지종, 진각종, 진언종 등 밀교종단들의 출현이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밀교종단의 중심적인 수행법이 바로 주력수행법이니 밀교종단의 출현과 성장은 주력수행을 대중화, 보편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근·현대 주력수행은 비단 밀교종단 성립과 더불어 유행하게 된 것만은 아니다. 근대의 고승인 수월 스님과 용성 스님이 이미 천수다라니 수행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특히 수월 스님의 경우 그의 스승인 경허 스님으로부터 천수다라니 주력을 일생동안 수행할 것을 지도 받고서 자나깨나 천수다라니를 외워 드디어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수월 스님의 주력 수행에 관한 많은 일화가 전해져 오고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경허 스님은 수월 스님의 법기가 무르익었음을 알고 7일 동안의 용맹정진을 허락하였다. 수월 스님은 방석에 앉은 뒤 식음을 전폐하고 ‘대비심다라니’를 외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레 째 되던 날 밤, 아랫마을에서 “불이야”라는 소리와 함께, 온 동네 사람들이 집 밖을 나와 보니 자신들의 집이 아니라 바로 천장암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기둥이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천장암에 있던 수월 스님이 깨달음의 자리에서 내뿜는 방광(放光)이었다.
수월 스님은 조실부모하고 머슴살이로 연명하였는데 글자를 전혀 모르는 까막눈 출신이었다. 이러한 수월 스님에게 스승인 경허 스님은 주력수행을 지도한 것이다. 일자무식의 수월 스님이 일심으로 주력수행을 한 끝에 신이한 능력을 보유함은 물론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수월 스님의 예화는 불자들로 하여금 주력수행의 효과를 믿고 직접 주력수행을 실천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현대에 들어와 주목할 만한 주력수행법은 성철 스님에 의해 퍼지게 된 능엄주와 아비라 기도이다. 능엄주 수행은 현재 백련암 문중의 사찰들을 통해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정착되어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아비라 기도는 성철 스님이 1950년대 중국 총림의 수행법으로 알려진 것을 도입하여 유포시킨 것이다. 그 수행법은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라는 비로자나 법신진언을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암송하는 것이다.
또 힘들게 살던 시절 절에 다니던 한 보살이 있었다. 어느 날 스님에게 알 수 없는 주문 몇 자를 받게 된다. 그것을 외우면 부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말에 지성으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이른 새벽 절구통에 보리쌀을 찧으면서 주문을 외우고, 밥을 하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부지깽이로 장단을 맞추어 가며 주문을 외우고, 밭에 나가 혼자 일을 하면서도 주문을 외웠다. 그렇게 주문을 외우자 가슴 속 알 수 없는 갑갑증도 없어지고, 몸에 있던 병도 하나 둘 사라지게 된다. 그 보살은 더욱 열심히 주문 수행을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삼매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주력 수행은 우리나라의 불자라면 출·재가를 막론하고 우연히 접하게 되지만 쉽게 친숙해 진다. 그만큼 대중적인 수행법이다. 천수다라니와 능엄주 그리고 육자진언 등은 이미 대중들과 친숙한 주문들이다. 이러한 주문은 민간에 널리 유포된 경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천수다라니는《천수경》의 유행과, 능엄주는《능엄경》의 유행과 깊은 관련이 있다. 다만 ‘옴마니반메훔’의 육자진언은 10세기에 한역된 《대승장엄보왕경》에 그 수행의 공덕이 설해져 있지만 이는 유포되지 않았고, 《육자대명왕다리니경》·《육자대명왕경》등 몇 개의 경전들이 우리나라에서 새롭게 찬술되어 유포·유행되었다. 어쩌면 주문은 글을 모르는 민중을 위하여 부처님께서 경전의 내용을 압축해 놓은 것인 지도 모른다.
‘이러한 주력 수행에 무슨 의식과 절차가 필요할까?’ 또는 ‘시간과 공간의 특별한 제약이 없이 언제 어디서나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주력 수행의 장점인데 의식과 절차를 강요하게 되면 오히려 수행력을 더 떨어뜨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모든 수행에 있어 그 절차를 세우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은 일정한 형식의 통일을 통하여 누구나 올바른 수행을 할 수 있게 지도하며, 수행의 본질과 목표를 분명히 하여 수행자를 바른 길로 안내하기 위함이다. 주력 수행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주력 수행의 절차 속에 꼭 필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준비·예경·발원·참회·염송 등으로 압축할 수 있다.
‘준비’ 절차로 우선 주력 수행의 장소를 청결히 하고, 언행과 마음가짐을 청결히 한다. 천수관음상을 모시거나, 석가모니불 혹은 대세지보살을 모신다. 만약 여의치 않으면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모신다. 일정한 기간 동안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 계를 철저히 지킨다.
또 기도하는 공간을 별도로 정하고 그곳을 성스럽게 여겨야 한다. 이를 결계(結界)라 한다. 예전에는 이 결계가 굉장히 강조되었다. 칼을 가지고 주(呪)를 21번을 외운 뒤 땅에 금을 그어 구역을 설정하기도 하고, 깨끗한 물을 가지고 주를 21번 외운 뒤 사방에 뿌려 구역을 설정하기도 했으며, 다섯 가지 빛깔의 실을 가지고 주를 21번 외운 뒤 사방에 둘러쳐서 구역을 설정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예경’이란 주문을 외우기에 앞서 여러 불보살과 천신들 혹은 관세음보살에게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려 예를 올리는 것이다.
‘발원’이란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의 원(願)을 세우는 것이다. 일체의 중생을 건지겠다는 대자비심을 일으키는 발원을 해야 한다.
‘참회’란 자신의 과거의 잘못된 업을 녹이는 행위이다. 신구의(身口意)로 지은 모든 업에 대하여 진실로 참회가 이루어져야 한다.
‘염송’이란 주문을 외우는 것이다. 주문을 외울 때는 주문에 마음을 집중하여 염송해야 하며, 주문의 공덕과 능력에 대하여 의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사찰이나 수행단체를 중심으로 주력수행이 체계적으로 지도되고 있다. 물론 그 수행 절차와 방법이 모두 통일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각 수행처마다 자신의 수행절차를 제시하여 지도하고 있다. 물론 그 공통분모는 준비·예경·발원·참회·염송 등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 우리나라에 수많은 민족종교의 출현은 경신(1860)년 4월 수운 최재우 선생이 하날님으로부터 천명을 받은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동경대전》에 의하면 수운은 이러한 명을 받았다고 한다.
동학이 성경신(誠敬信)을 강조하게 된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주문을 수행하되 먼저 자신의 마음을 지극히 정성스럽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 수운의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주력 수행을 지극히 하면 종종 초자연적인 능력이 생기게 된다. 처음엔 몸이 떨리거나 섬뜩한 기운을 느끼는가 하면, 다라니가 눈앞에 어른거리기도 한다. 주력이 깊어지면 어떤 사람의 전생이 보이기도 하고, 멀리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들리기도 하고, 혹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알게 되기도 한다.
우룡 스님의 주력에 대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스님은 하루 8시간 동안 법당에서 기도하고 나머지 시간은 능엄주에 진력하였다.
60일 내지 70일이 지나자 그날 몇 시에 누가 올 것을 미리 알게 되었는가 하면, 이 삼 십리 밖의 신도의 집이 다 보이는 등 많은 초능력이 생겼다고 한다. 심지어 앞에 선 사람의 몸을 보면 투명체처럼 다 들여다보이고 몸 안의 병을 환히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에 우룡 스님은 금봉 노스님을 찾아가 `지금 자신의 경지가 도를 통한 것인가`를 물었다. 그런데 칭찬받기는 커녕, "이 죽일 놈! 마구니의 자식새끼! 중노릇을 한 것이 아니고 마구니 노릇을 했구나." 하는 금봉 스님의 호통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일체의 바깥출입을 금하고 노스님 곁에서 신통력을 떼는 공부를 하게 된다.
나중에 우룡 스님은 자신이 체험한 경지를 다른 노스님들께 물어보자, 식광(識光)까지는 체험했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경지는 아니었다고 듣게 된다. 즉 신통력의 체험이 깨달음으로 가는 중간 단계의 체험이지 궁극적 지점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필자는 `만약 우룡 스님께서 그 때 선수행자가 아닌 주력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은 스승을 찾아갔더라면 어떠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신통력이 깨달음에 가는 중간 정도의 단계에서 체험하는 것이라면, 혹시 마장에 빠지지 않고 계속 주력수행을 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시지는 않았을까`하는 추측을 해 보는 것이다.
경전에는 보살들이 수행을 통하여 육신통을 얻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육신통이란 천안통 천이통 숙명통 타심통 신족통 누진통을 말한다.
천안통이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신통이다. 천이통이란 보통 귀로 듣지 못할 음성을 듣는 신통이다. 숙명통이란 지나간 세상의 생사를 아는 신통을 말한다. 타심통이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자유자재로 아는 신통을 말한다. 신족통이란 여의통이라고도 하는데, 자유자재로 경계를 나타내거나 날아다니는 신통이다. 누진통이란 자재하게 번뇌를 끊는 신통이다. 보살은 이러한 신통력을 당연히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중생을 제도하는 데 적극 활용하고 있다.
모든 수행은 깨달음을 향해 있다. 그리고 그 길은 미묘하여 체험한 자만이 길을 안내할 수 있다. 주력 수행을 통하여 나타나는 이적과 신통력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 혹하여 그것이 깨달음의 경지인양 착각하여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또 이적과 신통력이 나타나면 무조건 마구니의 장난으로 단정하여 당장 주력수행을 그만둘 일만도 아니다.
부처님의 법에 의지하고 또 주력 수행을 오래하여 법에 대한 안목을 지닌 스승을 찾아 점검과 지도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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