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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율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제정되었는가?

왈선생 2011. 8. 3. 19:20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계율이란 종교인이 준수해야 할 행동규범으로서

해서는 안될 일을 제시한 금지조항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불교의 계율에 대해서도 그렇게 이해한다고 해서 잘못일 리는 없다.

그러나 이런 피상적인 이해로써는 불교가 제시한 계율의 진정한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통상 계율이라고는 하지만, 불교에 있어서 은 그 성격이 다른 것으로 분리되기 때문이다.

불교란 그 성격상 자각의 종교이다.

그래서 수도자는 부처님이 깨달은 것과 같은 진실을 그 자신도 스스로 성취코자 노력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중도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수도자가 진실을 자각하고, 그에 근거한 생활방식으로서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자각을 추구하면서 그에 걸맞는 행위를 하고자 하는 주체적인 생활방식戒라고 한다.

즉, 계는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성격을 지닌 행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단이 커지고 수행자가 많아지게 되자 수행자 개개인의 자각만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새로 출가한 자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훈련이 부족했을 것이며, 그 중에는 전혀 자각이

없는 자도 있었을 것이다.

수행자로서는 허용될 수 없는 행위가 등장하게 된 것도 교단의 증대에 따른 부득이한 일이었을 것이다.

과거의 유행생활로부터 승원에서의 공동생활로 생활방식이 바뀌게 되자, 승원내에는 공동체 전원이

지켜야 할 규칙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다 보니 자연히 해서는 안될 비행도 생겨났을 것이며, 승원내의 물건을

평등하게 분배해야 하는 등의 여러 문제도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 처해 승려들이 개인적으로나 또는 교단의 한 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행위규범으로

정한 것律이라 한다.

계를 편의상 계율이라 칭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는 엄격히 말해서 타율적인 율과는 구별되는

계인 것이다.

즉, 율은 타율적인 성격을 지니고, 따라서 계에 대해서는 위반시의 법칙이 따로 정해지지 않지만 율의

조항을 위반할 시에는 벌칙이 가해지게 된다는 차이가 있다.

원래 계라는 말은 실라(sila)라는 원어를 번역한 것인데, 실라는 습관성ㆍ행위ㆍ성격ㆍ경향 등을 의미한다.

또 실라라는 말 자체는 명상ㆍ봉사ㆍ실천 등을 뜻하는 어원에서 파생하였다.

 따라서 계라는 말은 이미 주체성이나 자율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자율성 등이 선으로도 악으로도 표출될 수 있겠지만, 보통 계라고 할 때는 선한 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 말은 폭넓게 윤리적 행위나 윤리도덕을 뜻하는 개념으로 쓰인다.

이런 계의 대표적인 예가 오계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에 율이라는 말은 비나야Vinaya라는 원어를 번역한 것인데, 비나야라는 말은 제거ㆍ훈련ㆍ교도

등을 의미한다.

이 의미가 전화되어 규칙ㆍ규율ㆍ규범 등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 말 자체가 타율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한역에서는 조복調伏이라고도 하고, 율이라는 말의

원어인 발음을 그대로 옮겨 비나야毘奈耶라고도 쓴다.

율이라는 말이 지니고 있는 원래의 의미는 보통 계율이라는 복합어로써 표현해 버리고, 실제에 있어서

율이나 비나야는 경ㆍ율ㆍ논의 삼장에서 율장을 총칭하는 말로서 쓰인다.

율장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흔히 계율이라고 하는 ‘계의 조목(예를 들어 250계, 350계)’들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과 교단의 운영규정을 통틀어 지칭하는 것이다.

계와 율을 엄밀히 구별하여 말한다면, 오계나 십계 같은 일반적인 계율은 재가신도에게 적용될 때

위반시에도 교단으로부터 타율적인 벌칙이 반드시 가해지는 것이 아니므로 계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승려에게 적용되는 250계나 348계는 위반시에 벌칙이 뒤따르게 되므로 율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별이 실제에 있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계율이란 자율성과 타율성을 함께 지닌다고 알면 될 것이다.

소승의 계율은 율의 취의에 입각한 타율성을 전제로 하는 반면, 대승의 계율은 계의 취의에 따른

자율성을 중시한다.

대승불교가 계율에 대해 엄격해 보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계율들은 부처님이 여러 가지 사항을 예견하고서 한꺼번에 제정한 것이 아니라는 데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

현재 율장에 담겨 있는 계율의 조목들은 필요에 따라서 그때그때 제정된 것을 모은 것이다.

즉, 교단내에 승려들의 어떠한 비행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규제하는 금지조항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식의 계율 제정을 수범수제隨犯隨制라고 한다.

잘못이 있을 때마다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적당한 제재조치를 취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계율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지닌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보수주의자들은 이에 철저히 반대한다.

이런 의견의 차가 결국엔 교단의 분열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부처님 당시를 되돌아볼 때, 45년간의 교화 중에 부처님이 정한 행위규범은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입멸할 무렵이 되어서는 승려의 수도 많이 늘어났을 것이므로 모두가 그 규범의

전부를 그대로 지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와 아울러 승려의 규범에도 그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추세나 자연환경에 따라서 개정해야 할

부분이 있기 마련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가장 많이 들었다는 아난다가 증언했듯이, 부처님 자신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부수적인 율의 조항은 교단에서 원할 경우 폐지해도 좋다고 말했을 것이다.

계율 제정의 정신으로 보아 아난다의 증언은 사실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즉, 율이라는 것이 성격상 어떤 획일적인 내용으로 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의 권위를 중시하고 혼란을 염려하는 여론에 밀려, 제1결집에서 막상 계율을 다시

정리할 때는 “부처님이 제정하지 않은 조항은 새로 제정하지 말고, 부처님이 제정한 조항은 버리지

말고 지키도록 한다”고 총괄해 버림으로써 당시의 계율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변천할수록 계율의 문제는 커다란 과제로서 대두될 수밖에 없다.

초기에는 이러한 문제를 예외규정으로 해결했다.

이는 사실상 계율 적용의 융통성을 인정한 것이고, 아울러 수범수제의 정신을 응용한 것이다.

이 점을 인정한다면 계율은 합리적이고 실질적인 운용을 위해 재해석되고 보완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