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행동방향은 마땅히 악을 여의고 선을 행하는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괴로움보다는 즐거움을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즐거움을 가져오는것은 자신의 선업 이외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 왔는가? 선업보다는 악업을 익혀왔음이 사실이다.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면서도 불행을 가져오는 악업을 일삼아 왔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괴로운 상황에서는 선보다는 악을 행하기가 더 쉬워 일단 악에 빠지면 끝없는 악의 순환이 있게 된다.
인간의 이러한 무지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악업을 타파하는 일부터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석가모니께서는 먼저
악업부터 설명하고 계신다.
"몸 세 가지 악업을 짓고, 괴로운 보를 받나니, 그것은 곧
살생(殺生), 투도(倫盜), 사음(邪淫)이다.
입(言語)으로 네 가지 악업을 짖고, 괴로운 보 받나니, 그것은 곧
망어(妄語: 거짓말), 양설(兩舌: 두말), 악구(惡口: 욕지거리), 기어(綺語: 꾸밈말)이다
의지로 세 가지 악업을 짓고, 괴로움을 받나니, 그것은 곧
탐욕(貪慾), 진에(瞋恚), 치암(痢暗)이다. "(중아함 권3 思經)
이상 열 가지를 십악업(十惡業)이라고 하는데,
십악업의 부정은 곧 십선업(十善業)이 될 것이다.
따라서 십선업은 따로 시설하지 않고
십악업에 부정 접두사 `불,무(不·無)`를 덧불여 이를 표현함이 보통이다. 즉
몸으로 짖는 세 가지 선업은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倫盜), 불사음(不邪淫)이고,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선업은
불망어(不妄語), 불양설(不兩舌), 볼악구(不惡ㅁ), 불기어(不綺語)이고,
의지로 짖는 세 가지 선업은
무탐(無貪), 無恚(무에), 정견(正見=無痴)이다. (잡아함 권28)
십선업을 적극적인 개념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물론 없지 않다. 가령
불살생은 방생으로,
불투도는 보시로, 그러나 십악업의 반대 개념으로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다.
몸으로 짓는 삼업(三業)과,
입으로 짓는 사업(四業)과,
의지로 짓는 삼업(三業)가운데서, 근본이 되는 것은 의지로 짓는 삼업이다.
업은 본래 의지에서 발생하여 언어 또는 신체적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계파가 신벌(身罰)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는데 대해서 불교에서는 의업(意業)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본다.
(중아함 권32優姿離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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