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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동지(冬至)

왈선생 2011. 3. 13. 11:02

동지는 일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입니다.
이때는 태양이 남회귀선, 적도 이남 23.5도인 동지선에 도달한 시절로 해가 하늘에 머무는 시간이 가장 짧으므로 반대로 밤은 가장 길게 되는 것입니다.

지구의 우리 반대편인 남반부에서는 당연히 이날이 하지에 해당하니 밤이 짧고 낮이 길겠지요. 즉, 북반구의 우리는 동지에 해당되지만, 남반구 사람들에게는 하지가 됩니다. 하늘의 절기도 역시 고정된 바가 없다 하겠습니다. 동지인 이날부터 하지가 될 때까지는 다시 낮이 점점 길어집니다.

동지는 원래 상고시대에는 새해의 기점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즉, 중국 고대의 주나라와 당나라 때에도 동지를 설로 잡고 달력의 시작으로 삼았으니 이는 태양의 운동이 시작되는 날을 동지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지는 묵은 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음에 잡귀와 재앙을 멀리하고 복을 구하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부처님 전에 간절한 마음으로 지난해를 참회하면서 소원을 빌어 복을 구하는 것이며, 항상 부처님과 함께 하겠다는 발원의 의미로 동짓날 부처님 전에 불자들의 광명과 지혜를 상징하는 붉은 팥죽공양을 올리는 것은 부처님 가피로 모든 악귀를 몰아내는 원화소복(遠禍召福)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불교에서의 동지의 유래

우리나라에서는 동지를 귀한 날로 여기고 있으나 언제부터 그래왔는 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습니다. 옛날 중국 총림(叢林)<대중 스님들이 모여 사는 선원>에서는 동재라 하여 절의 주지스님이나 일반신도가 시주가 되어 동짓날에 대중을 위하여 베푸는 재회를 봉행(奉行)하였습니다.

총림의 4절은
<결하(結夏); 여름결제><해하((解夏); 여름해제><동지><연조>를 말하며, 그 중 동지를 동년이라 하여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여 왔으며, 동지의 전야를 동야(冬夜)라 하여 성대하게 치뤄왔습니다. 서양의 크리스마스 이브도 바로 이 동지의 전야를 동야라 하는  풍습에서 전해진 것이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불교에서 동지의 전야를 크게 중요시한 것은 연말연시를 맞아 젊은 스님들이 은사스님이나 스승님을 찾아 뵙고, 일년 동안의 가르침에 감사함을 회향하는 뜻에서 인사를 하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팥죽의 유래

가. 민간에서 전해지는 팥죽의 유래

엣날 중국 진나라의 공공이라는 사람에게는 늘 말썽을 부려 속을 썩이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아들 때문에 하루도 맘 편한 날이 없었는데, 어느 동짓날 그 아들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죽은 아들은 그만 역질 귀신이 되고 만 것입니다.

역질이란 천연두라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그 당시에는 역질이 마을에 돌면 마을 사람들 대부분 꼼짝없이 앓다가 죽어 버리니 공공은 자신의 아들이었다 해도 그냥 둘 수가 없었습니다.

공공은 생전에 아들이 팥을 무서워했다는 기억을 떠올리고는 팥죽을 쑤어 대문간과 마당 구석구석에 뿌렸습니다. 효과가 있었던지 그 날 이후로 역질은 사라졌고 이를 본받아 사람들은 역질 귀신을 물리치기 위해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쑤었다고 합니다. 옛사람들은 붉은 색은 귀신들이 싫어하는 색이라고 생각했기에 곡식들 중에서도 유난히 붉은 색을 지닌 팥을 그런 용도로 사용했다 합니다.

나. 불교에서의 팥죽의 유래

옛날 신라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젊은 선비가 살았는데, 사람은 참으로 진실하였으나, 집안이 궁핍하였습니다.
어느날 과객이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고자 하여 쉬어가게 해주었더니, 다음날 새벽 길을 떠나기 앞서 그 과객은 선비에게 서로 친구가 되자고 하였습니다. 이후로 그 과객은 선비에게 종종 찾아와 내년에 벼를 심으라 하면 벼가 풍년이 들고, 고추를 심으라 하여 고추를 심으면 고추농사가 풍년이 되는 등, 수년간 많은 재산을 모으게 하여 그 선비를 부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허나, 이상한 것이 그 과객은 늘 한밤중에 찾아와서는 날이 새기 전 닭이 울면 사라졌습니다. 주인인 선비는 재물은 남부러울 것 없이 많이 모았으나, 세월이 갈수록 몸이 계속 야위어가더니 마침내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병색이 너무나 심하게 짙어지자, 그 선비는 어느 스님에게 여쭈어 보았는데, 스님께서는 그 과객에게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냐? 고 물어보라 하였습니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 그 과객은 백마의 피를 가장 싫어한다고 하였습니다.
젊은 선비는 스님의 말씀을 새겨들은 이후로, 점점 그 과객이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선비는 자기 집의 백마를 잡아 온 집안 구석구석 백마의 피를 뿌렸더니 그동안 친절하던 과객이 도깨비로 변해 도망을 가면서 선비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 선비는 건강이 다시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동짓날이면 이 과객이 잊지않고 찾아오는지라 젊은 선비가 스님께 해마다 백마를 잡아서 피를 바를 수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방도를 묻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그렇다면 팥물이 백마의 피와 빛깔이 같으니 백마의 피 대신 팥죽을 쑤어 그것을 집에 뿌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동짓날 팥죽을 끊이는 유래라 하기도 합니다.

삼국지의 전략가 제갈량이 남만(베트남)을 평정하러 갔을 때 노수의 귀신들이 사람의 목을 원하는지라 밀가루로 사람의 머리 모양을 만들어서 제사를 지낸 것이 만두의 유래라는 이야기를 꺼내며, 자비정신이 넘치는 불교의 동지 이야기가 만두의 전설과 비슷한 점은 바로 불교의 불살생(不殺生) 자비 방생이 그 근원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견해를 밝히는 이도 있습니다.

또 초순에 동지가 들면 그 해는 애기 동지라 하여 일반가정에서는 팥죽을 끊이지 않고 절에 가서 팥죽을 먹고 돌아오는 풍습도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동지의 전통을 사찰에서 맛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민속을 종교적 차원에서 받아들여 더욱 그 의미를 심화시킨 불가의 동지절 행사, 이런 전통의 향기를 지켜온 불교인들이 이제 다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마음의 불씨를 일체 모든 생명들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동지에 얽힌 불교 설화

1) 선덕여왕과 지귀

선덕여왕은 신라 제 27대 임금으로 부처님에 대한 신심이 아주
돈독하여 국사를 돌보는 바쁜 중에서도 매일 조석으로 황룡사에 가서 예불 올리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합니다.

어느 날 저녁 여왕이 예불을 드리러 가는 도중에 난데없이 어떤 남자가 여왕의 행차에 뛰어들어 소란을 피우기에 여왕은 시종을 시켜 그 남자에게 연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소란을 피운 남자가 말하기를, "소인은 지귀(志鬼)라고 하는데 평소부터 여왕님을 남몰래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여왕님의 예불 행차를 몰래 지켜보기 여러날이었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왕이 재차 묻기를, "행차를 늘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냐?" 하니 지귀가, "예, 그러하옵니다. 하오나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여왕마마께 제 연모하는 마음을 하소연하려고 행차에 뛰어든 것입니다."

원래 자비로운 품성의 소유자인 선덕여왕은 그를 참으로 가엽게 생각하여 황룡사까지 동행하게 하였습니다. 이윽고 황룡사에 도착하여 절문 앞의 9층탑 곁에 이르자 여왕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지귀에게 말하기를. "내가 부처님께 예불을 마치고 그대를 궁으로 데리고 갈 것이니 이곳에서 잠깐만 기다리거라"

그러나 밖에 남게 된 지귀는 일각이 여삼추라 예불 시간도 채 기다리지 못하고, 마음에 심화(心火)가 끊어 올라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참, 지귀란 양반 성미도 급하지. 그 후에 죽은 지귀는 그야말로 사랑에 한을 품고 죽은 몽달귀신이 되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니 신라의 방방곡곡에는 이 지귀의 행패가 심하여 많은 사람이 해를 입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이 지귀 귀신의 달래주기 위한 방편으로 해마다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끓여 집집마다 대문에 뿌리고 길에도 뿌렸더니 귀신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2) 팥죽과 나한님
동짓날에 절에서는 팥죽을 쑤어 대웅전이며 나한전 등에 공양을 올리고 온 대중이 팥죽으로 공양을 하며 한 해의 묵은 때를 벗어버리고 새해를 맞이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하사라는 절의 공양주 보살은 그만 동짓날 늦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공양주 보살. 아니 오늘이 무슨 날인데 잠만 자고 있습니까?
빨리 일어나세요"

스님의 호령 소리에 겨우 기지개를 펴고 나오던 공양주 보살은, "허 참, 오늘이 바로 동짓날 아닙니까? 동짓날! 빨리 팥죽을 쑤어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야지요." 하는 말에 그만 정신이 번쩍 들어 황급히 부엌으로 달려갔지만, 늦잠을 잔 덕분에 아궁이의 불씨마저 꺼져 버리고 회색 재만 남아 있었습니다.

옛날인지라 불씨가 다 사그라들고 없어져버리면 불씨를 다시 얻어 오기 전에는 부엌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양주 보살은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눈앞이 캄캄해 질 수 밖에요.
부처님께 죄송한 마음은 둘째 치고 당장 주지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 만 같아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결국 생각다 못한 공양주 보살은 절 아래 동네의 김서방네 집에 가서 불씨를 얻어오려고 부리나케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그 날 따라 찬바람이 쌩쌩 불고 눈은 발목까지 푹푹 빠지니 김서방네 집은 천리 만리나 되는 것 같았습니다. 겨우 김서방네 집에 도착한 공양주 보살은 큰 소리로 김서방을 불러 자초지종 사정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김서방은, "아까 행자님이 오셔서 불씨를 얻어 갔는데 불이 또 꺼졌나요?" 하며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행자님이라니요? 우리 절에는 행자님이 없는데요?" "그래요? 하지만 조금 전에 어떤 행자님이 와서 배가 고프다고 하시면서 팥죽까지 한 그릇 드시고 불씨도 얻어가셨는데요"

마하사에는 행자 스님이라곤 없었으니, 공양주 보살은 마치 귀신에 흘린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급한 마음에 불씨를 빌려 가까스로 절에 도착했으나 더욱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부엌의 아궁이에 장작불이 활활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공양주 보살은 급히 서둘러 팥죽을 쑤어 먼저 법당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곧 나한전으로 팥죽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나한님께 팥죽을 올리던 공양주 보살은 그만 까무러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공양주를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고 계시는 나한님의 입가에 붉은 팥죽이 묻어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고, 나한님. 잘못했습니다."

공양주 보살은 그대로 엎드려 크게 절을 올렸습니다. 김서방네 집에서 팥죽을 얻어 드시고 불씨를 얻어다가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핀 행자는 바로 그 나한님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절에나 나한전에 모신 나한님은 모두가 미소를 머금고 계시고 그 입술은 한결같이 붉은 색인데, 이는 바로 동짓날 드신 그 팥죽이 묻어있기 때문이라고 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