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불교

라지기르 [Rajgir] / 죽림정사 [竹林精舍]

왈선생 2011. 8. 21. 16:54

 

 

 

 

 

 

 

 

 

 

 

 

 

 

 

 

 

 

 

 

죽림정사 [竹林精舍] 


중인도의 마가다국에 있었던 최초의 불교 정사(精舍), 즉 지금의 사찰. 

천축국(天竺國) 다섯 정사의 하나이며 인도 승원(僧園)의 시초이다. 산스크리트 베누바나 비하라의 번역어이다. 가란타(迦蘭陀) 장자(長者)가 자기 소유의 죽림을 헌상하고, 마가다 국왕 빔비사라가 건립하여 불교 교단에 기증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가장 많이 이용된 사찰로서 석가의 교단이 기반을 구축한 곳으로 유명하다.

[출처] 죽림정사 [竹林精舍 ] | 네이버 백과사전

 

 

왕사성과 죽림정사가 있었던 라즈기르


인도대륙 최대의 불적지군(佛蹟地群)

보드가야를 떠난 혜초 사문의 발길은 자연스레 라즈기르에 도착했다. 흔히들 불교의 ‘4대 성지’를 말할 때 붓다의 탄생지 룸비니, 성도지 보드가야, 초전법륜지 사르나트, 입멸지 쿠시나가르를 꼽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혜초 사문은 룸비니 대신에 라즈기르의 왕사성을 들고 있다. 이는 그만큼 혜초가 라즈기르를 중요시하여 이 곳에 오래 머물며 보고 듣고 했음을 의미한다.


혜초가 왔을 당시의 이름이 라자가하(Rajagaha)였던 왕사성 주변에는 불적이 즐비했다고 한다. 현재, 찬란했던 불적들이 철저히 파괴된 인도대륙에서, 그래도 초기불교의 체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을 들라면 우선 라즈기르를 먼저 꼽을 만큼 이 곳에는 아직도 초기불교의 기념비적인 흔적들이 즐비하다.

라자가하는 붓다의 생존시에 존재했던 마가다(摩揭陀)왕국의 수도였다. 이 마가다국은 ‘고대 16국’의 선두주자 중 하나였다. 이런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던 신흥대국의 국왕 빔비사라(Bimbisara)는 붓다의 45년간에 걸친 전법 일생에서의 첫 강력한 후원자였다.

왕은 붓다와 그 제자들을 위해 수행처, 즉 죽림정사를 마련해주고 우안거 동안의 수행지인 영취산으로 가는 전용도로도 닦아주었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그리고 부친의 왕위를 찬탈한 아들 아자타사투루왕도 마찬가지여서 이 때 불교는 교단, 즉 ‘상가람(Sangharam, 僧伽)’의 기틀을 갖출 수 있었다.


불교는 처음부터 종교로 시작되지는 않았다. 단지 사회 개혁 성향의 신진사상이었을 뿐이었다. 수행자 고타마의 주장은 인간평등에 있었다. 특히 인도의 뿌리 깊은 카스트(Cast) 제도의 타파에 있었다.

그는 민중에 편에 서서 “사람은 누구나 출생에 따라서 신분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브라만은 출생에 의한 것이 아니고 행위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라는, 당시에는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온 선언을 했고 이를 평생 실천했다.


물론 고타마 자신도 브라만이 아니었기도 했었지만 당시는 브라만이 주도해온 사회가 사제들의 부패로 많은 병폐가 드러나고 있었을 때였기에 도처에서 반(反) 브라만 사상이 성숙되던 시기였다. 이런 결과로 고타마 사문은 브라만 사회에서는 기피인물로 배척을 받았지만, 반면 사제의 전횡을 못마땅해하던 신흥국가 왕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는 국왕들의 통치와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진 원인도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국왕은 브라만의 견제세력으로 불교라는 신흥사상을 이용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의 권력과 금력은 종교라는 집단이 거대해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었기에 불교는 붓다 재세시(在世時) 이미 ‘종교’의 골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죽림정사(竹林精舍)

 

이때 니련선하(尼連禪河)의 하류에는 우루빌바 카사파의 두 동생인 나디 카사파(Nadikaspa)와 가야 카사파(Gayaksapa)가 각각 300명과 200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역시 형과 같이 불의 신 아그니를 모시며 교단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형님의 뒤를 따라 모두 붓다의 구족계를 받고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카사파 삼형제와 그들이 거느린 일천 명의 제자들이 모두 부처님께 들어오면서 붓다의 승가(Sangha)는 일거에 마가다국 제일의 교단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한동안 제자들을 가르치기에 열중했던 붓다는 이제 어느 정도 불자로서의 입문교육이 끝났다고 보고 일천 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마가다(Magadha)의 수도 라즈기르(Raja-grha,王舍城 )를 바라보고 떠났다.

부처님이 일천 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마가다의 서울인 라즈기르(王舍城)의 서남쪽 교외에 있는 랏티바나라 숲 속까지 진출한 후 스파티타 묘(廟)에서 쉬고 있을 즈음, 부처님과 카사파 삼형제의 놀라운 이야기가 빠른 속도로 왕사성에 전해지고 있었고 이 놀라운 소식은 빔비사라(Bimbisara)왕에게 보고되었다.
“샤카무늬(釋迦牟尼)라고 했느냐? 그러면 몇 년 전에 이곳에 왔었던 그 샤카족의 태자인 싯다르타가 아닌가? 그때 그 태자는 나와 약속하기를 그가 성도(成道)하여 붓다(Budha, 佛陀)가 되면 반드시 나를 찾아와 그의 깨달음을 들려주겠다고 한 일이 있지 않았던가.
만약 이 나라에서 제일 높은 카사파 바라문께서 스스로 아그니의 신전을 부수고 그 샤카무늬에게 귀의하셨다면 이것이야말로 싯다르타 태자가 이미 붓다가 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빔비사라(Bimbisara)왕은 곧 사자를 파견하여 붓다를 초청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분들을 맞을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였다.

빔비사라(Bimbisara)왕의 특명을 받은 사자가 왕의 초청편지를 들고 아직까지 스파티타 묘(廟)에서 쉬고 있는 붓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바람같이 달려 나갔다. 한편 라즈기르 성내에서도 붓다 일행을 맞기 위해 모든 거리와 골목이 깨끗이 청소되었고 꽃을 놓아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하루 이틀 기다리던 빔비사라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백성 수만 명을 이끌고 붓다를 만나기 위하여 라즈기르의 동쪽 바이바라(Vaibhara) 언덕과 소나(Sona) 언덕 사이에 위치한 제티안(Jethian, 杖林)까지 나아갔을 때, 마침 왕의 초청을 받고 라즈기르로 향해 오고 있던 붓다의 일행과 마주치게 되었다. 왕은 즉시 코끼리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고 붓다를 맞았다.

실로 오래간만에 다시 만난 붓다와 빔비사라왕은 곧 제티안(Jethian, 杖林)숲의 시원한 그늘을 찾아 마주 앉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싯다르타 태자가 장차 차크라 바르틴(Cakra-Varti-raja, 轉輪聖王)이 되기 위하여 마가다를 염탐하러 오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가지고 만났었다. 그러나 이번엔 샤카무늬(釋迦牟尼)가 붓다(佛陀)가 되어 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빔비사라왕은 너무나 벅찬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붓다에게 고백한다.

“붓다여, 나는 아직 태자였을 때 다섯 가지 소원이 있었는데 지금 그것들을 모두 성취했습니다. 그것들은 첫째, 관정(Abhiseka, 灌頂)을 받아 국왕이 되는 것. 둘째, 나의 영토에 성자인 정등각자(正等覺者)가 오는 것. 셋째, 붓다를 내가 모시는 것. 넷째 붓다의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것.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깨달음을 얻는 것들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내가 비록 마가다의 국왕이지만 그동안 복을 닦으려고 불신(火神, Agni)을 섬기며 우루빌바 카사파를 도와 거대한 신전을 지어 올려 공덕을 쌓아갔습니다. 그렇게도 불을 섬기고 주술을 닦았는데, 욕망은 더욱 커져만 갔고 번뇌 또한 더 커져서 이제는 견딜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부디 법문을 들려주십시오.”

“대왕이시여, 우선 ‘나’와 ‘내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법(法)에는 ‘나(我)’라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나’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은 의식이 특별한 형태로 나타났을 때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나’가 있음으로 해서 온갖 불행과 괴로움, 분노와 원한 등이 생깁니다.”

“대왕이시여, 우리들의 육체도 의식이 있음으로 해서 확실해지는 것입니다. 의식이 없다면 육체란 돌과 같아서 번민도 있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나(我)’라는 생각은 나와 반대에 있는 상황이 부딪혔을 때 반짝 공중에 떠오르는 생각인 것입니다. 그것은 돌과 돌이 부딪혀 불꽃이 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불꽃은 돌의 것입니까? 아니면 누구의 것입니까?
대왕이시여, ‘나’라고 하는 것은 그 불꽃과 같은 한순간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이 조그마한 진리를 알기 위하여 6년간의 수행이 필요 했습니다. ‘나’를 잊어버리고 백성을 생각하고도 ‘나’를 잊어버리고 중생을 걱정하며 ‘나’도 ‘중생’도 잊어버리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완전히 없게 되어 마음이 우주에 확대될 때 비로소 열반에 들 수 있는 것입니다.
대왕이시여, 그곳에는 생(生) 사(死)가 없습니다. 그곳에 ‘나(我)’란 없으므로 태어나기 이전, 죽음의 이후도 없는 것입니다.”

붓다의 설법을 듣고 있는 동안 빔비사라왕은 그 마음이 점점 맑아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기쁜 환희를 조금이라도 더 맛보기 위하여 왕은 붓다와 그의 일천 명 제자들을 모두 초청하여 왕으로서는 첫 번째의 공양(Pujana)을 올린다. 이때 카란다라는 사람이 빔비사라왕과 붓다 앞에 조용히 다가왔다.

“붓다시여, 저는 카란다(Karanda)라는 사람이옵니다. 어제부터 붓다의 설법을 듣고 많은 깨달음을 얻고 있사옵니다. 붓다의 고마움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이렇게 찾아 왔나이다. 어젯밤 곰곰히 생각해보니 붓다께서 언제까지나, 이곳에 계실 리가 없으시겠기에 불안했습니다. 저는 붓다를 가까이 모시고 그 귀중한 말씀을 계속 듣고 싶은데, 만약 붓다께서 훌쩍 떠나버리시면 제 생활기반을 버리고 따라갈 수밖에 없지 않겠사옵니까.”

“카란다 장자여, 너의 마음이 과연 나의 마음과 똑같구나. 나도 지금 부처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는 사원을 지어드릴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곳은 이곳에서 너무 멀어서는 곤란하고 또 너무 가까워도 안된다고 생각된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붓다를 찾아뵙고자 할 때는 쉽게 찾아갈 수가 있어야만 하고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너무 번거롭게 해서도 안 되는 곳, 밤에는 소리가 없어 조용하고 홀로 앉아있기에도 알맞은 곳, 그런 곳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로다.”

“그런 곳이라면 제가 소유하고 있는 베누바나(Venuvana) 동산밖에 없사옵니다. 그곳이 바로 대왕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런 곳으로 싱싱한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는 아름다운 곳으로 죽림원(竹林園)이옵니다. 제가 기꺼이 그 곳을 붓다께 바칠 것이니 대왕께서는 그 곳에 아름다운 사원을 지어주소서. 그리하여 붓다를 그 곳에 머물게 하시면 우리 모두의 소원을 풀 수 있게 되옵니다.”

“아, 그 생각 참으로 갸륵하도다. 네가 정말로 아름다운 베누바나 동산을 바친다면 내 그곳에 인도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원을 지어 붓다께 바칠 것이다. 이로써 우리 마가다국은 이 세상에서 부처님을 모시는 유일한 나라가 될 것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마가다의 백성들은 모두 번뇌의 고통으로부터 해탈하는 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니 이보다 더 큰 경사가 어디 또 있겠는가. 사원의 건설은 내일부터 곧 착수하여 우기가 오기 전에 완성할 수 있도록 전 국력을 기울일 것이다.”

이리하여 불교 최초의 절 '죽림정사(竹林精舍)'가 지어지게 되었다.

 

죽림정사(竹林精舍)는 ‘Venuvana-Kalanda-Kanivapa’ (베누바다 카란다 카니바파)라 불리우는데 베누바나(Venuvna)는 대나무동산(竹林園)이고 카란다(Kalanda)는 동산을 기증한 부호장자의 이름이며, 카니바파(Kanivapa)는 ‘다람쥐를 먹이는 장소’라는 뜻이다. 정사(精舍)의 경내에는 아름다운 연못이 있었다 한다.

불교 교단 최초의 절(寺) '죽림정사(Venuvana)'가 완성되자 '사르나트(Sarnath)'에서 포교를 하기 위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던 제자들도 차츰 이곳으로 모여 들었다. 이것으로 불교(佛敎)교단의 무궁한 발전을 위한 본격적인 궤도 진입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출처-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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