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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 대왕 신종(聖德大王神鍾)

왈선생 2011. 8. 3. 16:42

성덕 대왕 신종(聖德大王神鍾) (별칭; 에밀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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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대왕신종

 

비천상 

 천인상

 용뉴(龍紐)와음통(音筒)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천 3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다.

 

봉덕사의 종이라고도 불리는 에밀레종은 신라가 망한 다음 천덕꾸러기가 됐다. 길가에 방치되었다가 20세기 초가 돼서야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는다. 국내 범종들 가운데 소리가 으뜸이다.

다른 종들과는 달리 아주 멋진 용머리 모양 장식이 갖춰져 있고 운치 있는 소리의 비밀은 바로 그 용두에 있다. 몸체로 퍼지는 소리 진동이 일단 용두에 모였다 아래로 퍼진다. 그런데 정말 종 속에 아이를 넣어 주조했을까?

종신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경건한 자세로 천년의 신비를 풀어내는 순간이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시간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스님 한 분이 나타났다.

“아밀리가 에밀레야.”

단 한마디 소리를 들려주고는 어디론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아밀리는 극락세계를 가리키는 고대 산스크리트어다.

… 아밀리… 애밀리… 에밀레.

다시 스님을 불렀다.

“난 에밀레종을 수호하는 석천이라는 승려입니다.”

“종을 만들 때 정말 아이를 집어넣었나요?”

스님은 대답 대신 허리춤에서 뭔가 꺼내 보여준다. 그것은 작은 종이 조각이었다. 잘 펴보니 거기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아미리국위천(阿彌利國爲天:아미리는 하늘이다).’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벌써 20여년 동안 공을 들였으나 번번이 종이 깨지고 제소리를 내지 못했다. 물론 만드는 기술이 모자란 탓도 있었으나 그보다 하늘의 도움이 모자랐던 것이다. 종을 만드는 사람들은 사람의 힘만 가지고는 도저히 훌륭한 종을 만들 수 없음을 깨닫고 생명을 집어넣는 희생주술을 치르기로 하였다. 갓난아이를 수소문하여 종에 넣기로 했다.

그러나 봉덕사는 성덕대왕의 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절이었다. 경건하게 울릴 종을 만드는 데 인간의 생명을 희생해야 한다는 근본적 모순을 극복할 만한 명분이 따르지 않았다. 말하자면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전통 고유신앙과 살생하면 안 된다는 불교신앙이 서로 대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동안 그 문제로 시끄러웠다.

“불살생의 법도를 깰 수는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넣었다고 거짓 소문을 냈습니다. 그리고 종의 이름을 아미리종이라고 불렀지요. 사후에 극락세계로 가게 해주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아이가 희생된 것으로 믿었고 아미리종을 에밀레종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엄마를 원망하는 아이가 우는 소리처럼 에밀레, 에밀레 하는 여운이 들립니다.”

예상한 그대로 최근의 성분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에밀레종에는 인체의 성분이 들어 있지 않은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김세환 대영계연구소장


에밀레종의 신비

경주에 오는 사람은 거의 모두 경주박물관에 들른다. 박물관에 들른 사람은 또한 거의 모두 정문과 마주하고 있는 에밀레종을 둘러보고 간다. 그들이 저 종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동을 갖고 돌아갈 것인가? 어린애를 희생해서 만들었다는 잔인한 전설을 기억했을 것이고, 비천상의 아름다운 돋을새김, 화려하기 그지없는 보상당초무늬에 눈길이 닿았다면 그래도 안정된 정서를 가진 관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위대하다는 존대의 감정을 갖고 갔을 것인가?

아닐 것이다. 과학문명과 온갖 기술이 발달된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에밀레종을 만드는 정도의 기술에 놀랄 리 만무하다. 1,200년 전에 제법 큰 종을 만든 것이 대견하다는 정도의 가벼운 칭찬 정도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단연코 말하건대 에밀레종은 인간이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 유물이 아니다. 에밀레종 이전에도 없었고 에밀레종 이후에도 없는, 오직 에밀레종 하나가 있을 따름이다.

20세기 복제품의 실패

1986년에 우리는 두 차례에 걸쳐 에밀레종 복제품을 만들었다. 그 하나는 아메리카 건국 200주년을 기념하는 선물로 제작되어 '우정의 종'이라는 이름이 붙은 종으로 지금 로스앤젤레스, 태평양이 바라보이는 어느 공원 언덕에 설치되어 있다. 1987년 내가 미국에 10개월간 있었을 때 나는 이 공원에 올라가 에밀레종 복제품을 몰래 쳐보았다. 그것은 종소리가 아니라 깡통 두드리는 소리였다. 형태도 흉내만 냈지 장중하고 유려한 기품을 갖춘 것이 아니었다. 또 하나는 서울 보신각이 이제 수명을 다하여 더 이상 타종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이것을 국립중앙박물관 후원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새 종을 만들면서 에밀레종을 복제하였다. 그러나 문양구성을 현대에 맞춘다고 바꾼 것이 촌스러운 것은 그렇다 치고 우선 종소리가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해마다 12월 31일 자정이 되면 제야의 종이 울린다. 보신각종도 울리고 에밀레종도 울린다. 텔레비전은 이것을 생중계하는데 항시 보신각종-정확히는 에밀레종 복제품-을 먼저 보여주고 다음에 뒤이어 에밀레종의 타종을 중계한다. 아무리 음치이고 아무리 소리에 둔한 사람이라도 진짜와 가짜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단박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가짜는 재겨운 쇳소리를 내면서 터지는 소리가 나오고, 진짜는 명문(銘文)에 씌어 있는대로 '장중한 원음(圓音)'을 낸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과학기술로 따진다면 몇천만 곱 발달한 우리 시대에 왜 1,200년 전 종소리를 따라잡지 못했을까? 그것은 단 한가지 이유, 즉 제작하는 정신자세 내지 정신이 이 시대에는 에밀레 종소리를 도저히 흉내낼 수도 없게된 점에 있는 것이다.

종소리는 부처님 목소리

20세기 복제품은 겉껍질만 흉내내기에 급급했지 정작 중요한 사항, '종은 종소리가 좋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거의 무감각 내지 무신경했던 것이다. 에밀레종을 만들던 사람들이 훌륭한 종소리를 내기 위하여 얼마나 고심하였는가는 에밀레종 몸체에 새겨져 있는 1,000여 자의 명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무릇 심오한 진리는 가시적인 형상 이외의 것도 포함하나니 눈으로 보면서도 알지 못하며, 진리의 소리가 천지간에 진동하여도 그 메아리의 근본을 알지 못한다. 그런고로 부처님께서는 때와 사람에 따라 적절히 비유하여 진리를 알게 하듯이 신종(神鐘)을 달아 진리의 둥근소리(圓音)를 듣게 하셨다. 무릇 종소리란... 그 메아리가 끊이지 않으니 장중해서 옮기기 힘들며, 함부로 다루지 못한다."

종소리는 곧 진리의 원음이었던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글로 옮겨 적으면 불경이 되고,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으로 옮겨 놓으면 불상이 되고, 부처님의 목소리를 옮겨 놓은 것이 종소리였던 것이다. 시대정신이 퇴락하면 다시는 그 정신이 되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인간사의 법칙 같은 것이다.

우리시대는 자동차나 컴퓨터는 만들어도 에밀레종을 복제해낼 능력은 완전히 상실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게 되었다. 왜 1,200년을 두고 변함없이 울려왔던 에밀레종소리가 그치게 되었는가? 에밀레종에는 지금도 아무 이상이 없다. 금이 가거나 깨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영원히 보존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것이 문화재 관리자들의 생각이겠지만, 불국사에 계신 월산스님의 말을 빌리면 "종은 쳐야 녹슬지 않는 법이다. 만물이 자기 기능을 잃으면 생명이 끊어지듯이." 게다가 지금은 종 앞에 달려 있는 나무봉마저 거두어버렸으니 에밀레종은 그야말로 박물관 유물로 된 셈이다. 프랑스 평론가 말을 빌려 "명작들의 공동묘지"에 안치된 것이다.

에밀레종 옮길 때의 이야기

경주 법원 뒤쪽에 있는 구경주박물관에 있던 에밀레종을, 1975년 이른 봄부터 6월까지 새로 지은 현재의 박물관으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 때의 숨은 얘기는 소불선생(당시 경주박물관장 정양모씨)이 "이제야 털어놓는 에밀레종 옮길 때의 이야기"(한국인 1985년 11월호)에 그 일부를 써놓은 바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 부끄럽고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당시 경주박물관장을 지내고 있던 소불선생은 이 위대한 종을 무사히 옮겨 거는 일, 거기에 걸맞은 예우를 하는 일로 무척 고심했다고 한다. 다시는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이 신종에 어떤 손상이 간다는 것은 영원한 죄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에밀레종을 새 박물관으로 옮기는 일은 대한통운이 맡았다. 에밀레종은 높이가 3.7m, 무게가 22톤이다. 이것을 운반하기 위해 포장을 하니 높이가 5m, 무게가 30톤이 되었다. 이것을 트레일러에 올려놓으니 또 6m가 넘게 되고 트레일러 무게와 합치면 50톤이 넘게 되었다.

28톤 강괴를 빌려주시오

소불선생은 이렇게 에밀레종을 신관 새 종각에 옮겨다 놓았지만 이제는 이것을 안전하게 거는 일이 태산 같은 걱정이었다. 종각이 부실공사가 아닐까 걱정도 되고 공사자들이 신식기술을 너무 과신하거나 옛 유물을 과소평가하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무엇보다도 종고리가 휘어 부러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소불선생은 고심 끝에 포항제철에 강괴 28톤을 빌려 시험적으로 달아보고자 공문으로 요청했다. 그것은 만용에 가까운 것이었다. 포철은 강괴를 외부로 내준 일도 없고, 강괴를 운반하는 비용만도 상당한 액수였다. 그러나 소불선생은 그저 에밀레종, 성덕대왕신종, 다시는 못 만드는 문화유산이라는 말로만 몇날 며칠을 설득하였다. 한국사회에서 안될 일도 되게 하는 길은 실무자를 잘 알면 되는 것인데, 일이 되려고 했는지 포철의 한 실무간부가 소불선생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리하여 천신만고 끝에 포철은 강괴 28톤을 빌려주고 대한통운에서는 자원봉사로 참여하여 중기계장 이용일씨, 작업반장 김창배씨 등 여러분이 작업비도 받지 않고 거기에 옮겨 걸어 주었다.

소불선생은 에밀레종 무게보다 6톤의 여분으로 28톤을 빌려오는데 성공했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22톤의 하중을 견디는지 시험하려면 44톤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바람에 움직이기 때문에 정지된 물체보다 두 배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소불선생은 아침 저녁으로 강괴를 흔들어보았다. 시공자 공영토건 공사장은 6톤을 더 얹었다고 불평하면서 이 시험 자체를 불쾌해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소불선생은 아랑곳없이 틈만 나면 종을 치듯 흔들어보았다.

이레째 되던 날 아침, 경비원이 소불선생을 찾아 뛰어왔다. 종고리가 휘어 벌어진다는 것이었다. 열흘이 되니 곧 떨어질 것 같아 강괴를 내려놓았다. 소불선생은 휘어지고 벌어져 추한 모습이 된 종고리를 떼어들고는 부르르 떨었다고 한다. 소불선생은 그것을 상자에 담아 고속버스에 싣고 서울로 올라와 국립중앙박물관장실에 풀어놓고는 자세히 보고하였다. 이 어이없는 일로 지체높은 분들이 모였다. 문화재관리국장, 공영토건 사장, 원자력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장 등이 '에밀레종 종고리 제작위원회'를 조직하여 실수없이 하기로 했다.

에밀레종 종고리 제작위원회

에밀레종 종고리 제작위원회는 원자력연구소의 김유선박사, 금속실장 황창규선생 등 과학자와 소불선생 등 박물관 관계자로 구성되었다. 종고리위원회는 먼저 일그러진 고리를 인천에 있는 한국기계공업회사에 가서 시험해보니 연구관 하는 말이 "이 쇠는 똥쇠(똥철)입니다."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종고리만이 아니었다. 종을 걸 쇠막대기도 22톤 하중을 잘 지탱해야 한다. 황실장은 이 쇠막대기는 특수한 강철을 사용하여, 황실장이 지정하는 실력있는 공장에서, 황실장의 지시에 따라 최소한 직경 15cm가 되는 철봉을 만들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휘지도 구부러지지도 않는 것을 만들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큰 문제가 생겼다. 에밀레종 머리에 쇠막대를 끼우는 부분은 용틀임을 하는 형상으로 그 용허리에 가로지르게 되어 있는데 이 구멍은 지름이 9cm도 안되는 것이었다. 최상의 질로 15cm 밖에 안된다니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황실장은 고민 끝에 지금의 과학기술로는 오직 한 방법, 와이어(철사)로 계속 말면 걸 수 있다는 것이었다. 허나 그래서야 종을 달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황실장은 "관장님, 그전에 매단 쇠막대기 있습니까?"하고 물어왔다. 소불선생이 창고에서 그것을 꺼내 보여주었더니 황실장은 득의만면하여 " 이것이라면 안전합니다"라는 것이었다. 현대공학의 기술로는 15cm 쇠막대기 이하로는 안되지만 이것은 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옛날 쇠막대기는-그것을 신라시대에 만들었는지 조선시대에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여러 금속을 합금해서 넓고 기다란 판을 만들어 두드리면서(鍛造) 말아서 만들었으니 와이어가 분산된 힘을 결합하듯 만든 형태라는 것이다. 강하면 부러지기 쉽고 연하면 휘기 쉬운데 이렇게 만들면 강하면서 부드러워 휘지도 부러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종고리위원회는 에밀레종 종고리에 끼울 쇠막대기를 만들지 못하고 말았다.

공학박사들이 말하는 신비한 얘기들

그러고 보면 20세기에 에밀레종 복제가 불가능한 것은 정성의 부족뿐만이 아니라 기술부족이라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컴퓨터를 만들고 자동차를 만드는 기술은 발달했지만 청동주물 솜씨는 그 옛날을 따라가지 못한다. 어쩌면 경험과 필요에 의한 기술의 축적과 과학적 사고란 발전이 아니라 변화일 따름인지도 모른다.

에밀레종 몸체에는 종고리인 용머리의 방향과 같은 축으로 둥그런 연꽃무늬 당좌(撞座)가 양쪽에 새겨져 있다. 종을 칠 때는 반드시 여기를 쳐야 제 소리가 난다. 조금만 어그러지거나 비껴가도 안된다. 종 몸체에 새겨져 있는 모든 문양, 비천상, 명문의 서(序)와 사(詞), 어깨에 새긴 종젖꼭지(鍾乳), 입부분의 보상당초문 등이 이 두 당좌를 축으로 하여 좌우대칭을 취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이다.

1963년 2월, 원자력연구소 고종건, 함인영 두 박사팀이 삼국시대 불상과 범종을 특수촬영(감마선 투과촬영)하여 과학적으로 규명한 것이 '미술자료' 제8호, 9호에 실려 있는데 이 두 박사는 당시 어떻게 그렇게 얇은 주물이 가능했고, 깨끗한 용접이 가능했고, 주물에 기포(氣泡)가 없었는지 불가사의하다는 것이었다. 에밀레종에도 물론 기포가 없다.

남천우 박사의 '유물의 재발견'이라는 명저에는 우리나라 범종을 과학적으로 규명한 장문의 논문이 실려 있는데, 그의 견해에 의하면 에밀레종은 납형법(蠟型法)으로 제작되었다. 중국종, 일본종이 만형법(挽型法) 또는 회전형법으로 제작된 것과는 큰 차이이다.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이 '조선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기법의 차이에서부터 유래한다.

이 기법의 차이는 곧 형태와 소리 모두에서 큰 차이를 보여준다. 납형법이 아니고서는 종 몸체에 그와 같은 아름다운 문양을 새기는 것이 불가능하고, 납형법이 아니고서는 긴 여운을 내지 못한다. 일본의 범종학자인 쓰보이 료헤이(坪井良平)에 의하면 몇 해 전 일본 NHK에서 세계의 종소리를 특집으로 꾸민 적이 있는데 에밀레종이 단연 으뜸이었다는 것이다. 장중하고 맑은 소리 뿐만 아니라 긴 여운을 갖는 것은 에밀레종 뿐이라고 한다.

남천우 박사가 주장한 바, 에밀레종이 납형법으로 제작되려면 22톤의 쇳물, 감량 20-30%을 계산하면 약 25~30톤의 쇳물을 끓여 동시에 부어야 한다. 명문에 12만 근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은 당시 225g을 한 근으로 계산해보면 약 27톤이 되니 맞는 얘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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