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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사 저포기

왈선생 2011. 3. 23. 14:49

 

만복사 저포기

 

  만복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남원도호부> 편에 " 고려 문종 재위 때(1046~1083) 창건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정유재란 때인 선조 30년(1597)에 왜구에 의해 소실된 후, 숙종 4년(1678) 남원부사였던

 

정동설(鄭東卨)이 중창하려 하였으나, 예산상의 문제로 화재 이전처럼 큰 규모로 복원하지 못하고 승방 1동을 지어

 

그 명맥을 유지하여 왔으나 이후 300여년 동안 관리되지 못하여, 절터에 민가가 들어서는 등 폐사로 있다가

 

1979년 부터 7년 동안 전북대박물관팀에 의해 발굴 복원되어, 현재에는 석불입상을 모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보호전각 1동과 석인상 오층석탑 석대좌 당간지주 등 석물들과 오층목탑터를 중심으로,동,서,북 3면의 금당터의

 

주춧돌이 남아 있는 등 1탑3금당식의 독특한 가람배치가 나타난다.

 

 

 만복사지 전경

 

 

 

석 인 상  : 비오는 날에 미소가 넉넉함

 

 

석 조 대 좌

 

 

석 좌   안 내 판 

 

 

동쪽 금당지 주춧돌

 

 

석 등 대 석

 

 

석 등 대 석    안 내 판

 

 

만 복 사 지     5 층 석 탑

 

 

오 층 석 탑      안 내 판

 

 

 

오 층 석 탑 과    석 불 입 상   보 호 각

 

 

석 등 대 좌

 

 

석 불 입 상   보 호 각

 

 

공 사 안 내    표 지 판

 

 

석 불 입 상    안 내 판

 

 

다양한   모양의 주춧돌 :  나무 기둥과의 마찰력을 크게 하고 안정감 있는 연결을 위하여 주춧돌을 그렝이질 하였슴.

 

 

다른 형식의 주춧돌

 

 

 

오층목탑지에서  바라본 석불입상 보호각

 

 

 

만복사지 정남 쪽에 있는 개인 재실

 

 

재실 솟을 대문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의 한문체 단편소설에 살아있는 늙은 총각인 양생과 죽은 처녀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만복사저포기:萬福寺 樗蒲記>가 있으며, 이 한문소설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일본 동경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금오신화(金鰲神話)>에 수록되어 있다. 국내에는 김집(金集)의 한문소설집에 필사된 것이 실려 있으며, 그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남원에 양생이라는 늙은 총각이 일찌기 어머니를 여의고 만복사에서 방 한칸을 얻어서 홀로 살고 있었다.

 

양생은 젊은 아녀자들이 모여 탑돌이를 하기 전날, 불당의 부처님에게 배필을 구하여 달라고 빌다가 부처님과

 

저포(가죽나무 저 樗 부들 포 蒲 : 백제 때 유행하던 윷과 비슷한 놀이)를 하게 되었다. 내기에 진 부처님은

 

그에게 탑돌이를 하러 온 처녀와 사랑을 하도록 주선하였는 데, 그 처녀는 난리 통에 원통하게 죽은 처녀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며칠간의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던 귀신처녀는 저 세상으로 돌아가고 양생은 그 처녀를

 

잊지 못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가 다시는 장가를 가지 아니하고, 그 처녀의 명복을 빌면서 여생을 마쳤다는

 

아름답고도,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약간 바보스러움이 묻어 나기도 하는 , 애틋한 사랑 이야기이다.

 

   

   부처님의 능력으로 보면, 죽은 자와 산 자를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겠다고 하나, 이 한문소설에는 보이지 않는

 

트릭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리 매월당의 상상력이 동원된 소설이라고는 하나, 부처님께서 내기에 져서

 

늙은 총각의 소원을 들어주실 바에는 산 처녀도 아닌 죽은 귀신처녀를 주선해 주시겠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첫번 째의 트릭은 가죽나무 저(樗)가 상징하는 의미에 있다.한자 저(樗)는 상수리나무 역(木+樂)과 함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의  대명사로 쓰였다. 그 유래는 장자(莊子)에서 찾을 수 있는 데, 그가 소요유(逍遙游)에서

 

이 나무를 쓸모없는 나무로 묘사한 이래 중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이 나무를 "쓸모없슴의 상징"으로 여겨 왔다.

 

장자가 말한 가죽나무는 "줄기는 울퉁불퉁하여 먹줄에 맞지 않고,  잔가지들은 꼬불꼬불해서 잣대에 맞지 않다.

 

그래서 네거리에 내어  놓았더니 목수들이 이 나무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장자는 이 나무가 전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전국시대의 인재 등용의 족벌을 위주로 한 폐쇄성을 이 가죽나무에 비유하여

 

통렬히 질책한 것이다.그런데도 후대사람들은 장자의 본 뜻은 잃어버리고, 단지 이 나무는 "쓸모없는 것의 상징"

 

으로만 받아 드렸다.

 

 

   생육신으로 추앙받는 매월당 김시습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태어나면서 부터 모든 것을 아는 자질을 가졌다는

 

생지지질(生知之質)의 평가를 받는 인재가 아닌가. 10대 대에 학문에 열중하고, 21세 때에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접하고,

 

가지고 있던 서책들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철원 땅의 복계산에 처음으로 은거하면서, 아홉명이 바둑을 두면서 단종의

 

복위를 꾀하였다는 그가 장자의 가죽나무에 감추어진 의미를 모를리 없었다는 추론을 할 수 있다. 어린 조카의 보위를

 

부탁받은 세조와 그 주변 신하들의 왕위 찬탈 기도에 대한 꾸짖음이 가죽나무를 통하여 상징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단지 가죽나무가 주사위를 만드는 원료로 쓰이고 있었고, 저포(樗蒲)는 노름 또는 도박의 의미로 쓰였으므로,

 

매월당의 본 뜻을 감추기 좋은 저포기라는 용어를 차용하여, 소설로 썼다고 보면 타당한 해석이 될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상징성은 죽은 귀신처녀가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설정인 데, 부처님께서 내기에 지셨다고 한들

 

어찌 늙은 총각에게 구천을 떠도는 귀신처녀와 연을 맺어 주실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부처님의 하해와 같이

 

넓고 깊은 자비심에 누가 되었으면 되었지, 불법을 널리 알리려는 의도와는 배치되기 때문이다. 매월당도 한때 불문에

 

들어 승려 생활을 한 경험이 있으므로,이러한 설정은 기존의 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의 재구성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사항은 소설제목의 저포기에 있는 부들 포(蒲)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에 있다. 예로부터 약이 귀한

 

시절에, 부들의 꽃가루는 폐결핵을 비롯하여 각종 폐질환에 골고루 쓰였던 귀중한 약재이였다. 잦은 전란 중에

 

잘 먹지 못하여 영양실조에 걸리고, 그래서 폐질환을 앓고 있던 처녀가 약사여래입상이 광배 뒷면에 음각되어 있는

 

만복사의 석불입상에 병을 낮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난 후에, 정성스럽게 탑돌이를 하고 있었다. 대개 탑돌이는

 

휘엉청 달이 밝은 보름날에 많이 한다. 달빛은 폐질환을 앓고 있던 핼쓱한 얼굴의 처녀를 더욱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였을 것이다. 쓰러질 듯 휘청거리면서도 정성스럽게 탑돌이하는 처녀에게 노총각인 양생은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노총각 양생이 크나큰 자비심을 내어서....곧 부처님에 버금가는 자비심을 내어서 그 처녀를 정성스럽게

 

간호하였으나  그 처녀는 오래지 않아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미 부처님에 버금가는 큰 사랑과 자비심을 내어본 경험이 있는 양생은 홀로 지리산에 토굴을 짓고 <덧없음>에 대한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줄거리가 현실감이 있으나.매월당이 현실 그대로를 소설로 적어 놓았을리 없다.

 

이미 몇 경계를 앞서 가신 분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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