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흥기한 후 그 보편적인 가르침 때문에 다른 지역의 문화권에 큰 저항 없이 빠른 속도로 전래되었다. 이러한 전래사 속에서 각기 지역의 독특한 토착 문화와 관련하여 불교가 수용·발전되면서 대략 세 가지 유형의 불교의 모습이 전개되었다. 편의상 ‘경전적 불교’와 ‘대중적 불교’ 그리고 ‘주술적 불교’라는 이름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중 대중적 불교란 재가자를 중심으로 가정 생활 속에 공덕을 쌓아 복(福)된 삶을 목표로 하는 ‘작복불교’를 말하며, 주술적 불교란 주문이나 부적 등의 주술적 방법을 통해 양재초복(禳災招福)을 비는 ‘통속불교’를 말한다. 엄밀히 말한다면 주술적 불교는 불교의 왜곡된 형태이다. 이는 현세적인 욕구가 중심이 되어 불교는 한낱 현세적 욕구를 충족하기위한 보조수단 정도로 간주하려는 태도로서 엄격히 말하면 불교 본래의 정신에서 벗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01. 복(福)의 정의
사실 불교에서 의미하는 ‘복’이란 원인적인 것에 따른 결과로서 좋은 과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좋은 과보를 가져다주는 원인으로서의 현재의 선행 자체도 ‘복’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현재의 선행 자체도 과거의 선행이 바탕 되어 있지 않으면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에 짓는 복행은 이숙과이며 다시 이 과보를 복이나 복과라고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불교에서 복을 정의하는데 ‘선’이나 ‘가치 있는 행위’ 그 자체로 쓰는 경우가 있다. 즉 현재의 ‘선행’ 자체도 과거의 선행에 대한 또 다른 복이고 또 다시 미래에 좋은 결과를 뒤따르게 할 수 있는 행위라는 측면이다.
02. 복업(福業) : 복 짓는 행위
복업을 닦아서 행복을 얻는 것을 복인복과라 하는데 이는 선인선과에 포함된다.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서 복의 결과가 뒤따르는 복인(福因)의 복행(福行)을 3가지로 나누어서 3복업(福業)을 설명하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보시(布施)의 복업. 둘째, 지계(持戒)의 복업. 셋째, 정진(精進)의 복업. 이상과 같이 3가지가 복을 뒤따르게 하는 기본적인 행위로서 복 심는 복행이라고 많은 경전은 설명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죽고 난 후에 좋은 세계에 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복행 때문으로 설명된다.
복행에 대해 부처님은 “세상에서 복을 구하는 사람으로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여섯 가지 법에 만족할 줄 모른다. 첫째는 보시하는 것이요, 둘째는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이요, 셋째는 참는 것이요, 넷째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요, 다섯째 중생들을 보호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위없는 바른 도를 구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복 짓는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복을 짓는 행위’를 뜻하는 복업은 그 말과 함께 내용에 있어서도 선한 방향으로 향하는 적극적인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따라서 복업은 바로 복을 짓는 적극적인 작복(作福)을 의미한다. 이는 복전(福田)이라는 말의 표현에서도 나타난다.
03. 복과(福果) : 복행의 결과
복행의 복업에 따른 과보는 수많은 경전에서 다양하게 설해지고 있다. 드물게는 불교의 궁극적인 열반·해탈까지언급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복업에 따른 결과는 세간적 범위에 한정되어 나타난다. 하늘세상과 같은 살기 좋은 곳에 몸을 받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초기 경전에서는 복을 짓는 것만으로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지는 않는다. 또한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이나 부처님은 복이나 비복행(非福行)의 개념에서조차 넘어서야한다고 강조된다. 하지만 후기의 경전에서부터는 복을 짓는 행위 자체가 열반성취의 직접적인 원인처럼 설해지고 있다.
우선 복업의 3복행 중 보시와 도덕적 생활과 같은 복된 행위는 그 정도에 따라서 3가지 단계의 과보가 있다고 한다. 첫째 작은 정도로 적은 복이 있는 세계를 누리는 것, 둘째는 큰 정도로 매우 유복한 상태의 삶을 누리는 것, 셋째는 인간의 범위를 넘은 천상과 같은 즐거운 세계에 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04. 업(業)과 선(善)과의 관계
대승의 『금강경』에 복덕을 사량해서는 안 된다하여 집착 없는 복 지음의 큰 과보를 설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초기경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복과를 위한 복행을 짓는데 적극적일 것이 강조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과를 계산한 복업을 지을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사실 교리적인 입장에서 볼 때 복과 비복보다 더 큰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은 선(善)과 악(惡)이라는 말이다. 이는 선·악의 개념 속에 복과 비복은 포함될 수 있지만 복과 비복 속에 선·악이 포함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악은 불교의 업설에 포함되는 개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복의 개념은 업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나타난다. 기본적으로 업설은 자작자수나 자업자득과 같은 행위와 행위에 대한 결과에 대한 가르침으로 현세는 물론 삼세에 걸쳐있는 인간 행위와 그에 대한 결과의 문제이다.
05. 작복의 실천 그리고 회향의 문제
회향은 자신이 지은 복이 다른 사람에게 옮겨갈 수 있다는 것으로 구체적으로 자기가 지은 공덕과 선근을 회전시켜 보리를 향하게 하고 중생에게 베풀어 주는 것을 말한다. 이같은 회향 사상은 후대의 대승 불교에서 매우 강조되는 사상으로 대승 이전의 불교와 다른 대승불교의 특징으로 이야기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 있어 언제부터 대승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중요한 문제이다. 초기불교의 근본적인 의미의 업설로 볼 때 회향의 교리적 근거를 적절하게 설명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자업자득 또는 자작자수라는 원칙에 서있는 초기불교의 업설(業說)속에서 과연 공덕 즉, 복을 다른 사람에게 이전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은 큰 문제로 남는다 하겠다.
06. 기복(祈福)의 가능성에 대한 비판
초기불교의 근본적인 입장은 주문이나 주술 그리고 기도를 매개로 현실적인 이익을 추구하려는 태도에 대해 높은 강도로 비판하고 있다. 업보설의 무지 때문에 사람들은 인간 행위와 결과에 있어 외부의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존재나 세계에 좌우된다고 믿는다거나 내부의 어떠한 운명적인 원리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운명을 주재하는 대상이나 원리를 기쁘게 하고 달래거나 또는 교감을 통해서 은총을 비는 행위나 주술적인 방법을 써서 바꾸려는 것이 바로 기복인 것이다. 부처님이 주술이나 주문 그리고 기도 등과 같이 타력을 대상으로 하는 의례를 부정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신의 뜻이나 귀신들의 장난과 조화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거나 아니면 우주의 거대한 영적 흐름과 법칙에 인간의 운명이 끼워 맞추어져 있다고 하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부정하신 것이다.
부처님의 초전설법인 사성제에 나오는 8정도는 기도나 주문과 같은 타력(他力)을 전혀 전제하지 않는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실천법이다. 따라서 불교는 당시의 미신적 그리고 기복적 종교 행태들에 대해 얼마나 비판적 태도를 취했던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불교가 새로운 종교로 흥기할 수 있었던 시대적 당위성이었으며, 그러한 당위성이 다시 인류 역사에 있어 보편성으로 인정되어 아직까지 그 빛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2004 춘계 불교 학술대회
조준호·조선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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