守 國 寺
조선왕조의 유서깊은 원찰(願刹)로서 수많은 영험담을 갖고 있는 수국사는 1459년(세조 4)에 세조대왕이 내수사에 명하여, 큰 아들 숭(崇: 덕종으로 추존)의 왕생을 위해 고양군 동쪽 봉현(峰峴)에 왕능사찰(王陵寺刹)로 창건을 명한 정인사(正因寺)의 후신(後身)이다.
창건 당시 주지는 설준(雪峻)선사로 수국사의 법당에서 방앗간까지 모든 설계를 맡았는데, 1471년(성종 2)에 덕종의 부인이자,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仁粹大妃) 한씨(韓氏)가 절의 창건 당시 급히 지어서 재목이 좋지 못함을 지적하고, 판내시부 이효지(李孝智)에게 중창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같은 해 2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0월에 완공하였는데, 이때의 절의 규모는 총 110칸으로서 단청의 아름다움이 빼어나 봉선사(奉先寺)와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후 수국사는 당시의 고승 신현(信玄)선사가 주석하며 왕실원찰로 발전하였으며, 1721년(경종 1)에는 서오능에 소재하는 숙종(肅宗)과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모신 명릉(明陵)의 능찰(陵刹)로 수국사로 불리게 되었다.
한때 잦은 전란으로 퇴락하였으나, 1897년 3월 북한산성의 총섭(總攝)인 월초거연(月初巨淵: 1858-1934)화상에 다시 중창되었다.
당시 월초스님은 북한산성에 있는 진관사(津寬寺)에 들러 불공을 올리다가 한쪽 구석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에 한 벌의 불기(佛器)도 없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부처님은 수국사가 비바람을 면치 못할 정도로 퇴락하여 우리 절이 가까운 곳에 있다 하여 옮겨 모셨으나, 아직까지 일향일다(一香一茶)도 공양한 일이 없다'하여 이에 그 부처님 앞에 불공을 올리고 수국사의 중창을 발원하였다고 한다.
이후 1900년에 고종의 태자(훗날 순종: 純宗)가 깊은 병을 앓자, 왕실에서는 월초화상에게 부탁하여 청도 운문사의 사리암(邪離庵)에서 쾌차 백일기도를 올리게 하였다.
이에 월초화상이 백일 나반존자 기도를 지극정성으로 드리기를 팔십여일이 되자, 태자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금침(金針)을 한번 놓는 사이에 태자의 아픈 몸이 씻은 듯이 낳았다고 한다.
태자의 병이 완쾌됨을 기뻐한 왕실에서는 월초화상에게 소원을 묻자 월초화상은 소원이 없다고 고사했으나, 재차 물어오는 왕실의 성의를 저버릴 수 없어서 "서오능 옆 수국사가 퇴락하여 조석의 향화가 끊어진 것이 안타깝다." 라고 중창을 소망했다.
이에 고종은 '효심신심원무이(孝心信心元無二)' 라고 치하하면서 직접 화주책을 들고 왕실과 여러 대신들에게 권선하고 어용목수로 하여금 지금의 자리에 수국사를 중창하게 하였다.
또한 왕실로부터 하사된 금액과 대신들이 모금한 26만 8천량으로 고양군 지도면 내곡리, 중면 산황리 두 곳에 토지를 매입하여 사찰의 기본자산으로 삼고, 1907년에는 왕실로부터 하사된 금 1,500원으로 개금ㆍ탱화불사를 하였다.
또 1908년 초파일에는 통도사ㆍ범어사 등 전국 각지의 여러스님들이 월초화상의 성력(誠力)을 도와서 괘불탱화 및 금강번 31위를 조성하게 되는데, 통도사에서 1천금, 범어사에서 4백금을 모아서 불사에 쓰게 하였다.
그 뒤 6.25 전란으로 옛 모습은 잃었지만, 1950년 수경(守卿)스님이 주석하며 가람을 수호하였으며, 1981년부터 1992년까지는 현도(現導)스님이 주지로 역임하면서 도장의 환경을 일신하고 각종 법회를 개설하여 왕실 원찰로서의 가람을 유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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