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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의 악마들

왈선생 2011. 3. 22. 20:56

 

실크로드를 '침략한' 서양 탐험가들 피터 홉커크가 쓴 <실크로드의 악마들>

 

1908년 봄 프랑스의 중국학 학자이자 탐험가인 폴 펠리오는 중국 돈황(敦惶) 천불동(千佛洞)의 한 동굴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완전히 넋을 잃고 있었다"라는 그의 고백처럼 그곳에는 중국학 학자들에게는 보물이나 다름없는 수만 부의 고사본들이 놓여있었다.

펠리오는 비좁은 동굴의 한 귀퉁이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수많은 필사본들을 촛불에만 의지한 채 검토하며 3주를 보냈다. 그렇게 해서 따로 챙겨진 수천부의 필사본들을 90파운드에 구입한 펠리오는 그것들을 잘 포장한 뒤에 선박 편으로 프랑스로 운송했다.

그 과정에서 발굴된 필사본 중에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사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까지 존재한다고만 알려져 있던 혜초의 이 여행기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은 펠리오의 작업을 통해서였다.

고비사막의 깊숙이 감추어져 있어서 가까운 마을로부터 나흘 거리에 위치한 돈황의 천불동. 벼랑을 뚫고 만들어진 400여개 사원의 내부는 아름다운 벽화와 조각상들로 가득하다.

이곳을 고고학적인 관점에서 발굴하고 유물들을 반출해간 최초의 탐험가들은 폴 펠리오와 오렐 스타인 같은 서양의 탐험가들이었다. 그리고 이 서양 탐험가들의 유물 반출은 어느 중국인 학자의 말처럼 '원한에 사무쳐 이가 갈릴 정도'로 중국인들의 증오를 불러 일으킨 행위였다.

하지만 돈황 천불동에서 반출된 유물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수에 불과했다. 스타인이나 펠리오처럼 중앙아시아에 주목해서 20세기 초에 발굴 작업을 진행한 서양의 고고학자들과 탐험가들이 있었다. 개척자로 불리는 스웨덴의 스벤 헤딘과 그 뒤를 이은 독일의 폰 르콕, 미국의 랭던 워너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중국이 유물 반출에 대한 금지령을 내릴 때까지, 실크로드의 도시들에서 조각, 필사본과 유물들을 글자 그대로 톤 단위로 빼내갔다. 오렐 스타인은 돈황의 비밀서고를 통째로 들고 갔고, 폰 르콕은 베제클릭의 석굴사원에 있는 커다란 프레스코 벽화들을 떼어내서 20개월에 걸쳐 베를린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 피터 홉커크 <실크로드의 악마들>

 

피터 홉커크의 <실크로드의 악마들(Foreign Devils on The Silk Road)>은 이 탐험가들의 이야기다. 20세기 초반, 중국의 오지에서 외국의 탐험대가 행했던 고고학적 침략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에서 서술하는 인물들은 스웨덴의 스벤 헤딘, 영국의 오렐 스타인, 독일의 폰 르콕, 프랑스의 폴 펠리오, 미국의 랭던 워너 등이다.

그들은 자신의 나라에서는 그들의 발견과 중앙아시아 역사 연구에 대한 공헌으로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는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이들을 자신의 역사와 유물을 강탈해간 파렴치범 또는 악마로 취급할 뿐이다.

물론 이 탐험가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일부 서양인들은 이 탐험가들의 유물 반출이 이후에 자행된 유물 파괴행위로부터 구제해준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후의 무슬림들은 실크로드 도시의 많은 유물과 벽화들을 파괴하였다. 수천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오던 많은 유물들이 마지막 반세기를 앞두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현재 이 실크로드의 도시들에서 반출된 유물들은 우리나라의 국립중앙박물관을 포함해서 최소 약 13개국의 박물관에 나뉘어져 있다. 워낙 많은 양의 유물들이라서 아직도 분류가 되지 않고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것들도 많다.

대영박물관과 영국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1만 3천점의 한문 필사본과 고서들은 특수 캐비닛 속에 꽂혀 있다. 오렐 스타인이 들고 나온 수많은 조각과 두루마리들은 현재 델리의 국립박물관, 베를린의 인도 미술관,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쥬 미술관 등지에 나뉘어져 있다.

폰 르콕이 베제클릭에서 가져온 불교 미술품들의 상당수는 2차대전 때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무슬림들의 문화재 파괴행위로부터 '구제'하기 위해서 반출되었다는 유물들이 서양인들의 폭격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이들의 행위가 옳은가를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말한다.

"벽화, 조각, 필사본들이 본래의 장소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과연 얼마나 많은 유물들이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은 독자 스스로의 판단에 맡기자. 또한 아무리 그것이 '구출'을 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한 민족에게서 영원히 그들의 유산을 박탈해 버린 것이 과연 도덕적이었나 하는 것도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자. 그러나 중국인들이 왜 처음에는 유물들이 실려나가는 것을 허용했는지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로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이들의 탐험과 생애를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오지에서, 자신의 목숨조차 돌보지 않고 탐험과 발굴로 뛰어들었던 이 모험가들의 여정을 따라가고 있다. 5일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채 타클라마칸 사막을 헤매고 다녔던 스벤 헤딘, 필사본 위조자(僞造者) 이슬람 아훈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던 오렐 스타인, 아흐레 동안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라다크 고개를 넘은 후에 탈진해버린 폰 르콕 등.

행위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로 이 탐험가들의 극기와 모험의 과정은 그 자체로 흥미진진하다. 고국에서는 영웅으로 대접받았던 이들은 이후에 다양한 운명을 맞이했다.

중앙아시아 고고학의 태두로 불리는 오렐 스타인은 1943년 82세의 나이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프가니스탄을 탐험하기 위해서 42년 동안 이 나라 정부에 허가를 요청했던 그는, 허가증이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폰 르콕은 그보다 13년 앞서서 세상을 떠났다. 불치의 병마와 싸우면서도 탐험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던 그는 제 4차 탐험을 위해서 남경에 머물던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개척자였던 스벤 헤딘은 1952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는 이미 잊혀진 존재였다. 그가 죽고 나자 한때 그를 존경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고 나섰다. 유대인의 피를 물려받은 그는 1,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을 지지하고 나섬으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잃게 된 것이다.

스벤 헤딘이 죽은 지 3년 후, 마지막으로 실크로드 탐험에 뛰어들었던 미국의 랭던 워너도 사망했다.

이들의 죽음과 함께, 랭던이 '길고 오래된 길(long old road)'이라고 표현했던 실크로드도 서서히 변해가고 있다. 오아시스 사이에는 현대식 포장도로가 들어서고 있고, 공포의 대상이었던 타클라마칸 사막은 가장자리부터 농지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들의 죽음과 함께 실크로드의 신비와 낭만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스벤 헤딘 [Sven Hedin, 스벤 안데르스 헤딘, 스벤 안더스 헤딘]

스벤 헤딘(Sven Hedin, 1865년 2월 19일 ~ 1952년 11월 26일)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중앙아시아를 탐험한 마지막 지리학자였다. 독일 베를린 대학과 웁살라 대학에서 지리학을 공부했고, 1893년부터 1930년까지 네 번에 걸쳐 중앙 아시아를 학술탐사하였다. 이 탐사 과정에서 중앙아시아 타림분지 동부에서 고대 왕국 누란(樓蘭)의 유적을 발굴해 전 세계의 지리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중앙아시아를 탐사하면서 그 당시 서양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타클라마칸과 티베트를 탐사하고 지도를 제작하였다.

수많은 다양한 주제의 과학 논문과 여행기 전기 선언문 소설등의 65권의 책을 출판하였다. 그의 친척이자 법률 자문이었던 에리크 벤네르홀름(Eric Wennerholm)은 헤딘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헤딘에 의한 모든 것은 거대하다 그가 탐사한 높은 산, 광대한 사막, 긴 탐험의 여정, 수많은 저작 그가 그린 수많은 지도, 수많은 훈장 그리고 정치문제에 있어서 판단력의 부족도 그러하다."

세계를 탐사하면서 수많은 유명인사를 만났던 헤딘은 1908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초청으로 일본과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을 만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그에게 조선은 곧 일본의 지배를 받을 것이고, 순종은 정치범으로 구금될 것이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히로부미가 헤딘을 초청한 것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정치적 술책으로 평가된다. 헤딘은 그의 책에서 고종과 순종을 구분하지 못했다고 하며, 순종에 대한 서술은 오류 투성이라고 한다.

폴 펠리오

폴 펠리오(영어: Paul Pelliot, 1878년 5월 28일 ~ 1945년 10월 26일) 는 프랑스인 중국학자로 중앙아시아를 탐험하고, 수 많은 유적들을 수집하여 프랑스로 가져왔다. 처음에는 처음에는 외국인 사절단으로 들어가, 중국에 대한 연구를 하였으며, 실바인 레비(Sylvain Levi)와 에드아르 샤바네(Edouard Chavannes)의 제자가 되어 공부를 하였다. 펠리오는 단 한번 중앙 아시아를 탐사했지만, 수 많은 유적을 가지고 돌아왔다.

펠리오는 하노이에 있는 프랑스 극동학회(Ecole Francaise d'Extreme Orient)에서 일을 했으며, 거기서 학회의 도서 수집을 위해 1900년 베이징으로 파견되었다. 그가 베이징을 방문하여 일을 하는 동안 의화단 운동이 발생하여, 외국인 대사관에 포위 당하여 구금되었다. 그는 포위를 당한 동안 두번을 탈출하게 되는데, 한번은 적군을 사로잡아 의복을 빼앗고, 또 한번은 과일을 얻기 위해서 였다. 이러한 그의 용맹으로 말미암아, 그는 레종드뇌르 훈장을 받게 된다. 22세의 나이에 다시 하노이로 돌아와 학회의 중국학 교수가 되었고, 나중에 프랑스 대학의 교수로 역임하였다.

카슈가르를 떠나 처음으로 정박한 곳은 툼추크였는데, 그곳에서 쿠차로 향했다. 그리고 쿠차에서 소실된 쿠차 언어로된 많은 문서를 획득했다. 이 문서들은 나중에 스승인 실바인 레비에 의해 번역되었다. 쿠차를 떠나 펠리오는 우루무치를 갔는데, 그곳에서 형제가 의화단의 수괴인 란 공작을 만나게 된다. 란 공작은 종신 유배 상태로 있었다. 펠리오 탐험대가 마지막으로 발길을 멈춘 곳은 그의 명성을 쌓게 한 둔황으로 1908년 2월 12일에 이곳에 도착하였다.

둔황에서 펠리오는 왕원록의 장경동에 대한 소문을 듣고 접근할 수 있었다. 방대한 분량의 고서적과 판본, 예술 작품들이 이미 오렐 스타인에 의해 유출된 후였다. 카슈가르에서처럼 펠리오의 중국어 실력이 또 한번 빛을 발휘했다. 3주간 판본과 고서적 등을 씨름하며 분석한 후에 왕원록에게 일부를 팔도록 설득했다. 왕원록 또한 사원의 보전에 예산이 필요했으므로, 90 파운드를 받고 막대한 분량을 팔게 되었다.

그 후 1차 대전 때는 프랑스군 대사로 베이징에서 복역을 하였으며, 1945년 암으로 죽게 된다. 그는 중국학의 위대한 학자로 평가되었으며, 그의 소장품을 많이 가지고 있는 파리동양박물관(Musee Guimet)에는 그의 이름을 딴 갤러리가 있다.

펠리오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발굴에 핵심적인 기여를 하였으며, 주달관의 진랍풍토기를 번역하여 서양에 알림으로써, 앙코르 유적의 복원에 막대한 기여를 하였다.

오렐 스타인

1929년 중앙 아시아에서 찍은 오렐 스타인 경의 모습.오렐 스타인 경(영어: Marc Aurel Stein, 1862년 11월 26일 ~ 1943년 10월 26일)은 헝가리 출신으로 중국의 깐수성 둔황의 막고굴 제17굴(장경동)의 유물을 유럽에 소개함으로써 "둔황학"을 정립한 사람이다.

그는 영국과 인도 정부의 지원으로 중앙아시아를 세번이나 탐사를 하여 많은 유물을 발굴했으며, 특히 돈황의 유적지를 연구한 사람으로 돈황 막고굴의 존재를 유럽의 학계에 알려 '돈황학(敦煌學)'을 탄생시켰다.

도사 왕원록과 장경동

1904년 당시 막고굴을 관리하고 있던 태청궁의 도사 왕원록이 막고굴 제16굴에서 숨겨진 작은 방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제17로 알려진 장경동이며, 이곳에서 약 5만점의 유물을 발견하였다. 당시의 서구 열강들의 침략과 내부 부패에 의해 국력이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청나라 정부와 지방 관리들은 왕원록의 탐사 활동에 대해 무관심했다. 도사 왕원록은 고문의 가치를 잘 알고 있던 사람으로 유물 보존을 위해 엄청난 발품과 노력을 기울였으나 어떤 관리도 인적인,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장경동의 보물에 대한 소문을 들은 오렐 스타인은 1907년 실의에 빠진 도사 왕원록에게 재정 보조금을 지급하고, 약 7,000점의 유물을 영국으로 보냈다. 이것이 바로 유럽에 '둔황'의 '막고굴'의 존재를 널리 알린 계기가 되었으며, 둔황의 유물과 배경에 대해 활발한 연구가 시작된 계기이다.

폴 펠리오와 오타니 고즈이

장경동의 문서를 조사하는 폴 펠리오1년 후 프랑스인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도 비슷한 금액을 지불하고, 오렐 스타인이 가져갔던 분량만큼의 유물을 프랑스로 보내게 된다. 이후 일본인 젊은 승려인 오타니 고즈이(1876-1948, 大谷光瑞)도 5,000점의 유물을 일본으로 가져갔으며, 미국인 랭던 위너 등도 막고굴의 유물을 모국으로 가져가게 되었다. 1908년 폴 펠리오가 가져 갔던 유물 중에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필사본이 있었다. 오타니가 일본으로 유출한 유물 중에는 일부가 완전히 유출되지 못하고 조선총독부에 기증되어 현재는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307호)에 전시되어 있다.

당시에 이런 대량의 유물 유출을 두고, 현재의 중국은 유물도둑이라고 분개한다. 하지만 당시 왕원록이 유물 보존을 위해 400킬로미터를 여행하며 지역의 관리들에게 호소를 하며 다녔던 노고와, 문화혁명 당시 둔황의 많은 유물들이 홍위병들에게 파괴되었던 광란의 역사는 말하지 않고 있다. 현재도 중국은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은 유물을 반환하라는 요구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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