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로챠나/불교입문

화두. 선문답. 법거량에 대해서...

왈선생 2011. 3. 13. 10:35

1.화두, 선문답, 법거량.

(1)화두와 선문답(법거량)은 혼용되기도 하지만 조금씩 다른 겁니다.

화두란, 흔히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중국과 한국의 선사들이 깨달음을 주기 위해, 찾아온 납자(수도승)들에게 던져준 [의문덩어리]지요.

즉, 그 유명한 구자무불성(개에게는 불성佛性이 없다)화두는 조주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찾아와서
"스님,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 라고 묻자
조주선사는 단 한마디로 "無(없다)!"라고 대답한데서 유래한 겁니다.

그런데 조금만 불교를 알아도 아시겠지만, 부처는 불교의 교조이고, 그 교조께서는 모든 유정물 무정물에 불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즉 바위덩어리같은 무생물에게도 불성(부처가 될 씨앗)이 있다고 했는데, 조주선사는 정반대로 단한마디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라고 하신 거죠.

그럼 중국선사에서 가장 뛰어난 선사의 한분인 조주스님이 거짓말을 하거나 잘못 말했을까요? 선가에서는 누구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럼 왜 조주스님은 이런 대답을 한 걸까요?
그것은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서 찾아온 납자에게 화두를 준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의심(이를 의단이라고 합니다.- 의심덩어리])없이 되지 않습니다.

기존의 지식이 아무리리 모두에게 옳더라도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면 깨달음은 없습니다.이말이 선가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선사들은 깨달음을 구하고자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지식이 아닌 깨달음을 주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의심하게 해야 하는데 그 도구가 화두인 거지요.

그러니 결론적으로 화두란, 이미 깨달은 선사가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을 위해서 주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두는 혼자 참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눈밝은 스승에게서 받아야 하는 겁니다)

많은 화두중에 아주 유명한 것으로는
"조사서래의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은)", "파자소암(노파가 암자를 불태우다)",
"정전백수자(뜰앞의 잣나무)" "남전참묘(남전스님이 고양이를 죽이다)" "조주끽다(조주스님의, 차나 한 잔 들고 가게나)" "운문 간시궐(운문선사의, 부처는 마른 똥막대기다" "삼서근(부처가 무어냐는 물음에, 삼서근이다)"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별로 알려지지 않은 화두를 한 개 들면, 20대초반에 깨달음을 얻은 전강대선사가 사용한 화두로 板齒生毛(판치생모)가 있습니다. 이 말은 "앞이빨에 털이 났다"는 겁니다. 참 이해하기 어렵지요?
이런 화두(모든 화두에 공통)를 받으면 납자는 "왜 이빨에 털이 다나지? 왜? 왜? .... ???"
라고 의문을 가지는 거지요. 그래서 그 의단을 타파하는 것이 깨달음이고요. 다만 주의할 것은 사량분별(생각)으로 알려는 것이 아니라 선정에 들어서 알아내야 하는 겁니다.
화두란 생각이 아니라 생각이전의 것으로서, 사량분별이 닿으면 멍텅구리가 된다는 것. 즉 생명이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화두의 가짓수가 보통 1700개라고 합니다. 가장 유명한 벽암록이라는 책이 있고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선문염송이라는 화두집도 있습니다.

(2)선문답(법거량)
선문답이란, A.위와 같은 화두를 두고 [납자가 깨달았는지 스승이 시험(묻는것)하는 것]이거나, B.[이미 어느 정도 깨달음을 얻은 선사들끼리] 서로의 見處(깨달은 정도)를 점검하기 위해 묻고 답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화두와 가장 다른 점이 위의 A,B에 있지요.


2.유명한 선문답(법거량)
그러면 단순히 화두가 아닌, 근세의 유명한 고승들간의 선문답을 몇 개 들어보겠습니다. 이들을 찾기는 화두를 찾기보다는 훨씬 더 어렵습니다.
화두집은 많아도, 선문답은 특히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서 문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거의 없기때문이지요.

(1)현대 한국에서 성철스님과 마찬가지로 돈오돈수를 주장(그전까지의 선사들은 대부분 돈오점수에 의해 깨달음을 얻는 수행을 했씁니다.)하고 실천한 향곡대선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제자인 진제대선사(해운정사 조실 겸 대구 동화사 조실 겸 조계종 특별선원인 문경 봉암사 조실)와 나눈 법거량을 하나 소개합니다.

*참고.- 돈오점수와 돈오돈수는 선가에서의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에 대한 논의입니다.
돈오점수-깨닫고 나서도 닦음이 필요하다는 주장. 송광사 국사이신 보조지눌스님의 주장. 자세한 것은 보조스님의 수심결참고.
돈오돈수-현대에 와서 성철스님이 되살린 것으로, 몰록 깨닫고 나면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는 경지가 바로 깨달음이라는 것. 따라서 깨닫고 나서도 닦음이 필요하다면 아직 진정으로 깨달은 것은 아니라는 거지요. 자세한 것은 성철스님의 선문정로 참고.
안거 - 수행자들이 한데 모여서 출입을 삼가고 90일간 좌선등을 통해 화두를 깨치기 위해 가행정진하는 것.

(1)향곡선사와 진제선사의 법거량
때는 1967년 여름 안거安居를 마친 해제일이었다.
진제가 물었다.
"불조佛祖(부처님과 조사스님)가 아는 곳은 묻지 않거니와 불조가 지금까지 알지 못한 곳을 일러주십시요."
향곡이 말했다.
"구구는 팔십 일이니라."
진제가 말했다.
"그곳은 이미 불조가 아신 곳입니다."
향곡이 다시 말했다.
"육육은 삼십 육이니라."
"불안佛眼과 혜안은 묻지 아니하거니와 어떤 것이 납승衲僧의 안목입니까."
향곡이 말했다.
"비구니 노릇은 원래 여자가 하는 것이니라."
진제가 이에 합장하며 말했다.
"오늘에야 비로소 큰스님을 친견했습니다."
향곡이 말했다.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보았느냐"
진제가 말했다.
"관觀 !"

이때 비로소 진제스님이 일어나 삼배를 올렸고, 향곡선사는 진제선사에게 전법게(깨달은 제자에게 자신의 법을 물려줌을 증명하는 게송)를 내리게 됩니다. 즉 향곡스님은 진제선사의 견처를 점검하시고 깨달았음을 인가하신 겁니다.

(2)현대 선불교의 중흥조이고 오늘날 덕숭문중의 뿌리가 된 경허대선사와 그의 법제자인 만공큰스님간의 선문답입니다.

*경허대선사는 조선의 억불숭유책으로 절이 유생들의 놀이터가 되고 스님은 유생들의 가마꾼이 된 퇴락한 조산의 선불교를 조선후기에 다시 살린 분이며, 그의 문하인 덕숭문중에서는 정말 많은 선사들이 나타납니다. 불교를 조금만 아는 분들이라면 다 아는 분들이지요.
경허문하의 세 달이라고 하는 수월, 해월, 만공, 그리고 한암, 전강, 선사들과 그의 제자들인 현재 조계종 총무원장인 정대스님까지도 덕숭문중이지요.


만공스님이 경허스님에게서 화두를 받아 참구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자만하며 돌아다니다가, 경허선사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경허선사는 이때 만공스님이 아직 덜 깨달은 것을 알고 다음처럼 묻게 됩니다.

경허 : 여기 등토시와 부채가 있는데 토시를 부채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부채를 토시라고 해야 옳으냐?
만공 : 토시를 부채라 하여도 옳고 부채를 토시라 하여도 옳습니다.
경허 : 네가 다비문을 보았느냐?
만공 : 보았습니다.
경허 : 유안석인제하루(눈있는 돌사람이 눈물을 흘린다)라 하니 무슨 말인고?
만공 : 묵묵.... ㅠ.ㅠ
경허 : 이 뜻을 모르면서 어찌 토시를 부채라 하고 부채를 토시라 하느냐.
만공 : 잘못되었습니다. ....

이래서 만공스님은 이때 경허스님에게 깨달음을 인가받지 못합니다. 그후 다시 몇년을 더 정진하여 결국 인가를 받게 되지요.

(3)다음은 깨달은 분들끼리의 법거량입니다.
위의 만공큰스님과 한암큰스님(통합이전 조계종의 종정을 지낸 분) 어느 날 나눈 선문답입니다.
만공 : 한암이 금강산에 이르니 설상가상이 되었구나.(한암은 찬바위라는 뜻이기도 하므로 이런 문답을 한 듯하다) 지장암 도량내에 업경대가 있으니 스님의 업은 얼마나 되는고?
한암 : 이 질문을 답하기 이전에 마땅히 30방을 맞아야 옳겠구나.
만공 : 맞은 뒤에는 어찌 될꼬
한암 : 지금 한창 잣서리 할때가 좋으니 급히 올라오너라.
만공 : 암두(중국의 유명한 선사)가 잣서리할때 참예하지 못함은 원망스러운 일이긴 하나 덕산(중국의 유명한 선사)의 잣서리 할 시절은 원치 않노라.
한암 : 암두와 덕산의 이름은 이미 알았거니 그들의 성씨는 무엇인고
만공 : 도둑이 지나간 후 3천리가 넘었거는 문 앞을 지나는 사람이 성은 물어서 무엇을 하겠는고.
한암 : 금선대 속의 보화관이 금옥으로도 비할 바 어렵도다.
만공 : (흰 종이에 일원상(큰 동그라미)을 그려서 한암에게 보이다)

*덕산 스님은 중국선사로서, 법을 묻기 위해 찾아온 납자들이 무엇을 묻든 무조건 몽둥이 30방을 갈긴 것으로 유명함. 물론 이 행동도 깨달음을 주기 위한 자비의 행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