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숙성(甘肃省,간쑤)

실크로드 천산북로 둔황에서 우루무치까지 9 (甘肃省 敦煌)

왈선생 2013. 7. 19.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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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산) 

 

 

 

 

 

 

 

 (돈황 박물관)

(돈황 박물관) 

 (막고굴)

 (명사산)

 (백마탑)

 (봉화대)

 (비천)

(비천) 

 (비천)

(비천)

 (월아천)

 (사주 야시장)

 (사주 야시장)

 (양관고성)

 (양관고성)

 (양관고성)

 (양관고성)

 (오아시스 농법)

 (오아시스 농법)

 (옥문관)

(월아천)

 (월천각)

 

 

 (한나라 성벽터)

 

 

 

둔황[ Dunhuang , 敦煌(돈황) ]


중국 간쑤성 서부 주취안지구[酒泉地區] 허시저우랑[河西走廊] 서쪽 끝, 당허강[黨河] 유역 사막지대에 있다. 란저우[蘭州]와의 거리는 1,137km, 둔황석굴[敦煌石窟]과는 25km 거리이다. 연평균기온 9.4℃, 연평균강수량 32.9mm이다.

타림분지 동쪽 변두리를 복쪽으로 흐르는 당허강 하류 사막지대에 발달한 오아시스 도시로서,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의 관문으로, 고대의 동서교역·문화교류 및 중국의 서역 경영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BC 1세기 초에 한(漢)나라의 무제(武帝)는 이곳을 서역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아 둔황군[敦煌郡]을 두고 부근에 위먼관[玉門關]·양관[陽關]의 두 관문을 설치하는 한편, 둔전병(屯田兵)과 한인(漢人)의 식민을 투입함으로써 둔황은 그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뒤 타림분지의 한 오아시스는 중국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변경도시로 변모하고, 서방과의 접촉지를 차지하여 한인·페르시아인·투르크인·인도인 등 여러 종족이 어울려 사는 국제성을 띤 무역도시로 번영하였다.

5호 16국시대의 한족의 국가 서량(西凉:400∼421)이 둔황을 국도(國都)로 삼았던 사실은 그 발전상을 말해준다. 그보다 앞서 4세기 중엽에는 이미 이 지방의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고, 불교도 융성하여 첸포동[千佛洞]으로 불리는 유명한 석굴사원의 조영(造營)이 시작되었다. 366년 전진(前秦)의 승려 낙준(樂尊)에 의하여 시작된 석굴사원의 조영사업은, 그 뒤 북위(北魏)·서위(西魏)·북주(北周)·수(隋)·당(唐)·5대(五代)·송(宋)·원(元)에 이르는 13세기 무렵까지 지속되었다.

서량이 멸망한 뒤, 둔황은 북량(北凉)·북위의 지배를 거쳐 수·당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무렵부터 실크로드의 두 갈래 통상로, 즉 톈산남로[天山南路]와 톈산북로[天山北路]가 차지하는 교통상의 중요성이 바뀌어, 남로에 대신하여 북로가 중요성을 더해가자, 둔황은 그 번영을 북동쪽의 상락현(常樂縣:지금의 安西縣 부근)에 빼앗기고, 명칭도 과주(瓜州)로 바뀌었다. 그러나, 대(對)서역 방어의 거점으로서의 지위에는 변함이 없었고, 당대(唐代)에는 다시 사주(沙州)로 고쳐 병력을 주둔시킴으로써 방어 및 동서무역의 요지로 삼았다.

8세기 말에는 토번(吐蕃)에 의하여 점령당하고, 9세기 중엽 이후는 당나라의 귀의군절도사(歸義軍節度使)의 지방정권을 받게 되었다. 한때 독립하여 금산국(金山國)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나, 11세기 초 다시 서하(西夏)의 지배 아래 들어간 뒤부터 둔황은 쇠퇴기를 맞게 되었다.

그 뒤, 원대(元代)에 사주로(沙州路)의 치소(治所)가 되고, 명대(明代)에 사주위(沙州衛)가 되었으나 그 벽지화(僻地化)는 피할 수 없었으며, 또 과거의 불교 사찰이나 석굴사원도 쇠미해져서 청말(淸末)에 영국의 고고학자 스타인(Aurel Stein)이 둔황 모가오굴[敦煌莫高窟]을 찾았을 때는 도사(道士)와 몇 사람의 라마중만이 살았다고 한다. 1987년에 시(市)로 승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