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로챠나/사 찰

승가사 (三角山 僧伽寺, 서울시 종로구 구기동 산 1)

왈선생 2013. 6. 17. 17:55

 

 

 

 

 

 

 

 

 

 

  

 

 

 

 

 

 

 

 

 

  

 

 

 

 

 

 

 

 

 

  

 

 

 

 

 

 

 

 

 

  

 

 

 

 

 

 

 

 

 

 

 

 

 

 

 

 

 

 

 

 

 

 

 

 

 

 

 

 

 

승가사 [ 僧伽寺 ]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756년(경덕왕 15)에 수태(秀台)가 창건하여 당나라 고종 때 장안 천복사(薦福寺)에서 대중을 교화하면서 생불(生佛)로 지칭되었던 승가(僧伽)를 사모하는 뜻에서 승가사라 하였다.

그 뒤 1024년(현종 15)에 지광(智光)과 성언(成彦)이 중창하였고, 1090년(선종 7)에는 구산사(龜山寺)의 주지였던 영현(領賢)이 중수하였으며, 1099년(숙종 4)에는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왕과 왕비를 모시고 참배하면서 불상을 개금(改金)하고 불당을 중수하였다.

1422년(세종 4)에 왕이 7종을 통합하여 선교양종(禪敎兩宗)을 통합할 때는 선종에 속하였으며, 그 뒤 여러 차례의 중건·중수를 거쳐 고종 때 민비와 엄상궁의 시주를 얻어 일신, 중건하였다. 1941년에 도공(道空)이 다시 중수하였으나, 6·25전쟁 당시 소실되었으며, 1957년에 비구니 도명(道明)이 중창하여 대웅전과 영산전(靈山殿)·약사전(藥師殿) 등의 당우를 갖추었다. 그 뒤를 이어 비구니 상륜(相侖)이 불사(佛事)를 계속하여 현재는 산신각(山神閣)·향로각(香爐閣)·동정각(動靜閣)·범종각(梵鐘閣)·대방(大房)·요사채 등의 당우들이 좁고 가파른 지형을 이용하여 알맞게 배열되어 있다. 비록 규모는 작으나 창건 이후 여러 왕들이 행차하여 기도하였고, 조선 초기의 고승 함허(涵虛)가 수도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조선 후기에는 성월(城月)이 이절에서 배출되어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의 직책을 맡아 쇠잔하던 불교를 크게 진작하는 등 불교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사찰이다. 또한 예로부터 기도처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절의 유물로는 보물 제1000호로 지정된 석조승가대사상이 있으며, 서북방 100m 지점에는 보물 제215호로 지정된 거대한 마애석가여래좌상이 부각되어 있다. 이 마애불과 약사전에 모신 약사여래의 영험, 그리고 약수의 효험 등은 이 절을 기도처로서 유명하게 만들었다. 절의 뒤편 비봉에는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있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고, 그 자리에는 유지비(遺址碑)가 세워져 있다.

 

북한산구기리마애석가여래좌상[ 北漢山舊基里磨崖釋迦如來坐像 ]

전체 높이 5.94m, 너비 5.04m. 보물 제215호. 거대한 크기의 이 불상은 당나라의 신승(神僧) 승가(僧迦)의 성적(聖蹟)을 얻은 수대(秀臺)가 756년(경덕왕 15년)에 삼각산 남쪽에 굴을 만들어 창건하였다고 전해 오는 북한산 중턱의 고찰(古刹) 승가사 뒤편 바위에 낮은 부조로 새겨져 있는 좌상이다.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높고 큼직한 살상투[肉髻]를 갖춘 머리는 민머리[素髮]이며, 백호공(白毫孔)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네모꼴에 가까울 정도로 풍만하게 처리된 얼굴에는 오뚝하게 솟은 콧날과 꾹 다물고 있는 입, 가늘게 내려 뜬 눈과 눈썹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두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졌다. 목에는 가는 선으로 조각된 삼도(三道)가 희미하게 나타나 있다.

왼쪽 어깨에 걸쳐 입은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法衣)는 넓은 옷깃이 왼쪽 어깨로부터 오른쪽 겨드랑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옷주름 선은 유려하고 활달하다. 그러나 형식화된 각진 어깨와 밋밋한 가슴 등은 입체감이 결여되어 있다.

팔을 약간 벌려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 모양을 하고 있는 손은 당당한 불격(佛格)을 나타내 준다. 뿐만 아니라 오른쪽 손목을 안쪽으로 꺾이게 함으로써 율동적인 면 또한 잘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화사한 중판연화문대좌(重瓣蓮花文臺座) 위에서 가부좌한 양 무릎은 넓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다. 손 밑의 발은 호화로운 연꽃대좌와는 대조적으로 탄력성을 잃어버린 채 손과 같이 큼직하게 조각되었다.

대좌로부터 시작되는 광배는 굵은 선으로 아무런 장식 없이 조각된 키 모양의 거신광(擧身光)이다. 머리 위에는 개석(蓋石) 아랫면에 연꽃잎과 자방이 아름답게 조각된 팔각형의 다른 돌을 바위에 붙여서 보개(寶蓋)로 삼고 있다. 머리 위쪽 좌우와 양어깨 옆으로 파여 있는 네모꼴의 구멍은 목조전실(木造前室)의 가구(架構) 흔적으로서 마애석굴(磨崖石窟)을 모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풍만하고 당당한 체구에 장중하고 단정하면서도 자비가 넘쳐흐르는 통일신라시대의 마애불상들보다는 다소 둔화되고 형식화된 감이 있다.

하지만 신체 표현은 어느 정도 균형이 잡혀 있으며, 얼굴 표정 또한 부드러움과 자비로움이 잘 간직되어 있는 10세기의 고려시대 불상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을 지니며 이 불상과 가장 친연성이 있는 것으로는 월출산마애불좌상(月出山磨崖佛坐像)을 들 수 있다. 또한 이 불상은 11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묘적암마애불좌상(妙寂庵磨崖佛坐像)과 대흥사북미륵암마애불좌상(大興寺北彌勒庵磨崖佛坐像)·법주사마애불의상(法住寺磨崖佛倚像) 등과의 영향 관계까지도 짐작하게 해 주는 고려시대 마애거불상의 하나이다.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僧伽寺 石造僧伽大師坐像)

 

 

경덕왕 15년(756년)에 수태(秀台)가 창건한 승가사에 모셔져 있는 이 상은 인도의 고승으로 중국 당나라에 와서 전도에 전념하여 관음보살로까지 칭송받았던 승가대사의 모습을 새긴 초상(肖像) 조각이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고 얼굴은 넓적하면서도 광대뼈가 튀어나와 전형적인 시골 노인같은 인상으로 지방색이 짙게 보인다. 이러한 특징은 평판적인 체구와 함께 충북 제천군 한수면 사자빈신사지(獅子頻迅寺址)에 있는 석탑석상 등의 고려 초기 석조 승상과 비슷한 면을 보여준다. 또 긴 상체에 비해서 유난히 넓은 하체는 고려 초기의 철불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주름선이 굵으면서도 간결해 당시의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배(舟) 모양의 광배(光背)는 승상에 비해서 넓고 큼지막하며,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나뉜다. 머리광배에는 연꽃무늬와 덩쿨무늬, 모란무늬를 새겼으며, 둥근 원형의 몸광배에는 덩쿨·보상화무늬를 새겼다. 광배 뒷면에는 태평 4년(고려 현종 15년, 1024)에 지광스님이 중심이 되어 광유 등이 조각했다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고려 초기의 확실한 초상 조각으로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각광을 받던 석굴(石窟)과 함께 크게 주목된다.

인도의 고승(高僧)으로 중국 당나라에 전도하여 관음보살(觀音菩薩)로 까지 칭송받았던 승가대사(僧跏大師)의 모습을 새긴 고승의 초상(肖像)조각이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등신대(等身大)의 이 승가대사상은 두건을 쓴 머리, 넓적하면서 광대뼈가 나온 얼굴, 평판적인 체구 등의 특징에서 사자빈신사지석탑석상(獅子頻迅寺址石塔石像), 등 고려 초기의 석조(石造) 승상(僧像)과 비슷한 면을 나타내고 있으며 긴 상체나 넓은 무릎 등은 고려초기 철불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승가대사상을 후광(後光)으로 빛내주는 광배(光背)는 승상에 비해서 넓고 큼직한 주형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인데 신광부(身光部)는 둥근모양으로 신라 광배와는 다른 모양이다. 여기에 연꽃무늬, 당초무늬, 모란무늬, 보상꽃무늬, 불꽃무늬 등을 꽤 정교하고 세련되게 조각하여 우수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광배 뒷면에는 ‘태평사년(太平四年) 즉 고려 현종(顯宗)15년(1024)에 지광(智光) 스님이 동량이 되고 광유(光儒) 등이 조각했다 ’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서 고려초기의 확실한 초상조각으로 삼국시대이래 고려시대까지 각광을 받던 석굴(石窟)과 함께 크게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