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복장佛腹藏은 부처, 보살 등 존상尊像 속에 복장 의식에 따라 여러 종류의 내용물을 넣는 과정과 그 내용물을 통칭한다. 불복장이 언제부터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 경남 산청 내원사에 모셔져 있는 석남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영태永泰 2년, 766) 대좌에 납석제 사리호가 들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복장물을 넣었음을 알 수 있다. 복장물은 불상 뿐 아니라 탑과 탱화에서도 발견된다. 탑의 복장물은 사리와 함께 발견되고 있으며, 불상과 탱화에서는 이들을 만든 다음에 복장물을 봉안함으로써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하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불상佛像은 상 속에 여러 종류의 내용물을 넣는 의식을 통해 일반적인 조상造像에서 예배ㆍ신앙, 상징성을 지니는 존상이 된다. 복장을 봉안하는 그 순간부터 복장물을 시주한 이의 염원과 신앙이 담긴다. 이렇게 복장을 봉안하는 행위는 불교를 더욱 더 대중들과 어우러지게 만들었다. 이러한 복장 의식 및 복장 내용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상경造像經』의 정립과 함께 점차 일정한 형식과 절차를 갖추어 정형화된다.
직지사에서는 2006년 3월 3일 비로전毘盧殿 불상의 개채 중수를 계기로 비로자나불, 석가불, 약사불의 복장을 확인한 바 있으며, 이때 승가대학으로 쓰이는 남월료南月寮 큰방에 모셔진 불상 또한 개금改金을 위해 함께 조사하였다. 비로자나불상의 경우 밑면의 나무판을 떼어내자, 그 속에 봉안되어 있던 불상 조상기造像記 1점ㆍ『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3책ㆍ다라니경 1책ㆍ다라니 5점 등이 나왔으며, 노란 비단으로 여미고 한지로 싼 후령통喉鈴筒도 있었다. 나머지 불상들 또한 비슷한 복장물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들 수습된 복장물은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으며, 불상에는 조상기를 비롯한 옛 복장기腹藏記를 그대로 베껴 쓴 글, 이번에 새로 개금하게 된 경위와 과정을 밝힌 삼존불상 개금기, 그리고 새로 마련한 복장물을 넣어 다시 봉안하였다. 당시 수습된 복장물 가운데 비로자나불상에서 나온 조상기와 후령통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조상기
비로자나불상의 복장 확인 때 후령통과 경전, 다라니 등과 함께 불상의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는 자료인 조상기造像記가 나왔다. 이 기문은 ‘강희칠년무신오월초사일조상康熙七年戊申五月初四日造像’이라는 글로 시작된다. 그 뒤로 시주자, 화주, 화사 등의 명단이 적혀 있다. 강희 7년은 조선 현종 9년, 곧 서기 1668년에 해당한다. 따라서 처음에 적힌 문장을 통해 이 불상이 1668년에 조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조상기를 실마리로 비로전의 세 불상과 남월료 불상의 복장 확인 과정에서 더욱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직지사에는 비로전과 관련된 몇 가지 기문과 현판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1707년 쓰여진 <직지사 천불전 중창기直指寺千佛殿重刱記>에는 비로전에 안치된 천불상은 1656년 경잠景岑스님이 처음 만들었으며, 비로전은 그로부터 5년 뒤인 1661년에 창건되었고, 1668년에는 기일 機日스님이 천불상과 별도로 5구軀의 불상을 조성하여 비로전 불단에 모셨으며, 이들 다섯 불상은 1707년 개금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비로전에 모셨던 두 불상, 곧 비로자나불상과 약사여래상, 그리고 남월료 큰방에 모셨던 불상에서 나온 복장기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이미 밝혔듯이 비로자나불상에서는 1668년에 조성하였다는 조상기가 나왔으며, 남월료 불상에서도 동일한 필치와 동일한 내용의 조상기가 발견되었고, 약사여래상에는 1707년에 개금하였다는 복장문이 들어 있었다. 이들 세 불상은 재질 또한 같아서 오늘날 흔히 ‘불석佛石’이라고 부르는, 경주 일원에서 산출되는 석재였다. 따라서 이들 세 불상은 1668년 기일스님이 조성한 5구의 불상 가운데 세 분임이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그 동안 비로전에 모셔졌던 석가여래상에서는 순치順治 5년(1648)에 작성된 복장기가 발견되었고, 불상의 재질 또한 나무여서 앞의 세 불상과 일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이 판명되었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해 짐작컨대, 1668년에 일괄 조성되어 비로전에 모셨던 다섯 불상은 1707년 이후 어떤 사정에 의해 여러 전각으로 뿔뿔이 흩어진 반면, 언제부턴가 다섯 불상보다 먼저 만들어진 석가여래상이 비로전에 함께 모셔졌던 듯하다. 이런 판단에 근거하여 사중寺中에서는 개금을 마친 뒤 비로전에는 비로자나불상, 약사여래상, 그리고 남월료 큰방에 모셨던 불상을 안치하고, 남월료 큰방에는 그 동안 비로전에 모셨던 석가여래상을 옮겨서 안치했다.
비록 부분적이긴 하지만 조상기를 통해 또 한 가지 확인한 사실이 있다. 그 동안 남월료 큰방에 모셔졌던 불상은 ‘보살상’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이유는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보발寶髮이 어깨 위로 늘어진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불상의 조상기에서는 존명尊名까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 상이 ‘여래如來’라고 명확히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비로전을 비롯한 몇몇 곳에 보살형의 노사나불이 안치된 예로 보건대 이 불상 또한 노사나불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다. 다만 현재로는 더 이상의 명확한 근거가 없어서 조심스럽게 추정할 따름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불복장의 하나인 조상기는 불상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자료이다. 이를 통해 불상의 조성 연대를 알 수 있음은 물론,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이나 잘못 알려진 사실 따위를 확인하고 바로잡을 수 있기도 하다. 직지사 비로전 비로자나불상의 조상기를 비롯한 기타 복장문은 이와 같은 사실을 보여주는 생생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2) 후령통
후령통이란 불상이나 불화 등을 조성할 때 함께 넣는 오곡五穀(다섯 가지 곡식), 오향五香(다섯 가지 향), 오약五藥(다섯 가지 약초), 범서梵書(범자梵字로 기록된 글), 오색사五色絲(다섯 가지 색실), 발원문發願文 등을 넣는 통을 말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후령통의 높이는 대부분 약 10~20cm 정도이다. 불상에는 원통형의 후령통을 넣고, 탱화에는 사각통이나 직물로 만든 탱화 복장낭 형태로 뒷면에 부착하거나 끈으로 양쪽을 매어 중앙에 늘어뜨린 형태도 있다.
후령통은 대부분 철이나 구리 등 금속재료로 만들지만 가끔 대나무, 목재, 종이 등으로 만들기도 한다. 뚜껑과 본체를 따로 만드는데, 뚜껑에는 둥근 대롱을 끼워 넣어 오보병(오방색 보자기)을 둘러싼 오색실이 밖으로 빠져 나오는 통로가 되도록 한다. 본체 표면에는 산스크리트 문자를 써넣고, 내부에는 색실로 묶은 오색천을 넣어 빈 공간을 채운다. 복장을 넣을 때는 보자기로 잘 싸거나 복장 주머니에 넣어 통 안에 보관한다.
후령통의 전체적인 구조와 내용물은 이미 많은 부분 알려져 있는데, 『조상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수많은 물목들이 모두 들어간 예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대체적으로 오보병의 모습이나 오보병 안에 대표적으로 들어가는 번幡, 산개傘蓋, 금강저金剛杵, 오곡, 오향 등의 구성 요소는 공통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직지사 비로전 비로자나불 복장 확인 과정에서 수습된 후령통의 주위를 싸고 있는 황초폭자(黃綃幅子: 후령통을 감싸는 황색의 보자기)는 후혈喉穴(뚜껑에 있는 둥근 대롱)에서 연결되어 나온 오색실로 묶여 있다. 이 묶은 부분을 한지에 주사로 ‘근봉謹封’ 이라는 글자를 써 넣어 봉하였다. 황초폭자를 벗긴 후령통 외부에는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사방경(四方鏡-동쪽은 방경方鏡, 서쪽은 원경圓鏡, 남쪽은 삼각경三角鏡, 북쪽은 반월경半月鏡)이 오색실로 묶여 있다. 후령통의 뚜껑을 열면 후혈을 통해 안으로 들어와 있는 오색실이 오보병과 연결되어 있다. 오보병의 위쪽에는 연꽃 모양을 묘사한 금속의 팔엽八葉이 있다. 오보병은 오색실로 감겨 있는데, 실을 풀면 각각 분리된다. 각각의 오보병은 사방을 접어 말아 감싸 오색실로 묶었다. 오보병을 풀어보지 않아서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번ㆍ산개를 본 떠 만든 모양의 천, 오곡, 오약, 오보 등이 들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보병은 비로자나불의 다섯 가지 지혜의 보배를 상징하고 있다. 오경은 다섯 가지 지혜를, 오향은 다섯 가지 부처님의 향기를 표시하고, 오약은 다섯 가지 병을 다스리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등 오방위에 맞게 안치되는 여러 물목들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또, 오보병 이외에도 진언眞言이 적힌 종이, 흰 수정으로 만든 연봉蓮峰(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하는 화엄경에서 설하고 있는 연화장 세계를 표현하는 장엄물) 등이 수습되었다.
고려시대나 조선 전기 복장의 경우 대부분 복식을 포함한 직물과 지류가 많이 수습되나, 17세기 이후에는 후령통 중심으로 복장이 이루어진다. 후령통 안은 오보병 중심으로 간략화된다. 지류 부분에서도 상당히 축소되어 보협인다라니나 오륜종자진언五輪種字眞言 중심의 소규모로 나타난다. 전적 또한 일반적으로 『묘법연화경』이 복장물로 납입된다. 조선시대로 들어서면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다양한 불교문화의 퇴행이 이루어지는데, 불복장 또한 간략화되고 형식화되는 모습들은 이런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직지사 비로전 비로자나불상 역시 17세기 후반에 제작되어 후령통ㆍ묘법연화경ㆍ보협인다라니 등이 복장 안에 채워졌으며, 개별의 복식이나 직물은 나오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의 복장이 이루어졌던 듯하다. 이런 추측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985년 일본 청량사淸凉寺에 봉안된 석가모니불상이 있다. 이 불상은 중국에서 만들어 일본으로 전래되었다고 하는데, 인간의 오장육부를 직물로 형상화하여 복장을 하였다. 또한 많은 수량은 아니지만 일본의 경우 발원문을 비롯하여 전적, 직물 등이 발견되고 있어 한국과 일본은 복장물이 대략적으로 같은 형식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수량적으로나 질적인 면, 또 형식적인 면을 살펴볼 때, 현존하고 있는 복장 유물들은 독자적인 모습으로 발전해나간 한국 불교문화의 독창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렇게 불상 안에 봉안된 복장물은 단순히 존상의 빈 공간을 채우는 물건이 아니라,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유물들이다. 또한 그 속에는 성스러운 물건들을 넣어 부처님의 생명력과 위신력을 부여하고자 했던 종교적인 염원이 담겨 있다.
윤현숙(직지성보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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