뤄양 [洛陽(낙양), Luoyang]
황허강[黃河]의 지류인 중국 허난성 서부 뤄허강[洛河] 유역에 위치한다. 중국의 7대 고도(古都)로 꼽히며, 성도(省都)인 정저우[鄭州]와의 거리는 140km이다. 연평균기온 14℃, 연평균강수량 703.9mm이다. 부근 일대는 뤄허강 연안의 소분지로, 예로부터 화베이평원[華北平原]과 웨이수이[渭水]분지를 잇는 교통요지를 이루었다. 장안(長安:지금의 西安)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자주 국도(國都)가 된 곳으로 유명하다.
BC 11세기에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동방경영의 기지로 축성한 데서 비롯되며, 당시에는 낙읍(洛邑)이라고 하였다. 그뒤 BC 770년에 주왕조가 현재의 산시성[陝西省]의 호경(鎬京)으로부터 낙읍으로 천도한 뒤 동주(東周)의 국도로 번영하였고, 후에 후한(後漢), 삼국(三國)의 위(魏)·서진(西晉)도 이곳에 도읍하였는데, 후한 때부터 도성의 규모가 남북 9화리(華里:1화리=0.5km), 동서 6화리였기 때문에 구륙성(九六城)이라고 하였다.
한편 정식명칭은 전한(前漢) 때에 낙읍(洛邑)으로 불리다가, 후한이 AD 25년에 국도로 정하면서 현재 명칭인 뤄양으로 고쳤다. 후에 북위(北魏)가 화북을 평정하자, 493년에 효문제(孝文帝)가 산시[山西]의 다퉁[大同]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여, 구륙성을 중심으로 시역(市域)을 동서 20화리, 남북 15화리로 확장하였다. 호수(戶數) 약 11만, 불사(佛寺) 1,378을 헤아렸던 당시의 모습이 양현지(楊衒之)의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 기술되어 있다.
수(隋)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605년에 병란으로 황폐한 북위의 뤄양성 서쪽 15km 지점에 거의 같은 규모(주위 69화리)의 새로운 성을 건설하고, 장안의 부도(副都)로 삼아 동도(東都)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뤄양의 전신이다. 당(唐)나라도 부도로서의 뤄양의 지위를 이어받아 동도하남부(東都河南府)라고 불렀으나, 수·당시대에는 서쪽의 장안이 정치도시인데 대하여 뤄양은 경제도시로 대운하를 따라 수송되는 강남의 물자 집산지로 번영하였다.
그러나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난 뒤 쇠퇴하여 오대(五代) 때에 후당(後唐)의 국도가 되고, 북송(北宋) 때까지 서경(西京)이라고 불렀으나 원(元)·명(明)·청(淸)나라 때에는 지방도시로 일관하였다. 중화민국 시대에는 한때 성도가 되었고, 1933년에는 난징[南京] 정부가 이전해 왔던 적도 있다. 1948년에 시(市)로 승격하였다.
오늘날 뤄양은 다시 발전하여, 정저우와 더불어 허난성의 2대 공업도시가 되었다. 중국 최대의 트랙터공장을 비롯하여, 베어링·유리·화학비료 등의 공장이 입지하고, 대규모의 면방직 콤비나트가 형성되어 있다. 한편 부근에는 석탄 및 기타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또 대도시 중에서는 싼먼샤[三門峽]댐의 수력전기를 가장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한편, 미사일·항공기지 등이 있어서 군사적으로도 크게 중요시된다. 부근 농촌에서는 밀·옥수수·콩·목화 등의 농산물을 산출하며, 특히 무단화[牡丹花]가 유명하다.
룽하이철도[連雲港~蘭州]와 쟈오즈철도[焦枝鐵道:焦作∼枝城]의 교차점이며, 310·207국도와 고속도로가 지나고, 민항(民航)도 통한다. 교육기관으로는 뤄양대학·뤄양의학원·뤄양중의학원[洛陽中醫學院]·뤄양공학원 등 3,551개의 고·중·소학교가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중국 최초의 불교사원인 바이마사[白馬寺]·중국 미술사상 중요한 문화재로 꼽히는 룽먼석굴[龍門石窟], 이밖에 톈진교[天津橋]·관린[關林]·뤄양구무[洛陽古墓]박물관·무단[牡丹]공원·백거이묘(白居易墓) 등 명승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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