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로챠나/사 찰
개심사
왈선생
2011. 8. 8. 23:07
문화에 단절은 없다. 조선이 아무리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만을 장려했다고 해서 불교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조선 전기에도 절간들이 건축되었다. 문화는 결코 되풀이되지 않는다. 조건이 달라지면 형태가 바뀐다. 조선 전기에 문화 조건이 너무나 많이 변하였다. 절간 건축도 이런 조건 속에서 새로운 경향이 많이 등장했다.
대웅전은 제법 높은 길게 다듬은 돌로 만든 기단 위에 얌전히 올라 앉아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절간 건물로서는 큰 편이 아니다. 작지만 기품이 제법 풍겨 나온다. 1484년 조선 성종 때, 조선 건국한 지 90년 쯤 지났을 때 지었다. 그렇다면 은은히 풍겨 나오는 저 품위는 조선 사대부의 분위기란 말인가.
건축물에서 공포는 지붕의 무게를 기둥에 전달하고 지붕의 높이를 높인다.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으면 주심포식이라 하고, 기둥 사이에도 짜 맞추면 다포식이라 한다. 개심사 대웅전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두 개씩 넣었다. 다포식이다. 주심포식 건물의 지붕은 대개 맞배지붕이다. 그래서 측면에 공포를 짜 넣지 않는다. 반면에 다포식 건물은 팔작지붕인 경우가 많고, 측면에도 공포를 짜 넣는다. 고려 때는 주심포식 맞배지붕이 일반적이었다. 예산 수덕사 대웅전이 그 대표다. 조선 때는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 크게 유행하였다. 더 크고 높게 그리고 화려하게 지으려면 다포식 팔작지붕이어야 한다. 개심사는 다포식이면서 맞배지붕을 갖추고 있다. 고려와 조선의 절충식인 것이다.
주심포의 내부는 복잡하지 않아 천정을 해 넣지 않아도 된다. 서까래, 들보, 도리와 같은 건축 부재들로 천정을 구성하면 훨씬 격조 높고 높이도 높은 천정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천정을 연등천정이라 한다. 그러나 다포식 건물은 내출목이 있기 때문에 내부가 매우 복잡해졌다. 같은 모양이 반복되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다. 가려 버려야 했다. 네모반듯한 반자로 천정을 막았다. 그런데 개심사 대웅전은 내출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자로 천정을 가리지 않았다. 불상 위 일부만 반자를 해 넣었다. 대부분 연등천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오히려 내출목 공포들을 내부 분위기를 화려하게 만드는 데 이용했다. 네모지고 굵직한 대들보와 그와 직각되게 달리는 도리들과 그 위에 빗금의 서까래로 극락세계를 표현했다. 꼭대기 들보(종보)에서 꼭대기 도리(마루도리)를 받치는 대공을 화려하게 파련으로 장식했다. 고려와 조선의 건축 특징이 개심사 대웅전에 혼재되어 있다.
태종은 숭유억불의 기치를 확실히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그의 아들 세종은 정치적으로는 불교를 축소시켜 나갔지만, 불교 사상에 상당히 심취해 있었다. 그의 형 효령대군은 불교에 독실하여 세종의 허락 아래 불사를 많이 일으켰다. 서울 시내 한가운데 원각사를 짓기도 했다. 강진 무위사를 지은 것도 바로 효령대군이었다. 세조임금은 임금 자신이 불사에 앞장섰다. 상원사와 낙산사를 크게 다시 짓고 병 치료를 핑계로 이런 절간에 왕래하기도 했다.
세종 때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무위사 극락전 짓는 데 효령대군의 영향이 컸다. 그렇다면 본존의 모습은 당시 임금인 세종임금의 모습인가. 극락전 내부에는 불화가 가득 차 있었다. 지금은 옆 보존건물에 옮겨놓았다. 15세기 후반에 그린 것들로 고려 불화를 계승한 조선 전기 불화를 대표한다. 무위사에서 얼마 멀지 않은 영암에 있는 도갑사도 조선 전기에 세운 절간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건물로 남은 것은 해탈문밖에 없다. 해탈문은 세조 때인 1457년에 수미와 신미 대사의 발원으로 중건되어 1473년에 완공되었다. 기본적으로는 주심포 건물이지만, 조선식의 다포양식이 부분적으로 가미되었다. 역시 과도기의 절충식이라 할 수 있겠다.
조선 전기 절간 건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안동 봉정사 대웅전이다. 봉정사는 건축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는 절간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봉정사 극락전은 고려시대 절간건축 형식을 잘 보여준다. 대웅전은 고려말에 시작한 다포식 건물이 조선에서 발전해 나간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극락전 좌우에 있는 화엄강당과 고금당은 조선 중기 이후의 익공식 건물의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왼쪽 위에 있는 영산전은 옹기종기 모여 앉은 건물들이 만드는 우아한 분위기에 압도당해버리기에 적당하다. 우화루의 멋들어진 문은 또 어떻고.
봉정사 대웅전은 누가 지었을까? 잘 모른다. 아마도 안동 지방의 유지가 몰래 돈을 대지 않았을까? 숭유억불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불교에 독실한 자들은 정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정부의 정책을 어겨가면서 절간들을 지었다. 서울 부근에서는 왕실의 원찰로 절간들이 축조되었다. 그래서 조선전기 절간 건물들은 고려양식을 계승하면서 조선 전기 건축술이 가미되었다. 조선의 다포식 건축물이 형식을 완성하기 전까지 건축상 조선 전기는 고려와 조선 건축의 과도기였다. 무위사 극락전은 고려전축의 재현에 가까웠고, 개심사 대웅전은 다포식이면서 주심포의 연등천정을 유지한 가장 확실한 절충식이었으며, 봉정사 대웅전은 다포식이면서 아직 주심포의 테를 완전히 벗지 못한 조선식 아류였다. 규모가 크지 않은 조선 전기 건축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조선을 일으킨 사대부의 냄새가 배어난다. 귀족 경향을 극복하고 조선을 세운 현실성이 절간에도 어쩔 수 없이 묻어난다. 일단 화려하고 웅장하지 않아 사람을 압도하지 않는다. 그냥 포근하고 다정다감하다. 압도당하지 않고 강제당하지 않는 절간을 찾고 싶은 사람은 조선전기 절간을 고를 일이다. |